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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필승! 스포츠는 코리아

커져라 세져라! ‘스포츠 코리아’

세계 각국 프로 스포츠 무대 한국선수들 맹활약 … 국가 이미지 제고 브랜드 전략 육성 시급

  •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커져라 세져라! ‘스포츠 코리아’

커져라 세져라! ‘스포츠  코리아’
미국 시애틀에서 기자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폴 다나카씨는 일본계 미국인 3세였다. 시애틀이 위치한 워싱턴주 킹 카운티 공무원인 다나카씨는 그러나 ‘할아버지의 나라’ 일본은 물론 아시아 국가라고는 한 번도 방문해본 적이 없다. 전형적인 일본인처럼 보이는 그가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한다는 사실이 전혀 의아스럽지 않을 정도로 미국에서 나고 자란 그의 사고방식은 철저히 미국적이다. 저녁식사 중 그가 화제에 올린 여행지 역시 아시아 국가가 아니라 알래스카의 페어뱅크 같은, 가장 ‘미국적인’ 동네였다. 그런데도 다나카씨가 이곳 시애틀에서 할아버지의 나라 덕을 보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메이저리그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활약하고 있는 스즈키 이치로 이야기가 나올 때다. 그때마다 다나카씨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일본에 대한 주변의 질문 공세에 시달린다. 스즈키 이치로는 1994년부터 7년 연속 일본 퍼시픽리그 타격왕을 차지했던 초특급 타자. 미국 진출 첫해 아메리칸리그 신인왕과 최우수선수(MVP)를 동시에 차지하면서 메이저리그의 영웅으로 떠오른 선수다.

그러나 다나카씨 부부와 그의 동료들까지 포함해 5명이 함께한 저녁식사 내내 한국이 화제에 오를 만한 일은 북핵 문제밖에는 없었다. 북핵 문제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그들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초대받은 기자에 대한 호의를 대신했다. ‘시애틀의 영웅’ 스즈키 이치로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할 때와는 정반대의 표정. 기자 역시 텍사스의 박찬호나 시카고의 최희섭 이야기를 슬쩍 꺼내보았지만 독일계와 동유럽계 미국인인 이날 손님들은 대부분 표정 변화가 없었다.

골프·축구·야구 등 단군 이래 최고 성적 올려

스즈키 이치로만을 안주 삼아 와인잔을 비우던 다나카씨 일행과의 저녁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가 미안한 듯 물었다. “한국에도 있지 않습니까? 왜, 그 LPGA에서 여러 번 우승한…, 이름이 뭐더라?” 순간 기자는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아, 그래. 우리도 있다. 세리 팩(Seri Pak)!’ 그제서야 화제는 가까스로 한국 여자 골프로 넘어갔다. 기자를 한순간에 수렁에서 구해준 박세리는 여전히 미국에서 박찬호나 최희섭보다도, 김병현(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이나 봉중근(보스턴 레드삭스)보다도 단번에 ‘먹혀드는’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였다. 미국의 유명 체육 전문 주간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는 최근호에서 미국 스포츠계에 영향력이 큰 소수민족 출신 인사 101명을 선정했다. 한국인으로는 박세리가 유일하게 뽑혔다. 그러나 순위는 93번째. 태국계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이 조사에서 랭킹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순위를 떠나 이 랭킹에 한국선수가 오른 것 자체가 처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 프로 스포츠는 세계무대에 이제 겨우 본격적으로 명함을 내밀기 시작했을 뿐이다.

최근 들어 미국 LPGA 여전사들의 활약은 실로 눈부시다. 아예 ‘LPGA를 한국낭자들이 점령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 4월말 박세리가 LPGA투어 칙필A채리티챔피언십에서 입문 6년 만에 20승 고지를 밟은 것을 비롯해 김미현 박지은 한희원 등이 맹활약중이고, 아마추어 골프에서도 13세 소녀 미셸 위가 신데렐라로 떠오르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미국 시청자들의 탄성을 자아내고 있다. 골프뿐만 아니라 프로 스포츠에서 한국선수들이 이 정도로 세계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것은 그야말로 단군 이래 처음이다. 프로 스포츠의 인기에 기댄 ‘코리아 브랜드’는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독일 같은 유럽이나, 일본 터키 같은 아시아권 국가에서도 연일 상한가를 기록하고 있다.



커져라 세져라! ‘스포츠  코리아’
골프를 제외하면 최근 해외에서 이러한 코리아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종목은 단연 축구다. 월드컵 이후 국내 축구 열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리자 정작 월드컵을 통해 건진 것은 이들 해외 진출 선수들뿐이라는 소리도 나온다. 1979년생 동갑내기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유럽무대에 진출한 설기현(벨기에 안더레흐트)과 송종국(네덜란드 페예노르트). 이중 설기현은 이미 최근 프리미어리그 진출설이 나돌 정도로 유럽에서 인지도가 높아졌고, 최근 부상에서 복귀한 송종국 역시 페예노르트의 우측 날개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이영표(아인트호벤)는 붙박이 주전자리를 꿰찼고, 박지성(아

인트호벤)도 부상이 회복되는 대로 주전자리 확보에 나설 태세다. 한편 터키 트라브존스포르로 이적한 이을용은 현지 적응에 실패해 한때 고단한 세월을 보냈지만 최근 90분 풀타임 출장을 계속하면서 어느 정도 터키축구에 적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최근에는 한국 여자농구의 간판 정선민이 미 여자프로농구(WNBA)에 진출해 이 분야 진출 1호를 기록하기도 했다.

골프 축구 야구 농구를 막론하고 프로 스포츠 분야에서의 한국선수들의 잇따른 활약은 자연스레 세계 각지에서 한국, 그리고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를 높이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하고 있다. 역대 어느 정부나 어느 기업도 못 해낸 일을 이들 선수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 한인경제인협회 김영주 회장(64)은 지난해부터 네덜란드 신문과 방송의 인터뷰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네덜란드에 터를 잡은 한국기업인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도 언론에 얼굴 한번 변변히 내밀 기회가 없었던 김회장이 언론의 취재 공세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된 것은 지난해부터 하나 둘씩 네덜란드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태극전사들 덕분이다.

“인터뷰요? 예전 같으면 꿈도 꾸기 어려웠죠. 몇 년 전만 해도 네덜란드인의 대부분이 한국을 전혀 몰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축구선수 한 명의 힘이 삼성 LG보다도 더 크더라고요. 삼성이 어느 나라 회사인지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송종국과 박지성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들 선수들의 활약 덕택에 한국인 사업가들도 덩달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게 됐습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최영삼씨(52)는 최근 들어 거래처와의 협상이 한결 수월해졌다고 전한다. 처음 만나는 사업 파트너와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화젯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최씨는 파트너와의 협상을 시작하기에 앞서 늘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에서 뛰고 있는 최희섭 얘기를 꺼낸다. 최희섭과 컵스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서먹하던 분위기가 풀린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사업 파트너를 만나 출신 지역이나 학교를 먼저 확인하지만 미국에서는 사업상 파트너를 만날 때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좋아하는 운동이나 취미활동을 화제로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 이런 공통의 화제를 ‘아이스 브레이커(ice breaker)’라고 한다. 한국선수가 활약하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건 이들 선수들이 아이스 브레이커 역할을 떠맡고 있는 셈이다.

“물론 최희섭이 내셔널리그 신인왕이 됐다고 해서 성사되지 않을 계약이 맺어지는 건 아니죠. 하지만 대화상대와 공유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는 것은 친분관계를 맺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박찬호가 LA와 텍사스에선 유명할지 몰라도 시카고에선 널리 알려져 있지 않거든요. 올 시즌 초반부터 지역신문이 최희섭을 대서특필하면서 ‘한국=최희섭’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습니다.” 최근 최씨를 ‘미스터 초이’가 아닌 ‘미스터 최’로 부르는 사람도 늘어났다고 한다. 시카고 컵스 팬들을 중심으로 최희섭 이름 바르게 부르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초이’였던 그의 성도 ‘최’로 올바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최씨는 “미국 생활 20년 만에 잃어버렸던 성(姓)을 되찾았다”고 껄껄 웃었다.

월드컵 이후 ‘한국붐’이 불고 있는 터키에 진출한 이을용 선수의 후원회장을 맡고 있는 김상진씨 역시 “교민들이 터키에서 사업 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고 말한다. 한국기업들이 수억원을 들여 터키 프로축구팀 유니폼에 광고를 하고 있지만 이을용 선수만큼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

그러나 정작 역사상 유례 없는 한국선수들의 선전을 어떻게 하면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브랜드 전략으로 연결할 것인가를 놓고는 기업도, 정부도 아직 뚜렷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말 박세리와의 계약을 성사시킨 뒤 최근 박세리가 통산 20승을 기록하면서 ‘박세리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CJ의 경우만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주변에서는 박세리의 브랜드 효과를 톡톡히 봤다고 부러워하지만 정작 CJ는 ‘이제서야’ 사내 리서치센터를 통해 박세리가 CJ의 브랜드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CJ 스포츠마케팅팀 관계자는 “미국보다는 유럽이나 동남아 수출 비중이 높은 회사 특성상 최근 미국시장 공략을 겨냥해 새로 내놓은 ‘시제이 고메(CJ Gourmet)’ 브랜드를 박세리 효과와 연계하는 방안에 우선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시장을 파고들기 시작한 ‘시제이 고메’ 역시 주로 햇반이나 김치 같은 식료품 브랜드여서 ‘박세리 효과’와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계할 것인지를 놓고 CJ측이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형편이다.

정부 쪽도 최근 프로 스포츠 분야에서 ‘단군 이래 최고 성적’을 내면서 거세게 불고 있는 코리아 열풍을 국가 이미지 제고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 자연스레 조성된 이런 기회를 활용해 정부와 기업이 머리를 맞대고 수출 증대에 도움이 될 만한 구체적 아이디어를 짜내려 노력한 흔적 역시 어디에서도 발견하기 어렵다. 물론 프로 스포츠의 성격상 정부가 나서서 선수들이나 구단에 구체적인 주문을 내놓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와 기업들이 히딩크 감독을 앞세워 한국에서 돈 벌 궁리를 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국정홍보처는 “해외 진출 스포츠 선수 관련 업무는 문화관광부 소관이라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는 입장.

그러나 전문가들은 어렵게 조성된 기회를 활용해 이들 선수들을 국가 이미지 홍보대사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국가이미지 홍보 전략’을 연구해온 서강대 신호창 교수는 “이제는 선수 한 명 한 명이 외교관이나 다름없는 만큼 이들 선수들이 해당 지역 사회에 대한 적극적 기부활동 등으로 지역경제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사회에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남미나 유럽 출신 선수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는 것. 최희섭 선수가 활동하고 있는 시카고의 한국방송 이광택 기자는 “마쓰이 히데키가 뛰고 있는 뉴욕 양키스 홈구장에서는 일본의 스시가 야구장에서 팔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카고에선 아직 그런 얘기가 없다. 한국 정부 차원에서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데 최희섭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주로 프로선수들인 이들을 아마추어 국가대표선수들만큼 정부가 나서서 관리할 도리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정부가 이들의 활동이 국가 이미지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자부심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신호창 교수는 “시즌이 끝난 뒤 대통령이 이들 선수들을 불러들여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 하나 하나가 국가 브랜드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주면서 격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는 스스로 “모국이나 다름없다”고 공언하는 태국 출신 어머니의 권고를 받아들여 마지막 라운드에서는 항상 붉은색 티셔츠를 입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즈를 상징하는 로고에도 태국의 상징색인 붉은색이 꼭 들어가 있다. 또 타이거 우즈는 태국 정부가 개최하는 방콕 패션쇼 등에 초청받아 ‘어머니의 나라’에 톡톡히 보답하기도 했다. 타이거 우즈는 외환위기를 겪고 사스(SARS·급성중증호흡기증후군)의 불똥까지 튄 태국에게 국가 브랜드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단군 이래 최고 상한가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 프로 스포츠 선수들도 조국을 위해 무언가를 할 기회를 찾고 있을지 모른다. 최희섭은 국가대표로 불러주기만 한다면 “몸이 부서져라 뛰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세계 무대로 나간 선수들을 국가대표로 불러들이는 데만 만족하고 있을 것인지를 캐묻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그보다는 그들이 실제로 뛰고 던지고 있는 현지에서 최대한 주가를 높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급선무라는 지적이다. ‘메이드 인 코리아’ 브랜드는 우리가 옆에 꿰차고 있을 때보다는 해외에서 경쟁할 때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주간동아 384호 (p10~13)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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