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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 시장’ 뜬다, 깊어가는 불황의 늪

전국 도매업자들 재고 판매 안간힘 … 5월초 전국 40여개 창고 개방 행사 열려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땡 시장’ 뜬다, 깊어가는 불황의 늪

‘땡 시장’ 뜬다, 깊어가는 불황의 늪

4월30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의 한 특판행사장 모습. 최근 이 같은 특수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의류업체와 소비자들의 발걸음이 늘어나고 있다.

올 상반기 최고 대목으로 꼽힌 5월 첫째 주 징검다리 황금연휴 직전인 4월29일. 세칭 ‘특판회사’로 불리는 D사의 이현동 사장(44)은 서울 장충체육관에 판을 벌였지만 불안한 마음에 연신 줄담배만 피워댔다. 가장 중요한 특판 개시날인 이날 속절없이 봄비가 내린 것. 이번 행사에 1억원 이상을 투자했다는 그는 작년보다 손님이 확연히 줄어든 것을 보며 “도박하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고 씁쓸해했다.

장충체육관을 행사장소로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이사장이 기울인 노력 덕분이었다. 5월 첫째 주 체육행사가 갑작스레 취소됐다는 사실이 ‘마당발’ 이사장의 레이더에 포착됐다. 행사장은 대중들에게 신뢰를 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접근성 또한 좋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장충체육관은 최적의 장소 중 하나로 꼽힌다. 그래서 이사장은 이번 황금연휴에 거는 한 가닥 희망을 숨기지 않았다. “이제껏 5월과 12월에 벌어 1년을 버텼다니까요.”

이틀 뒤인 5월1일 근로자의 날. 화창한 날씨에 기다리던 ‘대박’이 터졌다. 이사장의 행사장뿐이 아니었다. 이날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전시장과 남산 H호텔 등 전국 곳곳의 특판행사장은 ‘땡처리’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업체들은 이날 평균 5억원의 매출액을 올렸다.

일반 매장 매출 부진에 허덕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한때 알뜰 구매자의 눈길을 끌며 호경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불경기가 우리에겐 호황’이라는 업계 통설이 무색할 정도로 최근 들어 특판업계는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하루 매출이 1억원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속출하면서 특판업체의 절반 가량이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5월1일 대박이 터지자 업체 관계자들은 “땡처리 시장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진짜 ‘불황’이 시작된 모양”이라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백화점을 비롯한 다른 일반 매장들은 작년 11월 이후 심각한 매출 부진에 허덕이고 있다.



특판행사장에 사람이 모이는 이유는 파격적인 가격할인 때문이다. 거품이 많기로 유명한 남성정장은 손님을 끄는 미끼상품. 한 업자는 “이번에는 2만9900원짜리 정장을 내놓았지만 더 싸게 팔 용의도 있다”고 자신했다.

30만원 가격표를 단 남성정장이 ‘눈물의 고별전’에서 3만원에 팔릴 수 있는 것은 시장을 돌고 돈 ‘재고품’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대량 생산된 원가 7만원짜리 정장이 진열대를 전전하다 결국은 물류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할인점’과 ‘아울렛 매장’을 거쳐 이곳 ‘땡처리’ 시장으로 밀려오는 것. 그 기간은 1년에서 5년까지 다양한 편이다. 업자는 인건비와 물류비용만 신경 쓰면 되기 때문에 3만원이 아니라 1000원짜리 몇 장에도 옷을 넘길 여지가 생기는 셈이다.

특판업체의 홍보전략은 고전적인 방식을 고수한다. “신문에 끼어넣는 전단지와 주택가를 뒤덮는 벽보로 서민들의 눈길을 단번에 휘어잡아야죠.” 이사장의 말이다. 광고는 유치하고 자극적이되 ‘정품이다’라는 점을 강하게 어필하는 게 비법이다.

이와 함께 선착순으로 주어지는 사은품은 결정적 한 방. 이사장은 이번엔 6개들이 컵라면 1000박스를 준비했다. 원가는 2000원. 경쟁업체가 축구공을 준비했다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다행히도 공짜라면을 노리고 수백명의 알뜰주부가 행사 시작 1시간 전인 오전 8시부터 기다리는 정성을 보였다.

행사장 내부는 3000원짜리 정품 의류에서부터 유명 스포츠 브랜드 재고 물건까지 백화점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화려한 진용을 갖췄다. 최근 땡처리 시장의 감초 격인 월드컵 휘장업체인 코오롱 TNS 제품도 자리잡았다.

하지만 좋은 물건을 구하기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매장을 찾은 주부 최모씨(41)는 남편의 여름양복을 구입하기 위해 성수동에서 장충동까지 발품을 팔았다. 그러나 싼 가격에 좋은 여름양복을 구입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은 금세 깨졌다. 춘하양복보다는 추동양복이 훨씬 많았던 것. 게다가 유명 브랜드의 믿을 만한 상품도 찾기 힘들었다. 그는 “떨이 물건은 품질을 믿기 어렵고, 쓸 만한 옷은 10만원을 훌쩍 넘으니 차라리 할인매장이 낫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런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지만 상인들은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남성정장을 판매하는 한 상인은 “유명 브랜드가 생산한 120수 이상의 양복은 백화점 행사장이나 할인점에서 대개 소진되게 마련이고 이곳에 나오는 상품들은 중국산 중저가 상품이 대부분”이라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가격이 주는 매력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가격이 계속 낮아져 결국에 100원까지 내려간다 해도 유통업자는 다소의 이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유통업자와 소비자가 모두 손해보지 않는 거래가 가능하다. 때문에 철 지난 유명브랜드 제품을 보유한 업자에서부터 세관에서 흘러나온 물건을 확보한 동대문 상인 등 전국 방방곡곡의 각종 재고품을 손에 넣은 이들이 끊임없이 특판행사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땡 시장’ 뜬다, 깊어가는 불황의 늪

서울 종로 2가 탑골공원 인근에서 벌어진 소규모 특판행사.

전국 규모의 대형회사가 5∼7개, 그보다 작은 규모의 회사가 30여개에 이른다. 5월1일에만 서울에서 12개의 초대형 특판행사가 열렸다. 중소 규모의 행사까지 포함해 전국적으로 40여개의 ‘창고대개방’ 행사가 열렸다고 하니 가히 특판업체의 호황기라 아니할 수 없을 듯하다.

하지만 그냥 판을 벌인다고 장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특판업계를 압박하는 요인 또한 적지 않다. 우선 유명브랜드 업체 직영 대리점의 눈치를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영남이 본거지인 남성정장 P사의 재고 물건은 수도권과 호남지역에서 주로 땡처리될 수밖에 없다.

가짜 브랜드로 인해 검찰과 경찰에 불려 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가장 귀찮은 일은 홍보포스터 처리문제. 한 업체의 사장은 ‘옥외광고물관리법’ 위반으로 벌금을 문 것만도 100여 차례가 넘는다. 세무서의 눈초리 또한 신경 써야 한다. 이제는 땡처리 업자들도 신용카드 결제 시스템은 기본으로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런 걸림돌은 불황의 그림자 앞에서는 잔물결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재고품을 안고 있는 전국의 도매업자들이 혈안이 돼 특판행사에 달려들고 있다. 불황의 늪에서 탈출하지 못한 도매업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다 특판행사에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특판업계에만 10여년을 종사한 이사장은 과거 IMF 시절에 버금가는 불황이 닥쳐오고 있다고 진단했다.

“업체들이 재고를 줄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데도 창고마다 물건이 넘쳐나니 상황을 짐작할 만하죠.”

경기 후퇴, 소비심리 위축, 불황이라는 우울한 단어들이 꼬리를 물고 신문을 장식한다. 하지만 현장 영업사원들에게는 새로울 게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소비자의 지갑을 여는 묘책은 낮은 가격 이외는 사실상 없다. 이 불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오늘도 고민하는 상인들은 ‘영업에 포기는 없다’는 신념으로 버텨나가고 있다.





주간동아 384호 (p40~41)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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