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3

2003.12.11

말 많은 ‘수능’ 결국 탈났네!

복수정답 인정 파문 확산 … 3번 정답자들 법정대응 추진 속 “구조적 문제 해결” 목소리 높아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3-12-04 13: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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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많은 ‘수능’ 결국 탈났네!

    11월28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앞에서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복수정답 인정 철회와 평가원장의 해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말이 없는 복수정답, 수험생들 피멍 든다.” “근거 없는 복수정답, 평가원장 해명하라.”

    11월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하 평가원) 앞에서는 전례 없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의 언어영역 17번에 대해 3번이라고 답한 수험생과 학부모 80여명이 모여 복수정답 인정 철회와 이종승 평가원장의 해명을 요구하는 집회를 연 것.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들은 “수능의 원칙은 최선의 답 하나를 찾는 것”이라며, 복수정답 결정 과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3번’이 쓰여진 종이를 손에 들고, 흰 마스크를 쓴 이들의 눈빛에서는 절박함마저 묻어났다.

    수능시험이 위기에 빠졌다. 학원강사의 출제위원 선정, 수능 문제 사전유출 의혹으로 불거진 수능 논란은 ‘복수정답 인정’으로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윤덕홍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11월27일 수능 논란과 관련한 교육부 내부의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대국민성명을 통해 머리 숙여 사과했다. 하지만 학원강사 출신의 교수 출제위원 선정과 복수정답 인정 경위에 대한 해명이 미진하다는 비판은 수그러지지 않고 있다.

    문제 제기한 교수 딸도 5번 ‘의혹 증폭’

    이번 수능 논란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역시 수험생들. 언어영역 17번 문제의 정답에 의문을 제기하며 만들어진 인터넷 카페 ‘2004언어영역 문제? 문제 있습니다(cafe.daum.net/ problem17)’와 3번 단독 정답 인정을 요구하며 만들어진 인터넷 카페 ‘3번 정답자들의 오프라인 결사대(cafe.daum.net/threeanswer)’에는 연일 3번 답과 5번 답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17번의 원점수 배점은 2점이지만, 문제의 정답률에 따라 적용되는 변환표준점수로 3.2점까지 손해볼 가능성이 있어 ‘3번 정답자’(3번이 정답이라고 답한 학생)의 반발이 거세진 것. 이들은 복수정답 논쟁에 매달리느라고 정작 집중해야 할 논술과 구술시험 대비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복수정답 인정을 거부하며 시위를 벌이던 한 학생은 심지어 학교에서 ‘5번 정답자’(5번이 정답이라고 답한 학생)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3번 정답자 학생을 대표해 서명을 받던 김글라라양(19)은 “학생들의 시위가 단순히 집단이기주의로 비춰져서는 곤란하다”며 “문제를 야기한 평가원의 정식 사과를 요청하기 위해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렇듯 수험생들의 혼란을 가중시킨 요인은 평가원의 뒤늦은 대처 때문. 최초 언어영역 17번 문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을 때 평가원측은 전문위원 3명의 검토 결과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서울대 불문과 최권행 교수가 한겨레신문을 통해 다시 17번 문제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고 이후 이의제기가 끊이지 않자 평가원측이 뒤늦게 재검토에 착수한 것이다. 결국 충분한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뒤늦게 나온 ‘복수정답 인정’ 발표는 3번 정답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최교수의 딸이 올해 수능을 치렀고, 언어영역 17번 문제에 대해 5번이 정답이라고 답한 것이 알려지면서 학생들의 의혹은 더욱 증폭됐다. 네티즌들은 최교수가 수능 자문회의 위원에 포함된 것을 놓고 “자식이 입시에 연관돼 있는 사람이 객관적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 평가원은 논란이 됐던 사회탐구 67번(짝수형)과 71번(예체능)의 경우 관련 분야 전문가 3인의 의견이 일치했다는 이유로 문항에 대한 검토를 중단한 것으로 밝혀져 형평성 논란이 일었다.

    말 많은 ‘수능’ 결국 탈났네!

    수능 파동에 대해 머리 숙여 사과하는 윤덕홍 부총리.

    논란은 3번 정답자들의 법정대응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3번 정답자들의 오프라인 결사대’ 회원들은 행정소송 준비를 위해 법률가들을 만나고, 회비를 모금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3번 정답자들은 11월28일 감사원에 평가원측의 복수정답 인정 경위에 대해 국민감사를 청구했다. ‘2004언어영역 문제? 문제 있습니다’의 회원 300여명도 역시 앞서 감사원에 수능의 사후처리에 대한 국민감사를 요구했다. 국민감사 제도란 만 20세 이상의 성인 300명 이상이 감사를 신청할 경우 감사원 직원과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감사위원회에서 감사 여부를 결정하고, 감사 결과를 신청인에게 통보하는 제도다. 수험생들은 이 제도를 활용해 평가원의 수능 사후 처리와 복수정답 인정 절차의 문제점을 밝히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9만5000명에 이르는 3번 정답자들이 법적 대응을 통해 피해보상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여부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3번 정답자들의 행정소송 성사 여부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이 적지 않다. 과거 사법시험 문제 출제 오류에 대한 소송을 진행했던 이재화 변호사는 “지금까지 하나의 정답으로 피해를 본 응시생들이 또 다른 답을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한 적은 있었지만, 복수정답 중 하나만 인정하게 해달라는 소송은 전례가 없다”며 “3번만이 정답이라는 확실한 근거가 없는 한 소송 진행이 어려울 것”이라 밝혔다. 문제를 출제한 평가원측에서 ‘복수정답을 인정하겠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는 한 3번만 맞다는 법원의 판결을 받아내기는 어렵다는 것. 설사 3번만 답이라는 판결이 나도, ‘복수정답 처리’가 학생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피해를 끼쳤는지 밝히기 어려워 손해배상청구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라는 게 이변호사의 설명이다.

    60만명의 응시생들이 ‘수능 대폭풍’에 혼란을 겪으며, 교육계는 현행 수능제도의 구조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교육개혁시민연대의 안승문 정책실장은 “한 가지 답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선다형 객관식 문항은 학생들의 사고 폭을 지극히 제한해왔다”면서 “문제 출제 오류를 지적하기에 앞서 하나의 답만 찾도록 하는 현행 객관식 수능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 K고등학교의 장모 교사는 “수능시험이 학생들이 공교육만 받고는 도저히 풀 수 없을 정도의 수준으로 출제돼 일선교사와 학생들의 허탈감만 가중시켰다”며 “언어영역 문제를 둘러싼 17번 논쟁도 결국 무리하게 문제를 만들면서 생긴 현상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송원재 대변인은 “올해 수능 파동은 현 대입제도가 수능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발생한 것”이라며 “60여만명의 수험생을 하나의 잣대로 한꺼번에 평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 만큼, 각 대학이 자유롭게 학생선발권을 갖는 것이 최선”이라고 지적했다. 동국대 교육학과 김성훈 교수는 “사고력을 측정하기 위한 수능의 본래 목표가 변질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빠르게 수능 출제유형을 분석하고 문제 푸는 기술을 습득해가는 반면, 문제 출제자들은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문제 유형을 충분히 개발하지 못했다는 것. 장기적인 안목으로 수년에 걸쳐 ‘문제 풀(pool)’을 만드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 짧은 기간에 수능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이 김교수의 견해다.

    말 많은 ‘수능’ 결국 탈났네!

    올해 60여만명의 학생들이 수능시험을 치렀다.

    한편 수험생들의 비난의 초점이 됐던 평가원측은 나름의 항변을 하고 있다. 평가원 이범홍 대수능연구본부 본부장은 “수능관리 제도가 허술하다고 비판받고 있지만 실제로 문제 출제위원을 선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고 털어놓았다. 실제로 이번 수능의 경우 156명의 출제위원과 33명의 문제 검토 교사가 동원됐는데, 상당수 교수는 부담감 때문에 출제위원 참여 제안을 고사한다는 것. 이본부장은 복수정답 인정 논란으로 더 많은 교수들이 출제위원 참여에 대해 몸을 사리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정부는 국무총리 특별지시에 따라 구성된 ‘수능출제·관리개선기획단’을 만들어 활동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기획단이 ‘땜질 처방’이 아닌 ‘근본적 변화’의 토대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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