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1

2003.09.11

만화영웅 ‘라이파이’ 41년 만에 컴백

국내 첫 SF만화로 당시 폭발적 인기 … 독자였던 50대들 ‘특별기획 회고전’에 발길 쇄도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3-09-03 17: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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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영웅 ‘라이파이’ 41년 만에 컴백

    8월27일 인사동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라이파이’ 회고전을 찾은 라이파이 열혈팬들이 만화가 김산호씨(뒷줄 가운데)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1950년대 말 어느 가을날 서울 장충단공원 한켠, 중년의 사내가 길거리에 만화책 좌판을 펼쳐놓고 서성이고 있다. 검정고무신에 남루한 옷차림의 아이들은 좌판 옆 길바닥에 주저앉아 만화책 보느라 정신이 없다. 개중에는 돈이 없어 만화책을 사지 못했는지 친구 어깨 너머로 열심히 만화를 훔쳐보는 아이도 있다.

    8월27일부터 9월2일까지 서울 인사동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부천만화정보센터 특별기획전 라이파이전’ 자료 사진 속 장면이다.

    ‘라이파이’는 만화가 김산호씨의 작품으로 1959~62년 4부작 32권 시리즈로 나온 국내 최초의 장편 SF만화. 주인공인 라이파이는 가슴과 머리에 ‘ㄹ’자를 새겨넣고 악당을 무찌르는 한국판 정의의 사자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고, 나라 밖 세상에 관심 두기 어려웠던 빈한한 시절, 세계 곳곳과 우주, 바다 밑과 북극 등을 누비며 최첨단 과학기술을 선보이고, 놀라운 마술과 태권의 세계를 보여준 ‘라이파이’는 당시 어린이들에게 꿈과 창의성, 모험심을 심어주었다. 그 인기는 요즘의 특급 스타 못지않아 하늘을 찔렀다.

    “사진 속 저 사람들, 지금 다 어디서 뭐 할까?”

    “남의 책 훔쳐보는 아이는 엄마가 돈을 안 줬나봐.”



    만화영웅 ‘라이파이’ 41년 만에 컴백

    ‘라이파이’ 원작.

    8월28일 오후, 18년 전 뉴욕으로 이민 갔던 재미동포 육상민씨(51)가 오랜만에 고국에 돌아와 누나와 함께 이 전시장을 찾았다. 육씨는 마치 사진 속 아이들 중에 자신이 있기라도 한 듯 보고 또 보았다.

    “이 전시회 소식을 듣고는 너무 반가워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어릴 때 ‘라이파이’를 읽을 때 매번 아슬아슬한 장면에서 끝나 몇 주 뒤에나 나오는 다음 호를 기다리느라 목이 빠졌었거든요. 그 사이 먼저 산 책을 읽고 또 읽어 표지가 너덜거릴 정도였습니다. 용기 있는 주인공들이 신비한 과학기술을 이용해 악당을 물리치는 이야기는 전쟁이 막 끝나 어려운 생활을 하던 우리에게 잠시나마 현실의 고통을 잊고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했습니다. 정말이지 그때는 ‘라이파이’를 보는 게 최고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전날 열린 전시회 오프닝에서는 작가 김산호씨뿐 아니라 만화가 박재동 이희재씨, 가수 최백호씨 등 머리 희끗한 50대 중년들이 41년 만에 돌아온 ‘라이파이’를 반갑게 맞으며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들은 정보센터에서 준비한 라이파이의 두건과 안대를 쓰고 ‘코스프레(costume play)’를 펼치며 동심으로 돌아가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만화영웅 ‘라이파이’ 41년 만에 컴백

    복간본을 들고 있는 김산호씨.

    이날 부산에 사는 박명흠씨는 폭우를 뚫고 아침 비행기로 상경해 전시회에 참가할 정도로 ‘라이파이’에 열광해 눈길을 끌었다. 한정본 1000부만 발행된 ‘라이파이’ 복간호를 구입해 작가로부터 친필 사인을 받은 박씨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부산에 있는 딸에게 전화했는데 딸이 ‘아빠, 행복해?’ 하고 묻더군요. 서슴없이 ‘행복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전시회 뒤풀이 때 김산호 선생, 박재동씨 등과 함께 부산동호회 결성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밤기차 안에서 복간본을 다시 읽으며 얼마나 가슴이 벅찼는지 모릅니다.”

    임춘호씨는 어머니가 주신 기성회비로 ‘라이파이’를 실컷 사 보고는 ‘죽도록’ 두들겨맞았다고 한다. 그런 추억 때문에 요즘 그가 사용하고 있는 아이디도 ‘라이파이’다. 어릴 때 ‘라이파이’에 빠져 살았던 가수 최백호씨는 최근 낸 베스트앨범 ‘최백호 히스토리’ 재킷에 자신이 직접 라이파이를 그려넣었다. 최씨는 “요즘엔 여러 종류의 스타가 있지만 당시엔 라이파이 외에는 영웅이 거의 없었다”며 “우리 또래 절반 이상은 그 만화를 보며 열광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와 동호회(www. rayphie.net)의 산파는 만화 보급에 힘쓰고 있는 부천만화정보센터(이사장 성완경·이하 정보센터). 이곳에서 하나의 만화작품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만화 탐구기획전’ 첫 기획 대상으로 ‘라이파이’를 선택한 것. 이번 전시회에서는 원작을 전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작의 독특한 만화 연출기법과 기계장치, 주인공 라이파이와 제비양, 녹의여왕, 김철수 탐정 등 주요 캐릭터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특히 빛보다 빠른 비행기인 제비기, 무선 연락기, 최근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터’에 나왔던 것과 같은 형태의 로켓벨트, 태양반사경 비행정 등 기계장치는 지금 봐도 놀라울 정도다. 전시회는 9월4일부터 11월30일까지 부천의 한국만화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두 달 간 계속된다.

    이전부터 ‘라이파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끔 만나 옛추억을 더듬기는 했지만 동호회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은 전시회 덕분이다. 만화가 박재동 백석민 손상익씨, 만화 애호가인 오경수씨 등이 김산호씨를 찾아가 동호회 얘기를 꺼냈고, 전시회를 앞둔 8월7일 강남의 한 레스토랑에서 애독자 6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동호회가 발족됐다.

    동호회도 결성 … 박재동씨 회장 추대

    만화영웅 ‘라이파이’ 41년 만에 컴백
    이날 동호회 결성식 행사에 참석한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유장렬 박사(51)는 ‘라이파이’를 보면서 과학자의 꿈을 키웠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유박사는 “60년대에 그만큼 엄청난 과학 이야기는 없었다”며 “라이파이를 돕는 윤박사에 빗대어 친구들이 나한테 ‘유박사’란 별명을 붙여줬을 정도로 만화에 심취했었다”고 회고했다.

    초대 동호회 회장에 추대된 만화가 박재동씨도 ‘라이파이’를 보면서 만화에 대한 사랑과 상상력을 키웠다. 박씨는 “지금 세대가 보면 감동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당시 ‘라이파이’는 우리들에게 엄청난 자신감과 활기를 심어줬다”며 “이렇게 ‘라이파이’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은 만화가 한 시절 나타났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영원한 문화자산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말했다.

    만화영웅 ‘라이파이’ 41년 만에 컴백
    박씨는 또 “오래된 캐릭터를 아끼고 사랑하는 일은 우리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일이고, 우리의 추억을 소중히 하는 일은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을 소중히 하는 일이다”며 되살아난 ‘라이파이’를 반겼다.

    이처럼 만화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크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슈퍼맨’이 경제공황기 미국인들의 불안감을 달랬으며, 일본에서는 ‘아톰이’ 전후 피폐한 사회적 상황을 뚫고 등장해 눈부신 과학 발전의 단초를 마련했다. 최근 일본에서 다시 불고 있는 ‘아톰 열풍’이 괜한 현상이 아닌 것이다.

    ‘다시 보는 우리 만화’의 저자 한영주씨는 “‘라이파이’가 우리 만화계에서 하나의 신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이전 시기의 만화들과는 다른, 새로운 내용과 스타일의 만화였기 때문이다”며 “외국 만화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고유의 캐릭터나 독특한 사건 구성이 한국 만화의 상상력을 해방시켰다”고 분석했다.

    ‘라이파이 동호회’에서는 앞으로 캐릭터 사업과 애니메이션 작업 등을 통해 ‘라이파이’를 현대에 맞게 되살리는 작업도 염두에 두고 있다. 또한 작가가 국민문화훈장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다.

    ‘라이파이’의 히트 이후 성공가도를 달렸던 작가 김산호씨는 이후 66년 미국으로 건너가 라이파이처럼 전 세계를 누비며 살다 94년 귀국해, ‘대한쥬신제국사’ 등 사극화에 남은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조만간 ‘왜사’와 ‘치우천왕’ 등 역사물을 잇따라 내놓을 예정이다. 김씨는 최근 ‘라이파이’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고 있는 것에 대해 “미국의 슈퍼맨은 아직 살아 있지만 라이파이는 오래 전에 죽었다고 생각했다. 암담했던 시기에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라이파이를 만들었는데 그들이 벌써 50대가 돼 죽은 영웅을 부활시키겠다고 하니 얼마나 즐거운가”라며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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