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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뻥’ 뚫린 혈액관리

피 구하기 급급 안전은 뒷전

‘헌혈 및 혈액 관리 시스템’ 허술 … 보건당국은 그마저도 대충 지켜 더 큰 문제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피 구하기 급급 안전은 뒷전

피 구하기 급급 안전은 뒷전

채혈된 혈액은 서울 중앙혈액원의 혈액냉장고에 보관된다.

지난해 12월24일 한 군부대의 넓은 방. 수천명의 군인들이 차례로 줄을 서 있다. 모두 ‘헌혈’을 위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다. 군인 A씨(21)는 헌혈 전, 문진서를 받아 들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동성애 경험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뒤에 줄 서 있는 동료들이 자신의 문진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비밀을 숨긴 채 헌혈을 마쳤다.

결국 그의 혈액을 수혈 받은 60대 남성 두 명이 7월19일 에이즈 감염 판정을 받았다. 역학조사 결과, 지난해 음성 판정을 받은 A씨의 혈액은 이미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잠복기여서 양성 반응이 나타나지 않은 것. A씨의 혈액은 경기 이천시 장호원의 ‘혈액분획센터’를 통해 혈액제제를 만드는 제약사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대한적십자사(이하 적십자사)는 감염된 혈액이 사용된 약품을 모두 폐기처분했다고 밝혔지만, A씨의 혈액 이외에도 60여명의 에이즈 양성 반응 유경험자의 혈액이 병원과 제약사에 불법 공급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사태는 우리나라 헌혈 및 혈액관리 시스템의 허술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수술시 필요로 하는 혈액의 양도 늘어났지만, 혈액관리제도는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혈액사업 관련자들의 ‘도덕 불감증’도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에이즈 수혈 감염 예방할 장비조차 부실

에이즈 감염자 관리를 담당하는 국립보건원과 적십자사는 이번 사건을 두고 “현재의 기술로는 수혈로 인한 에이즈 감염을 완벽하게 막는 방도가 없다”며 기술의 한계를 탓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실시하고 있는 ‘항원·항체 효소면역 검사법’으로는 감염 초기인 경우 에이즈 바이러스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비용상의 문제’로 우리나라는 수혈로 인한 에이즈 감염 확률을 줄일 수 있는 장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미국 일본 등 대부분의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은 면역항원 검사보다 정밀한 검사가 가능한 ‘핵산증폭 검사(NAT)’를 채택하고 있을 뿐 아니라, 헌혈 받은 혈액의 일부를 보관해 잠복기에 있더라도 혈액의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추적 검사할 수 있는 ‘혈액검체 보관소’를 보유하고 있다. 또 헌혈 당시 항체 잠복기에 있던 헌혈자의 혈액이 다음번 헌혈시 양성으로 확인될 경우를 대비해 혈장을 2~6개월 동안 보관한다. 국립보건원과 적십자사는 이러한 전문장비와 기술 도입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기술과 장비의 한계를 지적하기에 앞서 혈액관리 시스템의 전면적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우리나라의 혈액사업은 안전한 혈액을 확보하기 위한 헌혈자 선별과 채혈 과정의 체계화가 미흡한 실정이다. 사실 연간 300만명의 혈액을 필요로 하는 우리나라는 상당량의 혈액을 수입해왔으며, 적십자사는 모자란 혈액을 공급받기에 급급했다. 혈액 확보를 위해 군부대나 학교에서 무리하게 집단 채혈을 했고, 집단 채혈 과정에서 개별적 문진이 제대로 실시되지 않아 결국 수혈로 인해 에이즈에 감염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최초 문진만 제대로 이뤄졌다면 수혈 감염 사고는 없었을 것’이란 비판에 대해 적십자사는 “군부대에서 집단 채혈하면서 개별적 문진을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문진과 채혈의 공간을 분리하는 데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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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적십자사는 현재 국가로부터 위탁을 받아 혈액관리를 독점하고 있다.

수혈로 인한 감염을 막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에이즈 감염 우려가 있는 이들에게 헌혈을 자제하도록 홍보하고, 보건소에서 에이즈 감염 여부를 알아보도록 익명검사를 활성화하는 일이다. 사실 실명을 밝히고 에이즈 검사를 받길 두려워하는 이들이 공공연히 헌혈을 통해 검사를 받으려 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적십자사는 뒤늦게 “헌혈을 해도 에이즈 검사 결과는 직접 통보하지 않는다”며 “가까운 보건소에서 에이즈 검사를 받을 것”을 권고하고 있는 실정이다.

안전한 혈액을 확보하기 위해, 점진적인 헌혈시스템의 변화도 필요하다. 특히 군부대 집단 채혈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 실정에서 안전성이 높은 혈액을 확보하기는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 반면 기업체나 지역 집단 헌혈 시스템의 경우 정기검진을 통해 검증된 안전한 혈액을 확보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장기적 안목에서 기업체 및 지역 집단 중심의 계획 헌혈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특히 보건당국의 안전 불감증은 시급히 개선돼야 할 문제로 떠올랐다. 1991년부터 10년간 혈액원에 근무한 마취과 의사 김명희씨는 “혈액사업 관련자들의 도덕 불감증에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특히 혈액관리법으로 규정된 조항이 ‘관행’이라는 이유로 잘 지켜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 혈액관리법 시행령 제12조는 ‘채혈은 의사의 지도하에 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보통 채혈 과정에 의사가 참여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 특히 60여명의 에이즈 양성 반응 유경험자의 혈액이 적절한 절차를 밟지 않고 외부로 유출된 사실은 보건당국의 허술한 혈액관리 행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적십자사 안전관리부 조남선 부장은 “과거 양성 판정을 받은 기록이 전산시스템의 오류로 드러나지 않았거나, 입력과정에서 직원이 실수를 한 것 같다”는 석연치 않은 해명을 했다. 보건법 규정상 ‘혈액의 유통·판매·사용’을 철저히 감시해야 할 국립보건원측은 “혈액관리는 대한적십자사의 몫”이라며 “혈액관리·유통을 일일이 감독할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라고 털어놓았다.

피 구하기 급급 안전은 뒷전
수혈 의학과 혈액관리를 담당하는 전문인력을 확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수혈이나 수혈 혈액 관리는 어느 의료행위보다 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어 수준 높은 전문의료인력이 필요하다는 것. 현재 수혈의학 전담 전공학자는 30여명을 넘지 못하는 실정이며, 혈액원을 운영하는 사람은 의료 전문가들보다 행정직 출신이 주를 이루고 있다. 결국 ‘의료적 행위’에 대한 개념도 없이 비전문가들이 운영해온 혈액관리 시스템이 그 한계를 드러낸 셈이다.

혈액사업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적십자사의 혈액사업 독과점 체제를 ‘자율경쟁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적십자사가 독점적으로 혈액관리 사업을 운영하다 보니 ‘헌혈자에 대한 서비스의 질’이나 ‘연구·투자’에 인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명희씨는 “캐나다의 경우 적십자사의 혈액사업이 그 폐해를 드러내자 혈액사업이 민간으로 이양됐으며, 미국도 혈액사업의 50%는 민간에서 담당하고 있다”며 자율경쟁 체제의 도입을 강조했다. 다만 자율경쟁 체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혈액사업을 담당하는 민간단체에게 치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철저한 감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우리나라처럼 적십자사가 독점적으로 혈액사업을 담당하는 일본의 경우, 국가로부터 충분한 예산지원과 세밀한 관리감독을 받고 있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 변호사는 이번 사태를 바라보며 “에이즈 감염 우려 혈액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것은 보건당국의 안전 불감증이 빚어낸 총체적 직무유기 탓”이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허술한 제도도 문제지만 그 제도마저 지키지 않는 보건당국의 무책임함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혈액사업은 단순히 혈액을 확보하고 공급하는 사업이 아니다. 혈액을 어떻게 안전하게 관리하고 사용할 것인지 고민해야 하는 중요한 의료행위다. 이번 파동으로 보건당국은 기존의 혈액사업을 전면적으로 개혁해야 할 분기점에 서 있다.



주간동아 401호 (p82~84)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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