주간동아 455

2004.10.14

“민청학련 때 오해받을 행동했다”

한나라당 곽성문 의원 커밍아웃 … “피해 입은 동지들에게 사죄”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4-10-07 1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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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청학련 때 오해받을 행동했다”

    1975년 2월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모두 풀려난 가운데 지학순 신부(가운데 무등 타고 있는 이)의 석방을 지인들이 환호하고 있다.

    1974년 4월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에 민청학련 소속 학생들의 동향을 제보했다는 의혹을 받아오던 한나라당 곽성문 의원이 30년 만에 입을 열었다. 곽의원은 10월1일 국회 의원회관 자신의 사무실에서 ‘주간동아’와 한 인터뷰에서 “당시 오해받을 소지가 있는 행동을 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동지들에게 사죄한다”고 말했다(인터뷰 참조).

    당시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직을 맡았던 곽의원은 74년 3월 말 학생회 간부 및 대의원들과 함께 중정 고위인사 자택을 방문한 일과 같은 대학 사회학과 2학년 후배였던 문국주씨(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무처장) 검거 과정, 그리고 검찰 측 증인으로 나서 같은 대학 국사학과 선배였던 황인범씨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배경 등에 대해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털어놓았다.

    민청학련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스스로 사죄의 의견을 밝힌 것은 뒤틀린 현대사를 재조명하는 모티브가 된다”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일부 관계자들은 “과거사 진상규명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편승, 당시 과오에 물타기를 하려는 처사”라는 상반된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200여명 구속 朴정권 최대 시국사건

    민청학련 사건은 1974년 4월 당시 중정이, 민청학련이 민중봉기를 통해 국가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대학생을 비롯해 1000여명이 넘는 사람을 경찰서 또는 정보기관으로 끌고 가 그 가운데 200여명을 구속한 박정희 정권 최대의 시국사건 가운데 하나. 당시 서울대 문리대를 중심으로 한 운동권 세력이 유신반대를 위한 조직화를 꾀했는데, 이를 중정이 악용한 것.



    “민청학련 때 오해받을 행동했다”

    2003년 4월9일 대전 스파피아호텔에서 개최된 민청학련운동 29주년 기념식 장면.

    이 사건으로 이철 전 의원·유인태 의원(우리당) 등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해찬 총리·정동영 통일부 장관·정찬용 대통령 인사수석보좌관· 이종구 성공회대 교수 등이 중정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당시 관계자들은 수사과정에서 중정 수사관들이 자신들의 움직임을 손금 보듯 알고 있었다면서 내부 제보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던 강창일 의원(우리당)의 설명이다.

    “당시 분위기는 매우 험악했다. 중정의 회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감옥을 가야 했고,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이면 반대급부가 대단했다. 당시 전문적인 프락치들도 꽤나 많았는데 이를 ‘중정 장학생’이라고 표현했다.”

    서울대 사학과 67학번으로,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해 ‘민청학련 4인방’으로 통했던 서중석씨(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도 당시 운동권 내부를 관통하고 있던 밀고 문화를 인정했다. 그는 “유신체제라 감시의 눈길이 번득였고 그 과정에서 정보를 캐는 사람과 전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른바 내부 밀고자의 존재를 실제로 확인하기란 불가능했다. 확증을 잡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로만 떠돌던 민청학련 내부 밀고 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30여년이 지난 지난해 말. 민청학련 핵심으로 활동했던 이종구 교수가 2003년 11월 ‘실록 민청학련’이란 글을 통해 몇몇 인사들의 석연찮은 행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 가운데 곽의원의 불투명한 행적도 도마에 올렸다. 이교수가 쓴 글의 일부다.

    “민청학련 때 오해받을 행동했다”

    2003년 7월 민청학련 사건 당시 구속됐던 강구철씨의 1주기 추도식 모습.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하는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민청학련 관계자들의 재판 모습.김수환 추기경이 김지하씨에게 술을 권하고 있는 모습.(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남산 지하실에서 (나를) 심문하던 수사관이 내가 딱해 보였는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중정에서 자기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 간부들이 중앙정보부 5국장을 찾아갔다.’ 5국장이 학생회 간부의 친척이었다는 것이다. 얘기를 듣다보니 대대적인 사전 검거가 시작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계속해서 ‘실록 민청학련’의 내용이다.

    “그날 오후에 형사들이 망원경을 꺼내고 운동화로 갈아 신고 어디로 몰려나갔다. 알고 보니 서울 절두산성당 근처에서 사회학과 73학번 문국주를 잡아온 것이었다. 학생회 임원 중에 강구철과 문국주씨가 만나기로 한 약속을 경찰에게 알려준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이교수는 이 약속을 경찰에 알린 장본인으로 곽의원을 지목했다. 당시 구속됐던 문국주씨는 10월1일 전화통화에서 “30여년 전 일”이라며 말을 아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을 재차 부탁하자 입을 열었다.

    숨겨진 진실 밝힐 중요한 실마리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직후 나는 당시 이해찬씨(현 국무총리) 등과 함께 문리대 운동권의 리더로 활동했던 총학생회 간부 강구철(작고) 선배와 마포 절두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곽의원이 어떻게 알았는지 나오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만나자며 약속 장소에 갔다가 경찰에 잡혔다.”

    곽의원은 이에 대해 “문국주씨에게 사과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문씨는 “그때 일은 다 잊었다”고 말했다.

    74년 7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황인범씨의 1심 재판에서 곽의원이 검찰 측 증인으로 나온 것도 도마에 올랐다. 황씨는 당시 곽의원과 4·19 직후 통일운동 등에 대해 토론을 했고, 검찰은 이것이 북한의 통일전략에 동조하는 행위라고 몰아붙였다. 검찰의 이런 주장에 황씨는 부인했지만, 곽의원은 시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와 관련 곽의원은 “검찰 측 증인으로 나서 황씨와 다른 증언을 했다”고 인정했다. 그는 “40여일간 조사를 받고 나와서 보니 조사과정에 내가 무슨 얘기를 해놓고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민청학련 때 오해받을 행동했다”

    민청학련 사건의 주역들. 이해찬 총리, 정동영 통일부 장관, 유인태 우리당 의원, 이철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공동대표(왼쪽부터).

    곽의원의 이번 고백은 민청학련의 숨겨진 작은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실마리로 볼 수 있다. 여권 일각에서는 이를 토대로 “더욱 구체적으로 당시 상황을 조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정치적 논쟁으로 치닫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사자들 대부분이 부담을 느끼는 눈치다. 문국주씨는 “당시 곽의원이 이것저것 생각을 많이 한 것 같다”는 말로 곽의원의 ‘불투명한’ 행적을 이해하려 했다. 다른 한 관계자는 “유신독재가 낳은 비극이자 희생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민청학련을 둘러싼 곽의원의 불투명한 행적은 물론 다른 인사들의 이중적 동선도 규명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사건이 일어난 지 30년이 넘은 지금도 민청학련의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공동대표 이철)는 오는 10월15일 ‘실록 민청학련’ 제3권 출판기념회를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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