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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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은 ‘비화폰’ 아직은 ‘부재중’?

국감서 청와대 지급설 등으로 다시 도마에 … “비상시 대비해 개발 시도했을 뿐 한 대도 없다” 해명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3-10-15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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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많은 ‘비화폰’ 아직은 ‘부재중’?

    지난 2월3일 팬택&큐리텔이 선보인 비화단말기

    ”아, ‘비화(秘話)폰’이요? 오늘만 두 명이 찾던걸요. 그런 제품 없다는데도 신문에서 봤다며 자꾸 떼를 써 설명하느라 혼났어요.”

    10월9일 오후 4시경 서울 용산전자상가의 한 통신장비 판매점. 비화단말기(도청이 불가능한 비밀통화용 휴대전화 단말기)를 찾는 고객이 있느냐고 기자가 묻자 판매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요즘 난리잖아요. 휴대전화도 도청이 된다, 그걸 피하려고 높은 분들만 비화폰을 사용한다고요. 자기 통화를 남이 듣는다는데 좋아할 사람 어디 있겠어요. 뭐 반대로, 어떻게 하면 휴대전화를 도청할 수 있냐고 묻는 사람들도 꽤 있지만요.”

    10월6~8일, 언론을 떠들썩하게 한 국정감사(이하 국감) 현장의 휴대전화 도청 논란이 시중에 끼친 영향이다.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며 흥분하던 국회의원들은 정작 조용한데 일반인들만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특히 올 국감에서 불거져 나온 비화단말기 사용 논란은 “도청이 가능하니 비화기술을 개발하네 마네, 비화단말기를 쓰네 마네 하는 것 아니냐”는 ‘논리’로 인해 더욱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국정원이 비화폰 판매금지” 주장도 제기



    말 많은 ‘비화폰’ 아직은 ‘부재중’?

    비화단말기 구입 및 이용료가 포함된 부산시청 예산 관련 서류.

    그러나 그 ‘논리’로도 ‘휴대전화 도청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정보통신부(이하 정통부)의 일관된 설명을 뒤집지는 못했다. 국가 안보 차원에서의 비화기술 개발과 휴대전화 도·감청 가능성은, 그 개연성에도 불구하고 일직선상에 놓고 볼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화단말기를 둘러싼 설왕설래, 그 진실은 무엇인가. 또 4년째 계속되고 있는 국감에서의 휴대전화 도청 공방이 자칫 소모적 논쟁에 그칠 가능성이 큰 이유는 무엇일까.

    올해 설 연휴가 끝난 다음날인 2월3일, 이동전화 단말기 제조업체 팬택&큐리텔은 서울 조선호텔에서 흥미로운 내용의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도청이 불가능한 비밀통화용 휴대전화 단말기, 즉 비화단말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회사측은 “통신상의 완벽한 사생활 보장을 원하는 특수 고객층을 대상으로 70만원대에 판매할 예정”이라는 계획까지 밝혔다.

    팬택&큐리텔의 발표는 다음날인 4일자 각 일간지에 ‘대서특필’됐다. 지난해부터 계속된 휴대전화 도청 공방이 채 가라앉지 않은 시점이었다. 연휴 뒤끝이라 특별한 뉴스가 없었던 점도 주효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팬택&큐리텔의 비화단말기, 모델명 600S는 단 한 대도 팔리지 않았다. 아예 출시되지 않은 까닭이다. 이렇게 비화단말기라는 생소한 이름의 ‘신기술 상품’은 기자간담회 당시의 떠들썩함이 무색할 정도로 세간의 관심에서 빠르게 멀어져 갔다.

    그런데 ‘그때 그 비화단말기’가 거짓말처럼 ‘부활’했다. 휴대전화 판매점에서가 아니라 국감장에서였다. 10월6일 정통부 국감에서 한나라당 권영세 의원은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이 ‘불순세력이 비화단말기를 사용할 경우 국가가 대응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팬택&큐리텔의 신상품 판매를 중지시켰다”며 “이동전화 도·감청을 하지 않고 있다는 평소 주장을 국정원이 나서서 뒤집은 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팬택&큐리텔의 비화단말기 생산 해프닝은 치밀하게 계산된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었다. 신생 브랜드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도청 논란을 십분 활용한 것. 심지어 회사 기술개발팀에서조차 “아직 보완할 부분이 많고 비화에 대한 근거도 확실치 않다”며 발표 유보를 요청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팬택&큐리텔은 컬러폰 출시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실제로 컬러폰은 팬택&큐리텔에 ‘대박’에 가까운 이득을 안겨주었다.

    말 많은 ‘비화폰’ 아직은 ‘부재중’?

    지난 10월6일 정통부 국감에서 휴대전화 도청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한나라당 박진 의원.

    이 회사의 한 간부는 “(비화단말기를) 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팔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는 애매한 답변을 했다. 그는 또 “솔직히 비화단말기 제작 기술이라는 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제약도 많아 비밀통화를 하는 두 사람 다 팬택&큐리텔 비화단말기를 갖고 있어야 하고, 서로 비밀통화에 동의해 비화기능이 작동하도록 코드를 맞춰야 한다. 시장에서 매력적인 상품은 아니었던 셈”이라고 설명했다.

    국정원의 제작 중지 압력에 대해서도 그는 “‘국민의 불안심리를 이용한 얄팍한 상술’이라는 이유로 업계나 정통부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국정원에서도 이런저런 말이 흘러 들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압력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비화단말기 출시 취소는 경영진과 기술팀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고 말했다. 권의원의 주장은 결국 ‘절반의 진실’에 불과했던 것이다.

    비화단말기와 관련해 이번 국감에서 더욱 흥미로운 자료를 제시한 것은 한나라당 박진 의원이었다. 박의원은 “청와대 경호실이 4월 일부 국무위원과 청와대 비서관급 이상 간부들에게 비화단말기를 지급했다. 또 정통부는 2001년 12월 각급 기관에 ‘2002년 8월31일 비화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니 비화단말기 구입 및 이용료 예산을 확보하라’는 공문을 보냈고, 이에 따라 부산광역시와 전남도청 등은 실제로 예산을 편성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박의원 역시 이를 근거 삼아 “정부 스스로 이동전화 도청이 가능함을 인정한 것”이라고 거세게 몰아붙였다.

    논란이 커지자 청와대와 정통부는 즉각 해명에 나섰다. “청와대에 비화단말기는 한 대도 없다. 또 공문을 보낸 것은 사실이나 이는 전시(戰時)나 국가위난시에 대비한 국가지도통신망 구축을 위한 것이었다. 그조차 국민들에게 ‘디지털 이동전화도 도청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까봐 집행을 중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명 과정은 매끄럽지 못했다. 국가지도통신망, 즉 ‘충무계획’ 관련 사항은 ‘2급 비밀’에 속해 공개된 자리에서 언급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진대제 정통부 장관이 즉각 답변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자 한나라당은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 진장관에 대해서도 위증이나 국감 방해 혐의로 고발을 검토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비화기술 개발은 도청과는 무관”

    그렇다면 국가지도통신망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 전쟁 발발 등 비상사태에 대비해 정부가 특별관리하는 통신망을 뜻한다. 정통부뿐 아니라 기획예산처, 해양수산부 등에도 국가지도통신망 담당 직원이 따로 있다. 현재 국가지도통신망은 신세기통신망(017망, SK텔레콤으로 합병)이다. 따로 전용망을 깔려면 수조원의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017은 군인이 쓰는 망이라 오지에서도 잘 터진다”는 세간의 속설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던 것.

    그런데 일각에서 “민간망을 사용하는 만큼 보안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비화기술 개발. 정통부 공보관은 “1996년 전자통신연구원(ETRI) 산하 국가보안기술연구소에서 작업에 착수했다. 단말기 수준의 개발은 완성됐지만 시스템 문제가 해결이 안 돼 정통부가 형식 승인을 내주지 않고 있다. 당연히 보급된 비화단말기는 한 대도 없다”고 밝혔다. 종합하자면 박의원이 지적한 ‘특수인용 비화단말기 지급 및 비화기술 개발’이 시도됐거나 현재 진행 중인 것은 사실이나, 이는 ‘만의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일 뿐 휴대전화가 도청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KTF의 한 임원도 “복제단말기가 있으면 도청이 가능하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실험실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못박았다. SK텔레콤 관계자도 “도청 목적 단말기와 20m 내 거리에, 동일한 전파 환경이 계속 유지되는 상황에서 본 단말기와 복제단말기의 통화 버튼을 1초도 어긋나지 않게 동시에 눌러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냐”고 되물었다.

    그럼에도 2000년 11월, 정선종 당시 ETRI 원장이 국감에 나와 “휴대전화 감청은 기술적으로 가능한 일”이라 밝히는 등의 도청 관련 발언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기술은 언제나 기술로 극복 가능하다’는 명제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CDMA(코드분할 다중접속) 휴대전화 도청기가 개발, 사용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한다. 일부 미군이 보안기능을 강화한 ‘QSec-800’ 단말기를 사용 중인 것도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어느 나라보다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미국에서 휴대전화 도청 논란으로 전국이 떠들썩한 경우는 없었다. 도청은 그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냐’가 아니라 ‘그 기술을 옳지 않은 목적에 활용하려는 세력이 엄존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국감이 마무리됨과 더불어 휴대전화 도청 논란도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한나라당 의원들도 10월8일, 비공개로 진행된 정통부 국감에서 전체적인 설명을 듣고 난 다음부터는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있다. 이 자리에서도 박진 의원은 “꼭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반응은 떨떠름했다 한다. 한 참석자는 “‘(도청) 증거도 없이 청문회부터 열었다간 표 다 떨어진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전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활동하다 통신업체 간부로 재직 중인 모씨는 “국회의원은 주제의 ‘섹시함’ 때문에, 야당은 여당의 도덕성에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국민들은 인권침해가 빈발했던 과거의 기억 때문에 도청이란 주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이미 통신비밀보호법이 제정돼 발효 중인 만큼 도청에 대한 경계심은 버리지 않되 명백한 증거가 발견되기 전에는 신중히 처신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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