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44

2004.07.22

전시회로, 책으로 ‘예술 따라잡기’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4-07-16 15: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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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회로, 책으로 ‘예술 따라잡기’

    김재준씨가 최근 펴낸 책 ‘언어사중주’.

    6월16일부터 22일까지 일주일 동안 서울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 피시에서는 ‘전쟁의 재구성’이란 기획전이 ‘조용히’ 열렸다. 작가는 ‘그림과 그림값’이란 책으로 꽤 많이 알려진 미술 컬렉터이자 국민대 경제학부 교수인 김재준씨였다.

    본업이 교수인 한 미술애호가의 개인전인지라, 이 전시는 제대로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미술판에서의 평가는 악평인 경우에도 대단히 배타적으로 ‘작가’들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럴 때 작가란 미술대학을 나와 견고한 미술계 학연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드물게 대가한테서 도제 수업을 받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꽤 많은 작가들이 ‘비밀리에’ 이 전시장을 들렀고, 또 적잖은 작가들은 쓴 입맛을 다신 것으로 전해진다. 이 ‘아마추어’ 작가의 미술적 행위-이번이 이미 네 번째 개인전이다-가 가볍게 웃고 격려해줄 만한 취미가 아니라 현대 미술의 정곡을 찌르는 어떤 것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눈치 빠른 작가와 관객들이라면 그의 작업이 ‘폼생폼사’하는 ‘전문작가’들의 신비주의적 작업과 자기만족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도 깨달았을 것이다.

    전시회로, 책으로 ‘예술 따라잡기’

    ‘전쟁의 재구성’전.

    그는 ‘전쟁의 재구성’을 통해 미국과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이후 매일 매일의 날짜와 그날 사망한 미군 수와 이라크인의 수를 대비시켜 썼다. 3주간의 결과는 117:6009. 또한 CNN을 통해 전쟁을 중계해 보는 60억 지구촌의 사람들을 위해 경기도만한 스타디움 축소 모형과 서울시만한 그라운드, 이라크를 축소한 필드를 만들기도 했다. 그의 의도는 명백하다. 그는 전쟁을 숫자로 재구성하여 이미지(또는 오브제)로 표현함으로써 사람들이 전쟁을 자신의 현실로 생각하게 한 것이다.

    시각이미지 평론가 이정우씨는 “최근 열린 전시 중 ‘전쟁의 재구성’이야말로 가장 훌륭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전시회로, 책으로 ‘예술 따라잡기’

    Dance, acrylic on canvas.

    김재준씨는 경제학자에서 작가가 된 것일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그는 미술판의 인맥 없이도, 다루기 힘든 미술 재료가 없이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누구나 미술작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수학자가 그러하듯, 그것을 증명해냈다.

    ‘전쟁의 재구성’이 예술적 증명이라면, 그가 동료들과 함께 새로 펴낸 책 ‘언어사중주’는 말을 통해 어떻게 생각하고 예술품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해설서다. 8월 말에 ‘화가처럼 생각하기’가, 그리고 연말에 두어 권의 책이 더 나오는데 이 책들은 모두 김재준씨의 생각하기에 대한 방식, 그리고 예술 창작의 과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책 ‘언어사중주’ 통해 예술품 해설

    그의 책들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언어사중주’는 중고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주는 실질적이고 귀중한 정보다. 그는 고등학생을 위한 책을 펴낸 이유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시기가 고등학교 때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전시회로, 책으로 ‘예술 따라잡기’

    개인전을 통해 보여준 작품 ‘60억을 수용하는 경기스타디움 건축 모델’.

    이 책은 모두 4악장으로 돼 있다. 1악장은 주경철 교수(서울대 서양사학과)가 쓴 ‘읽기와 토론’이고, 2악장은 김종면 박사의 ‘영어교실’, 3악장은 김재준 교수의 ‘생각하기’, 4악장은 신광현 교수(영어영문학과)의 ‘글짓기’이다.

    다시 3악장은 ‘머리는 좋은데 공부 안 하는 아이들’ ‘노래방에서 배우는 함수의 개념’ ‘수학은 미술이다’ ‘국회의원은 왜 부패하는가’ 등의 소재로 이뤄져 있다. 언뜻 수학과는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수학이든 미술이든 국회의원의 부패 같은 사회 문제도 ‘높은’ 위치에서 보면 서로 ‘통역’이 되며 ‘재구성’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정말 말하고 싶은 것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요. 말은 많이 하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지난 세기 말에 여기저기에서 세계 현대 100대 작가를 선정하곤 했는데, 그것이 마치 한 사람의 포트폴리오처럼 보이더군요. 자신의 말을 가진 작가들이 많지 않다는 거죠.”

    전시회로, 책으로 ‘예술 따라잡기’

    A pingpong diplomacy, pen on paper.

    그러므로 좋은 예술작품이란 “분명한 컨셉트를 갖고,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의 다음 책 ‘화가처럼 생각하기’는 바로 이런 결론을 담게 될 것이다. 좋은 작품이 무엇인지 안다면, 누구나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작가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기준은 문제는 이 같은 작업을 즐겁게, 평생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우연한 결과로 끝내버릴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경제학자이면서 음식평론가 미술 컬렉터이고, 예술품 시장의 분석가이자, 개념주의적 비디오 작가인 그는 숫자의 재구성을 통해 인류학과 정치학, 사회학자 들, 심지어 작곡의 영역을 관통하여 접속한다. 최근엔 인류학자와 ‘왜 한국과 일본의 여성들은 피부 미용 화장품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가’를 연구하는 중이며, 실내악 4중주를 쓰고 있기도 하다.

    전시회로, 책으로 ‘예술 따라잡기’

    김재준씨가 경기장을 모방한 전시장에서 관객들에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 뒤에 플라톤이나 피타고라스 같은 고대 철학자 또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문학자가 되려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올바르게 생각한다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증명하는 명제이다.

    단, 한번이라도 생각하기와 말하기에 대한 갈등을 절박하게 느껴보지 않았다면, 그의 미술 작품과 책들이 주는 섬뜩함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것이 앞으로 그가 풀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언어사중주’는 논술고사에 대비한 실용서로서 충분히 훌륭하긴 하지만.



    문화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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