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8

2004.04.01

아수라장 대만 정국 언제까지…

선거 후유증 극심 ‘분열·갈등 최고조’ … 천수이볜 ‘독립’ 공약 탓 중국도 신경 곤두세워

  • 상하이=소준섭/ 푸단대 국제관계학 박사 namoo0011@hanmail.net

    입력2004-03-25 13: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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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상 유례없이 치열하고 심각한 양상을 빚었던 대만 선거가 3월20일 결국 천수이볜의 승리로 매듭을 지었다.

    천수이볜의 재선은 여러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천수이볜의 민진당이 개혁의 기치를 장악하면서 국민당 계열에 비해 도덕적 우위에 섰다는 점, 그리고 상대방 진영에서 더욱 높은 대중적 명망성을 가지고 있는 쑹추위 친민당 주석 대신 리덩후이 전 총통의 ‘예스맨’으로 인식되고 있는 롄잔 국민당 주석이 연합 후보로 나섰던 점은 천수이볜의 재선을 가능하게 해준 큰 요인으로 풀이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선거 전날 터져나온 천수이볜에 대한 총격사건은 그에게 동정표를 몰아주는 효과를 가져와 이번 선거의 마지막 변수로 작용했다. 사실 이번 선거 과정에서 국민당의 롄잔 후보측이 시종일관 근소하나마 우세를 보여왔는데, 마지막에 역전을 당하고 말았다.

    롄잔 후보측 지지자들 연일 시위

    이에 롄잔 후보측은 총격사건이 ‘자작극’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총격사건 진상공개’와 ‘부정선거 의혹’을 이유로 선거무효와 함께 무기한 장외투쟁을 선언하면서 지지자들은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또한 647만 표 대 644만 표라는 양측의 득표 숫자가 말해주듯 대만 사회가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진’ 이 상황에서 향후 어떻게 분열을 치유하고 통합을 이뤄나갈 것인가가 가장 커다란 과제로 떠올랐다.

    2000년 이후 천수이볜이 집권했던 4년 동안 중국과 대만은 계속 냉담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천수이볜은 앞으로 4년 동안 이미 자신이 공언한 바처럼 ‘대만 독립 스케줄’을 추진해가야 한다는 큰 부담을 안고 있다. 그가 기존의 ‘대만 독립 스케줄’을 계속 밀고 나갈지, 아니면 중국 대륙과 모종의 타협을 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그리고 중국 대륙으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미 공고해진 정권을 장악한 대만의 ‘정치적 실체’와 어떻게 대화를 해나갈 수 있을 것인지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국의 국가 제1목표는 조국 통일이다. 이는 대만을 ‘수복’하는 일이다. 중국으로서는 대만의 독립을 저지하고 국가통일을 이루는 것이 지도층의 정치적 명운과 국익을 건 핵심적 문제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만은 중국의 정치적 생명이다. 만약 대만이 독립을 선언하고, 중국에서 이를 저지하지 못할 경우 중국 내 도미노 현상을 초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장 신장 지방과 티벳 등 소수민족들의 분리운동은 순간에 엄청난 추동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분열과 통일의 역사를 반복해온 중국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이 시나리오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4년 전 총통선거에서 국민당 세력인 쑹추위와 롄잔 두 사람은 합쳐서 60%가 넘는 득표율을 보였으나 분열된 탓에 결국 39%의 천수이볜에게 정권을 넘겨줘야 했다. 당시 국민당 주석이었던 리덩후이가 쑹추위를 철저히 반대해 결국 쑹추위가 국민당을 탈당한 후 단독 출마함으로써 국민당 두 명 대 민진당 한 명의 대결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 두 사람은 그런 상황의 재연을 막기 위해 2월14일 극적으로 합작을 선언하고 단일화에 성공했다. 한편 ‘양국론’을 제기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대만 독립의 기치를 가장 먼저 내걸었던 리덩후이 전 총통도 이미 오래 전부터 2008년까지 반드시 대만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원래 국민당 당적으로 총통 자리에 올랐던 리덩후이는 지난번 선거에서 사실상 천수이볜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결국 국민당적을 박탈당한 뒤 대만연당(臺灣聯黨)을 창당해 천수이볜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2월28일 그는 대만을 지키기 위한 ‘대만 독립 기원 100만명 손잇기 운동’을 추진한 바 있다. 이날은 대만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찍이 1945년 장제스 국민당 군대가 대만에 진주하여 점령했을 때 대만 본토인들에 대해 차별정책을 편 결과 대만인들이 이에 반발하여 크고 작은 봉기가 일어났는데 그중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47년 2월28일 타이베이시에서 일어난 대규모 봉기다. 이때 국민당 정부는 무자비한 진압으로 대응해 많은 사상자를 내게 했다. 국민당과 친민당이 합작을 선언한 2월14일 이래 국민당 계열은 천수이볜에 줄곧 우세를 보여왔으나 ‘2·28 손잇기 운동’ 이후 격차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대만 정치계에서 4대 천왕으로 불리는 천수이볜, 롄잔, 쑹추위, 리덩후이 네 명이 합종연횡한 이번 총통 선거는 대만 독립문제를 둘러싸고 찬반 양측이 총력을 다한 결전이었던 셈이다.

    현재 대만성 출신들은 75%에 이르고 있는데 대개 타이난 가오슝 등 대만 남부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타이베이 등 북부지역에 자리잡은 대륙 출신들과 달리 중국으로의 회귀에 대해 비판적인 경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이렇게 대만 선거가 북부 대 남부의 지역구도로 나뉘면서 지역대립이 어느때보다 심각한 양상을 빚고 있어 선거가 끝난 뒤에도 극심한 후유증을 낳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천수이볜 총통은 2006년 12월10일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2008년 5월 20일 신헌법을 공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이는 분명히 베이징 올림픽이 2008년에 개최되는 것을 겨냥한 것이다. 즉 중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 세계박람회라는 두 가지 국가 대업에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여 대만 문제는 중국 지도자들의 제1관심사에서 밀려날 것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을 것이라는 판단인 셈이다.

    그러나 대만의 독립 움직임에 대해 중국 지도자들의 태도는 단호하다. 지난달 원자바오 총리는 설사 중국의 경제발전이 20년 후퇴하고 베이징 올림픽을 포기하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대만의 독립 추진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밝혔다.

    사실 중국 지도자들뿐 아니라 평소 만만디로 유명한 중국 일반 국민들도 대만 문제만 나오면 모두 정열적인 전사로 변한다. 물론 중국 지도자들은 언제나 평화통일을 내세우고 있지만, 중국인들의 머릿속에는 대만 문제가 마치 청나라 강희제 때 전쟁을 통해 대만을 정복한 것처럼 전쟁이 아니고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들은 조국의 부름이 있으면 언제든지 조국통일의 전쟁터로 나갈 것을 맹세하고 있다. 13억 중국인들이 모두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대만을 통일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 홍콩을 반환받은 것이 과연 최선이었나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홍콩 반환 이후 서구 세력이 떠나면서 홍콩이 침체했다”면서 “당분간 현상유지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현상유지’에 대한 관점은 중국 대륙의 입장에서든 대만의 입장에서든 대만 문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처리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

    더구나 이번 총통선거와 함께 진행됐던 국민투표안이 예상과 달리 과반수에 미치지 못한 채 부결된 것은 이후 대만의 독립 추진에 상당한 제약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독립에 대한 속도조절 요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중국 대륙과 대만은 이러한 전제하에 극적 타협의 실마리를 잡을 수도 있다.

    중국인들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인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상업국가인 중국은 상인 기질답게 실리를 가장 중시하고 그것을 위해 언제든지 기꺼이 타협할 준비가 돼 있다. 사실 중국과 대만은 한국, 북한과 함께 이 지구상에 남은 두 개밖에 없는 분단국이다. 하지만 부모 자식 간에 서신조차 교환하지 못하고 생사도 모를 정도로 철저히 분단된 우리의 현실과 달리, 중국과 대만은 통일을 빼놓고는 자유왕래, 경제교류 등 모든 것을 이미 하고 있다.

    중국인들이 즐겨 하는 말이 있다. “아무리 나빠도 얼마나 나빠질 것이며, 아무리 좋아도 얼마나 좋아질 것인가?” 이런 중국인들의 사고 방식은 중국과 대만의 통일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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