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6

2003.05.29

“얘들아, 10대 문화가 잠잤었니?”

“귀여니 신드롬이 10대 문화 왜곡” 항변 … 논객·기획자·사이트 운영자 등 10대 맹활약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3-05-22 10: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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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얘들아, 10대 문화가 잠잤었니?”

    ‘귀여니 신드롬’이 일면서 10대 문화 생산자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준행군, 임선민양, 귀여니 이윤세양, 한예진양,김진혁군(왼쪽부터).

    ”‘귀여니’가 10대 문화를 대표한다고요? 말도 안 돼요.”

    ‘10대 독립’을 외치는 커뮤니티 포털사이트 아이두(www.idoo.net)의 ‘따지고 싶어’방에서는 요즘 ‘귀여니 현상’에 대한 비판이 한창이다.

    ‘귀여니’는 인터넷 소설 ‘그놈은 멋있었다’를 쓴 이윤세양(19)의 필명. 의도적으로 맞춤법을 파괴한 ‘외계어’와 이모티콘으로 뒤덮인 그의 소설은 10대들의 폭발적 호응을 얻으며 20만권이나 팔려나갔고, ‘귀여니’는 올 봄 10대 문화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됐다.

    그러나 이 같은 ‘귀여니 신드롬’에 대해 상당수 10대들은 “언론과 기성 사회가 만들어낸 거품일 뿐”이라고 평가한다. 온라인 소설 마니아인 김형수군(18)은 “이미 3~4년 전부터 인터넷에는 수만건의 조회수를 자랑하는 10대 ‘스타 작가’들이 있었고, 그들의 작품은 자체 제본을 통해 수천부씩 팔려나갔다. ‘귀여니’의 새로운 점은 오프라인 출판사의 눈에 띄어 세상에 드러났고 그것을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홍보했다는 것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10대들 사이에서는 ‘그놈은 멋있었다’류의 소설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문화가 만들어지고 공유되고 있다. ‘귀여니’라는 코드만으로 10대 전체를 이해하려는 것은 결국 10대 문화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귀여니 신드롬’ 이전에도 청소년들은 자신들만의 문화 생산 창구를 갖고 있었고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그것을 소비해왔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10대들 사이에서 ‘귀여니’ 못지않게 주목받으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청소년들은 누구일까.



    fresh라는 아이디로 활동하는 10대 논객 김진혁군(17)은 그러한 10대 가운데 한 명이다. 김군은 직설적이고 분명한 어조로 각종 사이트에 자신의 의견을 기고하고 토론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자신들만의 문화 생산 소비

    지난해 11월 수능시험 성적을 비관한 고교생이 목숨을 끊었을 때 그는 한 신문에 “‘대학’이라는 미명 아래 죽어간 수많은 목숨, 그 직접적 살인자는 학교도 아니요 그 자신도 아니요, 바로 망국적 학벌독재 체제와 폭력적인 수능시험 제도,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고 부추긴 모든 언론과 기득권자들이다”라는 ‘과격한’ 글을 싣기도 했다.

    그가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현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기 때문. 그리고 자신의 의견이 다른 이들과의 토론을 통해 여론을 만들어내고 결국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김군은 “사회문제에 대해 글을 쓰는 10대 논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지만, 일단 누군가 글을 쓰면 바로 수백건씩 댓글이 달릴 만큼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이 많다. 사회문제를 고민하고 비판적인 글을 쓸 수 있을 만큼의 여유만 있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이들이 많을 것이라는 증거”라고 말했다.

    “얘들아, 10대 문화가 잠잤었니?”

    10대들의 소망을 담은 인권나무(왼쪽).부산청소년축제기획단 ‘반’의 거리행진.

    부산 양운고 2학년 한예진양(18)은 부산청소년축제기획단 ‘반(反·半·班)’에서 활동하며 2001년부터 매년 한 번씩 부산에서 열리는 10대들의 축제를 준비하는 이 지역의 재주꾼이다. 축제의 주제를 결정하는 것부터 장소 준비, 참가자 섭외, 무대 설치, 홍보는 물론 각종 ‘노가다’까지 모두 자신의 손으로 해낸다. ‘반’ 축제의 슬로건은 ‘느낌·열정·행동=반’.

    “‘어른들이 정해준 주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말하는 축제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모였어요. 중·고생 합쳐 모두 15명이 활동하고 있는데 9월에 이틀간 열릴 축제를 위해 꼬박 6개월째 준비하고 있죠. 지난해에는 유명 연예인이 나온 것도 아닌데 수천명의 10대들이 축제에 참가해서 무척 기뻤어요.”

    2002년 이들이 준비했던 축제의 주제는 동성애, 올해는 바람직한 음주문화에 대해 기획중이다. ‘어른들 눈에는 이상하게 비칠지 모르겠지만’ 지금 또래들에게는 가장 관심 있는 주제라는 이유에서다.

    대학입시가 코앞에 닥친 고등학교 2학년생 한양이 ‘반’ 활동을 하는 이유는 지금 느끼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젊음을 마음껏 누리고 싶기 때문.

    한양은 지난 축제 때 수많은 10대들이 모여 함께 부산 서면 거리를 행진하고, 청소년 대통령선거장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토해내며 해방감을 느꼈던 기억이 그를 다시 ‘반’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전주 성신여고 3학년 임선민양(19)은 bonny라는 아이디로 더 잘 알려진 스타 CJ(사이버 자키)다. 그는 매주 토·일요일 밤마다 2시간씩 샤우트 캐스트(shout cast) 1인 방송을 한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계속해온 방송의 매력에 대해 그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교감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방송을 통해 같은 10대들과 입시문제나 학교생활의 어려움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입시 현실 활동공간 너무 작아

    “10대가 하는 인터넷 방송 수준은 안 들어봐도 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저는 이 방송을 위해 일주일 내내 준비해요. 생활일본어 강좌도 하고 사연을 올린 이들에게는 타로점을 봐주기도 하고요. 이제는 제게 고민을 털어놓는 고정 청취자들이 꽤 많이 생겼죠. 가끔은 30, 40대 어른들이 ‘좋은 이야기를 듣고 간다’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임양은 “대학 간 후에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10대들끼리 지금의 생각을 나누는 것도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유명한 사이버 자키들은 영화 ‘볼륨을 높여라’의 주인공처럼 라디오 방송 DJ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는, 10대들 사이의 인기스타”라고 말했다.

    ‘10대의, 10대에 의한, 10대를 위한’ 인터넷 포털사이트 아이두를 운영하는 이준행군(18)은 10대 사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청소년 중 하나다. 한때 하루 접속자 수가 2만명을 넘었던 이 사이트는 그가 1999년 반 친구들과 용돈을 모아 직접 만든 것. 10대들이 만든 공간에서, 10대들이 직접, 10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000년 여름 그가 아이두를 통해 중·고교 ‘두발 제한’ 조치에 반대하는 온라인 서명운동을 전개했을 때는 전국에서 16만명의 중·고생들이 서명에 참여했을 만큼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지금도 아이두는 10대들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대화의 장이다. ‘귀여니 신드롬’처럼 10대들을 둘러싼 사회현상이 생길 때면 이곳에 모여 의견을 공유하고, 청소년의회 설치 문제 등에 대해서는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아이두의 기획뿐 아니라 디자인, 프로그래밍에 전체적 관리까지 맡아 하고 있는 이군의 꿈은 50년 후, 아니 영원히 이 공간이 유지돼 10대들의 솔직한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것이다.

    10대 문화 생산자들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10대들의 공간이 말할 수 없이 부족하다는 데 대부분 동의한다. 1998년 당시 이해찬 교육부 장관이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에 갈 수 있게 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전국의 학교는 다양한 청소년들의 목소리로 들썩였었다. 10대가 대표를 맡은 벤처회사들이 생겨났고, 청소년 인권운동 단체들도 조직됐다. 하지만 2001년 수능 난이도가 갑자기 높아지면서 이 모든 것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청소년 벤처들은 문을 닫았고, 일어섰던 학생들은 조용히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대치동의 부동산 값이 급등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학원에 다니고, 공부를 해야만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시대로 너무나 빨리 변해버린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오늘 한국에 10대 문화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사회를 뒤흔든 ‘귀여니’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10대 문화를 만들어가는 또 다른 10대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조용하지만 점차 커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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