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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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는 외국인 “경찰이 무서워”

돈 뜯어내는 관행 탓 이미지 나빠 … 잦은 테러·안전사고도 불안 요인

  • 모스크바=김기현 동아일보 특파원 kimkihy@donga.com

    입력2003-12-24 17: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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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사는 외국인 “경찰이 무서워”

    러시아의 경찰.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의 모스크바 지사에 근무하는 한국계 미국인 A씨는 지난주 가족들과 함께 볼쇼이극장을 찾았다. 모스크바에 부임한 지 반년이 넘도록 업무에 쫓겨 그 유명한 볼쇼이 발레를 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다 어렵게 시간을 낸 것. 볼쇼이의 화려한 무대는 듣던 대로였다. 아내와 두 딸도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처음 모스크바로 부임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자 울상을 지으며 “아빠 혼자 가시라”던 아이들에게 모처럼 으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봐, 모스크바에 오길 잘 했지?” 극장 문을 나서니 하얗게 내린 눈과 까만 어둠이 빚어내는 야경이 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그러나 차를 몰고 출발한 지 5분이 채 안 돼 교통경찰이 차를 세웠다. 경찰관은 대뜸 “음주운전을 했느냐”고 물었다. A씨는 서툰 러시아어로 “가족을 태우고 운전하는데 어떻게 술을 마셨겠느냐”며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경찰은 막무가내로 확인을 위해 혈액검사를 해야 되니 함께 경찰병원으로 가자고 요구했다.

    신나치 청년들 외국인 공격

    러시아 사는 외국인 “경찰이 무서워”

    ‘볼쇼이 발레’는 러시아에 사는 외국인에게 가장 매력적인 문화로 꼽힌다.

    이대로 끌려가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A씨는 갖고 있던 루블을 건넸다. 그러자 “무슨 외국인이 돈이 이것밖에 없느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끝까지 버텨볼까도 생각했지만 불안에 떠는 가족들 때문에 100달러를 주고 무마한 A씨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분통이 터졌다. 그는 이날 저녁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린 것 같았다.

    ‘철의 장막’이 걷히고 개방이 시작된 지 10여년이 지나면서 러시아에 사는 외국인 수는 크게 늘어났다. 러시아 이민당국에 따르면 자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는 30여만명. 구소련 국가나 중국 등에서 온 불법이민자도 5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몇 명 안 되는 외교관과 외신기자가 외국인의 전부였던 구소련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외국인 커뮤니티가 커졌다. 특히 최근 2~3년 동안 외국인 거주자가 크게 늘었다.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집권 후 정치 상황이 안정되고 경제가 성장세를 타면서 외국인 투자와 외국계 기업의 진출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러시아 사는 외국인 “경찰이 무서워”

    12월 초 200여명의 외국인 유학생 사상자가 발생한 모스크바 루데엔 대학 기숙사 화재 현장.

    그러나 ‘러시아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구소련 시절 외국인들을 괴롭혔던 것은 생필품 부족과 부자유스런 생활이었지만 지금은 ‘안전에 대한 불안’이다.

    다국적 컨설팅사인 MHRC의 조사에 따르면 동유럽에서 모스크바가 가장 위험한 도시로 꼽혔다. 치안 불안과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체첸반군의 테러와 대형사고가 주된 원인이다.

    12월9일 크렘린궁에서 겨우 150m 떨어진 모스크바 중심가에서 차량 자살폭탄 테러로 2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근처를 지나던 중국인 여학생 1명도 다쳤다. 사고 현장 근처에는 한국 유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모스크바대 구관이 있어 자칫하면 한국인 희생자도 생길 뻔했다.

    11월에는 모스크바 루데엔대 기숙사에서 일어난 화재로 200여명의 외국인 유학생이 다치거나 죽었다. 한국 여학생 1명도 목숨을 잃었다. 1999년에도 모스크바대 기숙사에서 불이 나 한국인 학생 3명을 포함해 7명이 죽었다. 이로 인해 러시아에서 공부하려면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최근에는 외국인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신나치 청년들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스킨헤드’라고 불리는 이 청년들은 외교관까지 습격할 정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 부인이 쇼핑 중 폭행을 당하자 외교단이 러시아 정부에 항의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에 사는 외국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건 무엇일까? 모스크바 시정부가 최근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ROMIR와 함께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단연 ‘경찰’이라는 ‘조금 엉뚱한’ 답이 나왔다. 외국인을 보호하고 도와주기는커녕 기회만 있으면 돈부터 뜯으려고 덤벼드는 경찰이 무섭다는 것. 외국인 방문자를 위한 모스크바 안내 책자에도 “경찰을 조심하라”는 내용이 있다.

    발레·오페라 등 풍성한 문화는 매력

    이렇게 살기 험하고 불편한 러시아지만 막상 떠날 때가 되면 헤어지기 아쉬운 매력도 분명 있다.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러시아에 살면서 풍성한 문화에 매료됐다고 입을 모은다. 볼쇼이와 키로프로 대표되는 발레와 오페라, 차이코프스키와 로스트로포비치를 낳은 클래식 음악, 스타니슬라프스키와 체호프에 의해서 발전한 연극 등 러시아 문화의 세계는 넓고도 깊다.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에르미타주 등 수많은 박물관을 순회하면서 칸딘스키와 샤갈을 낳은 러시아 미술에 푹 빠질 수도 있다.

    외국인들이 앞다투어 러시아로 몰려드는 또 다른 이유는 러시아가 기회의 땅이라는 점 때문이다. 매킨지 모스크바사무소에 근무하던 미국인 폴 메이(35)는 최근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부동산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러시아 여성과 결혼한 그는 러시아 시장에 ‘올인’을 한 셈이다.

    뉴욕주립대 경영대학원(MBA) 출신의 그는 러시아가 위험하고 불안한 만큼 미국보다 ‘대박’을 터뜨릴 기회도 많다고 믿고 있다. 같은 대학에서 MBA를 이수한 친구들 중에도 이미 러시아로 건너온 경우가 꽤 많다는 것.

    러시아 경제가 지난 2~3년처럼 폭발적인 성장세를 유지한다면 러시아에 자리잡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외국인들도 훨씬 늘어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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