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6

2003.05.29

첨단기술 ‘PACS’ 法 때문에 죽을판

식약청 현실 외면한 확대 법 적용 … 업체들 업무정지 등 제재 ‘문 닫을 처지’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3-05-22 1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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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단기술 ‘PACS’ 法 때문에 죽을판

    국내 유수 대학병원에 설치된 팩스 시스템. ‘꿈의 소프트웨어’란 평을 듣지만 정부의 형사고발로 업체는 고사 위기에 처했다.

    ‘법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사회 구성원의 보편적 정서와 법이 배치될 때 흔히 쓰이는 말이다. 남의 일에 대해서 말할 때는 “법이 뭐 다 그렇지” 하고 그냥 넘기지만 자신이 당하면 그만큼 억울할 때도 없다. 악법도 법이라 지키긴 지켜야 하는데 그러자면 이해 당사자의 존립이 위태로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첨단기술을 보유하고도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법과 행정 관행 때문에 고사(枯死) 위기에 처한 국내 팩스(PACS·의료용 영상처리장치) 제조업체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보건복지부 산하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은 4월21일 국내 팩스 업체 세 곳에 대해 약사법 위반 혐의로 6개월간의 제조업무 정치처분을 내리고, 3개 업체에 대해서는 50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에 앞서 2월에는 이들 6개 업체를 의료용구 무허가 판매 혐의로 형사고발해 현재 경찰에서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 팩스 업체 관계자들은 “6개월간의 영업정지는 문을 닫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설사 행정소송에서 이긴다 해도 법과 행정 마인드가 바뀌지 않는 한 또 고발당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사업을 해나가기 힘들다”고 말했다.

    당장 문을 닫게 생긴 업체들이야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겠지만 팩스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일반인들은 큰 관심이 있을 리 없다. 도대체 팩스는 무엇이고, 식약청이 이들 업체를 처벌한 이유는 뭘까.

    팩스 사용하는 HW까지 허가받아라?



    팩스란 병원에서 환자가 각종 영상촬영장치(X-ray, CT, MRI)로 찍은 의료영상들을 병원 내부의 컴퓨터와 모니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볼 수 있도록 디지털화하는 소프트웨어. 컴퓨터 하드웨어나 서버 상에서 영상의 저장은 물론 가공도 가능해 팩스를 설치한 병원은 더 이상 필름을 현상하거나 따로 보관할 필요가 없다. 환자나 의료진이 현상한 필름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 환자의 진료, 검진, 대기시간이 단축되는 것은 물론이고 전량 수입에 의존해오던 필름 값과 현상 비용을 줄일 수 있어 병원의 수지개선에도 도움이 된다. 더욱이 그동안 병원 환경 오염의 주범으로 꼽혔던 필름 현상액(독극물)이 사라져 환경보호에도 일조한다. 의료계에서 팩스 시스템을 ‘꿈의 소프트웨어’라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뒤늦게 팩스 시장에 뛰어든 국내 업체들은 10년 만에 팩스의 본고장인 미국 일본 유럽 등의 대학병원에 이를 수출할 만큼 성장했다. 기술력에 있어 세계 최고 수준을 인정받은 것. 1994년 삼성서울병원에 처음 설치된 국내 업체의 팩스시스템은 이후 서울대병원 등 전국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에 설치됐고, 이 덕분에 한국 병원의 팩스 보급률은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팩스산업의 국내시장 규모만 2000억원대. 정부는 팩스를 의료정보화의 2대 역점 사업의 하나로 키워왔다. 이번에 고발된 6개 업체는 국내 총 12개 업체 중 팩스 시장의 95%를 점유하고 있는 대표기업들이다.

    식약청이 이들 업체에 대해 행정처분을 내린 이유는 의료용구로 지정된 팩스시스템을 품목허가를 받지 않고 각 병원에 판매 및 설치를 했다는 것. 현행 약사법(26조1항)은 의료용구를 제작 판매하려면 먼저 의료용구 제조업 허가를 받은 후 품목별로 다시 허가를 받거나 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팩스는 1998년 4월 식약청장 고시에 의해 의료용구로 지정됨으로써 의료용구 관련법의 적용을 받는다. 식약청의 주장대로라면 이들 병원은 모두 환자들을 상대로 무허가 진료를 해온 셈이다.

    첨단기술 ‘PACS’ 法 때문에 죽을판

    병원에 팩스 시스템이 설치되면 환자들이 엑스레이 필름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팩스 시스템을 설치하면 MRI로 찍은 의료 영상들을 병원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위부터)

    문제는 이 식약청 고시에서 출발한다. 식약청 고시는 의료용 영상처리장치를 ‘의료용 영상을 처리하는(저장, 분석, 확대, 축소 등) 장치’로 정의하고 ‘이와 같은 기능을 갖는 전송장치 및 출력장치도 이에 포함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팩스시스템을 의료영상을 디지털화해 각 주변기기에 전송하는 소프트웨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해당 소프트웨어를 포함해 이를 저장하거나 연결, 출력하는 모든 주변장치로 확대 정의한 것. 팩스 소프트웨어가 깔린 컴퓨터와 이와 연결된 서버, 모니터, 프린터 등을 모두 하나의 의료용구로 지정한 셈이다.

    업체들로서는 자신들이 만들지 않은 기계나 장치에 대해서도 품목허가를 받으라는 식약청의 고시가 이해될 리 없다. 팩스 생산업체 A사의 김모 이사는 “이는 기업의 홈페이지나 내부 인트라넷의 통신망을 깔아준 소프트웨어 업체에게 기업 전체의 전산시스템과 컴퓨터 성능에 대해서 책임지라는 소리와 같은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더욱이 같은 팩스 소프트웨어를 적용한다 해도 병원마다 컴퓨터 등 주변기기의 종류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이들 업체는 병원에 이를 설치할 때마다 품목허가를 따로 받아야 하는 상황. 완전히 본말이 전도된 셈이다.

    사실 이들 업체는 이미 2년 전인 2001년 5월에도 식약청에 의해 고발당한 적이 있다. 의료용구 제조업 허가 없이 의료용구를 판매했다는 혐의. 하지만 당시 업체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팩스 시스템이 의료용구로 지정된 사실조차 몰랐다. 업체와 식약청 간의 시비는 검찰이 기소유예처분을 내림으로써 일단락됐다. 사실상 업체측의 손을 들어준 검찰이 당시 기소유예처분을 내린 근거 중 하나는 ‘피의자들이 개발, 판매한 의료용 영상처리장치는 일종의 소프트웨어로서 그 제품이 의료용구인지, 제조 허가 대상인지 여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는 것. 또 고발 당시 국내 팩스 제조업체 중 의료용구 제조업 허가를 취득한 업체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도 정상 참작의 요인이 됐다. 결국 검찰도 팩스의 의료용구 지정 내용과 그 과정에 문제가 있음을 일부 인정한 셈이다. 그런데 식약청은 검찰의 기소유예 결정 이후 2년이 지난 시점(2003년 2월)에 이들 업체를 같은 혐의로 다시 형사고발했다. 당시에 포함되지 않은 무허가 팩스 공급 병원이 지금에서야 적발됐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들 업체가 구조적으로 불법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식약청이 고시한 의료용구의 개념(하드웨어 포함)을 적용하면 약사법이 규정한 품목허가 절차를 제대로 밟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 약사법은 품목허가 이후에 반드시 의료용구를 판매 및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팩스 시스템의 경우 품목허가 이전에 판매 및 설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 즉 일반적인 의료용구의 경우에는 시험검사쭭식약청에 의한 품목허가쭭판매쭭사용의 순으로 과정이 진행되지만 팩스의 경우에는 설치(판매)계약쭭병원에 팩스 설치쭭시험검사쭭품목허가쭭사용의 순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 팩스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그것과 연결된 하드웨어의 기능까지 모두 시험검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다.

    2년 전 고발 땐 검찰이 업체 손 들어

    팩스업체 B사의 이모 이사는 “수십억원이 들어가는 팩스를 설치해놓고 시험검사까지 마친 상태에서 식약청의 품목허가가 날 때까지(적어도 한 달 이상) 사용하지 말라면 어느 병원이 그 말을 듣겠냐”며 “예전처럼 필름을 사서 쓰려면 비용도 비용이지만 당장 환자들에게 고통이 전가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들 업체를 고발한 식약청은 업체들의 사정이야 어떻든 법은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식약청 의약품관리과의 한 담당자는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의 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의료용구 관련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식약청 의료기기과의 한 관계자는 “팩스 시스템에 하드웨어를 포함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컴퓨터 모니터 등 주변기기가 의료 영상의 화질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이는 환자의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대한팩스학회 임재훈 회장(삼성서울병원 영상의학과 교수)은 “하드웨어가 일부 영향을 끼칠 수는 있지만 영상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팩스의 소프트웨어”라며 “하드웨어가 나빠 화질이 잘못된 경우는 병원과 하드웨어를 공급한 업체가 책임질 문제”라고 밝혔다. 그는 또 “외국의 사례를 비교 연구해 세계 최고 수준의 국내 팩스 기술력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 미국의 경우 팩스업체는 팩스 소프트웨어의 기능이 하드웨어와 어떻게 어울려 작동하는가에 관한 자료만 제출하면 신고 절차가 완료되고, 일본과 유럽은 팩스를 의료용구가 아닌 일종의 사무 자동화 장치로 정의하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 김홍신 의원(한나라당)은 “팩스의 소프트웨어만을 의료용구로 지정하면 허가 대상이 아닌 신고 대상이 되어 여러 모순점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며 “식약청이 고시를 바꿀 의향이 없다면 국회 차원에서 법개정이나 시행규칙 개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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