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8

2004.04.01

“과격은 가라!” 정치 분노를 축제로

탄핵 반대 촛불집회 성숙한 시민의식 … 정치집회 국민참여 방식 새로운 계기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4-03-25 1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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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격은 가라!” 정치 분노를 축제로

    3월20일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집회에는 경찰 추산 13만여명의 시민이 참가해 ‘탄핵 반대’를 외쳤다.

    ”초 필요하신 분, 여기서 받아가세요. 초 있습니다.”

    3월18일 오후 8시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 쩌렁쩌렁한 행사장 앰프 소리를 뚫고 두 명의 대학생이 ‘초’를 외치고 있었다. 15일부터 나흘째 이곳에서 초를 나눠주고 있는 윤나영(22), 조아라씨(22)다.

    “처음에는 집회에 참가하려고 나왔어요. 그런데 현장 방송에서 ‘자원봉사자가 부족하다’는 광고가 나오잖아요. ‘우리가 하자’고 마음먹었죠.”

    매일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꼬박 이곳을 지킨다는 윤씨는 “우리가 없으면 ‘촛불’집회가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며 “초를 나눠주는 ‘촛불조’는 봉사자들 사이에서 특공대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역할”이라고 자랑스레 웃었다. 이들 옆에는 한 무리의 다른 자원봉사자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인간띠를 만들어 집회 참가자들이 인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었다.

    함께 노래 토론 대동제 성격



    ‘탄핵 반대’를 외치는 이번 촛불집회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찬반으로 갈리지만, 이 집회가 평화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대부분이 동의한다. 정치적 이슈를 주제로 한 집회에서 으레 나타나던 폭력성이나 흥분이 사라진 대신, 함께 노래하고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는 대동제로서의 성격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정치적 의사를 문화적으로 표현하는 모델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탄핵 반대 촛불집회는 우리나라 정치집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한 계기가 됐다는 분석이다.

    이처럼 집회문화가 바뀐 데에는 이번 집회의 기획자들과 뒤에서 궂은일을 도맡아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큰 역할을 했다.

    85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탄핵무효·부패정치 척결을 위한 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의 공동상황실장 겸 행사기획팀장 김금옥씨(40)는 요즘 오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2~3시까지 촛불집회 준비에 매달리고 있다. 낮 동안은 내내 그날의 집회를 준비하고, 행사가 끝나면 바로 다음날을 위한 회의를 여는 것이다. 연일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목소리는 완전히 쉬었지만, 표정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지금까지 운동은 항상 ‘누군가를 박살내는’ 부정적인 방식이었잖아요. 하지만 이번 집회를 계기로 사람들은 ‘우리가 모여 뜻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된 거 같아요. 집회 초반에는 혹시라도 경찰이나 보수단체와 물리적 충돌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제는 그런 우려도 다 사라졌습니다. 지금의 집회 참가자들은 술 취한 노인들이 와서 ‘빨갱이’라며 시비를 걸어도 흥분하지 않고 달래서 돌려보낼 정도로 넉넉하고 여유 있거든요. 즐거운 마음으로 집회에 나오니 싸움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과격은 가라!” 정치 분노를 축제로

    촛불집회 현장을 인터넷 생중계하는 자원봉사자들. 촛불집회 행사 기획을 맡은 정은숙, 김금옥씨(왼쪽부터)가 국민의 부릅뜬 눈을 상징하는 머리띠를 하고 있다(위부터).

    그래서 김씨는 이런 시민들의 특징이 제대로 드러나는 행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지금의 촛불집회는 ‘대본 없는 생방송’이다. 집회 전에 세워놓은 계획들도 현장에서 시민들의 요구에 따라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집회장에서 김씨의 손발 노릇을 하며 행사 진행을 돕는 이는 정은숙(38), 이송지혜씨(32) 등. 이들은 집회장에서 발언하거나 노래할 출연진을 섭외하고, 참여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 무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정씨는 “한나라당 홍사덕 원내총무가 ‘이태백이나 사오정들은 왜 집회에 나오느냐’고 말한 다음날 시민들은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집회장에 ‘이태백, 사오정 구역’을 만들었다. 이태백, 사오정이 집회에 참가하는 게 문제 된다면 다른 이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그 안에만 모여 있겠다는 유쾌한 저항의 표현이었다. 시민들이 무대에 올라와 발언하고 노래를 부르며 집회를 만들어갈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벤트까지 기획하고 있는 것”이라며 “행사 진행자들이 하는 일은 이 판을 만들어주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역동적으로 돌아가는 행사를 실시간으로 현장에 전하고, 인터넷 중계하는 이들도 있다. 이번 촛불집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역대 어느 집회보다 다양한 첨단 멀티미디어 기기가 동원되고 있다는 것. 수만의 군중 사이사이에는 대형 모니터가 설치돼 무대 모습을 보여주고, 노래나 출연자가 바뀔 때마다 자막으로 안내를 해준다. 현장에 나오지 않은 네티즌들은 인터넷 방송 중계를 통해 집에서 집회에 참여할 수도 있다. 멀티미디어 기기들이 질서 유지와 많은 이들이 축제를 공유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국민행동’이 20일 촛불집회에 온·오프라인 합쳐 100만명의 시민이 참여할 것이라고 장담했던 것은 이 같은 멀티미디어의 위력을 믿은 덕분이다.

    이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이끌고 있는 이들도 모두 자원봉사자들. 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이 모여 만든 ‘세진음향’이 시스템 설치와 현장 방송을 맡고, 뮤지컬 기획자 신현욱씨(37) 연출가 김정환씨(37) 등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집회가 열릴 때마다 몇 시간 전부터 미리 현장에 나가 전선을 깔고, 시스템을 설치하는 일을 ‘노 개런티’로 해내고 있다.

    “과격은 가라!” 정치 분노를 축제로

    촛불집회는 자원봉사자와 참여 시민들의 힘으로 운영되고 있다. ‘민주수호’ 모금함에 성금을 넣는 시민(위)과 직접 만들어 온 피켓을 들고 있는 집회 참가자들.

    신씨는 “노래할 줄 아는 사람은 노래로, 기획할 줄 하는 사람은 기획으로, 음향을 만질 줄 아는 사람은 음향으로 행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 모인 것”이라며 “집회에 직접 참가하지 못하고 시스템 보호를 위해 쳐놓은 안전망 뒤에 앉아 있지만, 그 틈으로 수만개의 촛불이 눈에 들어올 때면 가슴이 벅차다. 3일째 밤잠을 못 이뤄 쌓인 피로를 모두 잊을 정도”라고 말했다. 현장에서 인터넷 방송을 담당하고 있는 인터넷 패러디 작가 ‘바람서리’씨(31)도 “이곳에서는 집회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어 즐겁다”고 덧붙였다.

    멀티미디어 위력 발휘로 한몫

    ‘국민행동’의 공동상황실장과 언론홍보팀장을 맡고 있는 김혜애씨(40)는 “정치인들은 멱살잡이를 하고 다투며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지만,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평화로운 축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이 집회 참가자들의 자부심”이라며 “시민들이 직접 행사 아이디어를 내고, 돈을 모으고, 자원봉사자로 참여해 만드는 집회가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것은 우리 정치에 희망이 있다는 증거다. 이번 집회를 통해 정치권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몰상식한 행태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고, 시민들은 ‘우리가 뭉치면 화염병이나 돌 없이도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촛불집회를 만드는 것은 시민들이고, 그들이 이 ‘축제’의 성과를 모두 가질 것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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