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1

2003.09.11

김 빠진 독일 맥주회사들

소비량 감소·수동적 경영 탓에 ‘적자 허덕’ … 외국 회사들 시장 공략 본격화 ‘설상가상’

  • 안윤기/ 슈투트가르트 통신원 friedensstifter@hanmail.net

    입력2003-09-03 15:5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김 빠진 독일 맥주회사들

    유명한 뮌헨의 맥주 축제 ‘옥토버 페스트’.

    후텁지근한 날이면 사람들이 특히 많이 찾는 음료가 있다. 바로 맥주다. 그리고 사람들은 맥주 하면 독일 맥주를 최고로 손꼽는다. 그런데 이처럼 역사와 전통, 그리고 권위를 자랑하는 독일 맥주산업이 붕괴하고 있다. 유럽 전체 주조회사의 75%에 달하는 1300여개의 주조회사가 밀집해 있는 독일. 그러나 이들 중 3분의 1 가량은 매년 적자에 신음하며 부동산 수익 등 곁가지 수입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의 원인은 독일 사회가 노령화의 길에 접어들면서 맥주 소비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데 있다.

    통계를 보면 1990년대 초 연 140ℓ이던 1인당 맥주 소비량이 지금은 120ℓ로 줄었다. 그리고 현재의 추세라면 앞으로 10년 후에는 100ℓ 선이 붕괴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 결과 큰 타격을 입은 곳은 당연히 주조업체. 독일 주조업자연합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연간 50만ℓ에서 1억ℓ 정도를 생산해내는 중간 규모 주조업체의 수가 1995년 610개에서 현재 466개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향후 10년 내에 이들 주조업체와 관련한 인수, 합병, 폐업 등이 줄을 이을 것으로 예상된다.

    인수·합병·폐업 줄 이을 듯

    반면 네덜란드의 하이네켄이나 벨기에의 인터브로이 같은 경쟁사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다. 2001년 하이네켄은 연간 8억2000만ℓ의 맥주를 생산하는 브라우홀딩의 소유권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하이네켄측은 “브라우홀딩의 간판주자인 파울아너를 전 세계 시장에 공급하기 위해 계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이면에 독일 시장에서 하이네켄의 비중을 더 높이려는 의도가 도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또 2001년에는 인터브로이가 독일 맥주 중 유일하게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벡스를 인수했다. 이 계약의 명분 역시 벡스의 세계화지만, 벡스를 인수함으로써 인터브로이는 스텔라, 아르트와 등 자사 제품을 독일 시장에 판매할 교두보를 마련했다.

    하이네켄과 인터브로이는 1980년대 내수시장이 위축되는 추세임을 간파하고 일찌감치 수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외국의 크고 작은 기업들을 인수하는 것은 이러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주요 방편이다. 거대 자본을 이용해 수많은 외국 회사들을 인수·합병함으로써, 이들 회사들은 해당 국가 시장에 자연스럽게 진출할 발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명품’이라는 브랜드 이미지까지 갖게 됐다.



    사실 지난 수십년 동안 독일 맥주 시장은 외국 기업들에게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겨졌다. 독일 맥주의 지나치게 낮은 가격과 자국 제품을 선호하는 독일인들의 성향 때문이다. 더욱이 독일 주조업은 오랫동안 ‘맥주 순수법(Bier Reinheitsgesetz)’에 의해 보호받았다. 맥주를 양조하는 데 들어가는 원료를 엄격히 규제하는 이 법은 그간 외국산 맥주가 독일 내에서 맥을 못 추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법은 1987년 유럽재판소에 의해 보호주의 장벽으로 판정받은 후 그 힘을 잃었다.

    그러나 독일 주조회사들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내수시장으로 몸을 웅크렸다. 이들이 내놓은 대안이라는 것은 단지 생산량을 줄이거나 생산의 효율성을 높여서 맥주 가격을 낮춤으로써 수요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해외시장 진출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네덜란드가 생산된 맥주의 절반 이상을 수출하는 데 비해 독일은 생산된 맥주의 11% 정도만을 수출할 뿐이다. 국제무대에서 경쟁을 벌이기에는 독일 맥주회사들의 자본력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연간 10억ℓ를 생산하는 독일 제1의 맥주회사 홀스텐은 지난해에만 110억ℓ의 맥주를 생산한 하이네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김 빠진 독일 맥주회사들

    맥주를 마시는 독일인들.

    독일에서도 연 생산량이 50만ℓ가 채 안 되는 소규모 주조회사들은 그런대로 건실하게 운영되고 있는 편이다. 이들은 올해 전격적으로 시행된 병·캔 보증금제도에 그다지 타격을 받지 않았다. 병이나 캔보다는 주로 전통적인 오크 통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은 연간 1억ℓ 이하의 맥주를 생산하는 중간 규모 업체들이다. 18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연간 100만ℓ의 맥주를 생산해온 중견 주조회사 헤를레는 위기상황을 견디다 못해 기업을 상장하면서 이 회사의 주력상품인 발더브로이 5상자를 주식 배당금으로 내놓았다. 애교 넘치는 이 전략이 그런대로 성공해 헤를레는 단숨에 80만 유로의 수익을 올렸고 그 결과 회사도 살릴 수 있었다.

    또 다른 중간 규모 회사 이저로너 필스너도 이저로너 지역 주민의 정서에 호소하는 전략을 택해 위기를 모면했다. ‘이저로너를 살리자’는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지역 유지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이 회사는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독일 맥주 시장을 탐내는 기업들은 많다. 거대 회사인 사브밀러도 꾸준히 유럽 진출을 꾀하고 있고, 영국의 스코티시 뉴캐슬도 올해 안에 독일에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덴마크의 칼스버그도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독일 시장 점유율을 높여왔다. 세계 제일의 주조회사인 미국의 안호이저 부쉬의 경우에는 유럽 시장 진출에 대해 여전히 소극적이지만, 이 회사 역시 가까운 장래에 독일을 비롯한 유럽 시장 공략에 나설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큰 회사는 점점 더 커지고, 작은 회사는 점점 더 작아진다. 주조업체들 간의 인수·합병, 폐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 볼 때 선택의 폭이 줄어든다는 점에서 반갑기만 한 일은 아니다. ‘몸집을 불리든지, 아니면 망하든지….’ 치열한 국제경쟁 속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몰락해가는 독일 맥주산업이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