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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칼럼

밭에 씨 뿌릴 날이 기다려지네

  • 정찬주 / 소설가

밭에 씨 뿌릴 날이 기다려지네

밭에 씨 뿌릴 날이 기다려지네
골짜기에 버려져 있던 300평이 좀 안 되는 큰 밭을 샀다. 원래 마당 앞에 텃밭이 있었는데 콩걷이가 끝나자마자 텃밭 한쪽을 연못으로 만들었다. 연못에 백련을 심고 싶은 오랜 꿈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채소 심을 터가 마땅찮아진 것이다.

조그만 텃밭일지언정 영영 사라진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산골로 이사하여 늦봄에 난생 처음 콩이라는 이름의 식물을 심어 일곱 되씩이나 가을걷이하는 정복(淨福)을 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함께 대나무로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문 콩깍지를 두들겨 콩을 털고, 어머니가 그 콩을 삶아 메주를 쑤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도 우리네 삶의 제 모습을 찾는 즐거운 일이었다.

새로 산 큰 밭은 산골짜기의 묵정밭이었다. 밭 주인이 서울로 이사하여 오랫동안 비워두었기 때문이었다. 밭 주인과 나는 서로 임무교대를 한 셈이다. 처음에 밭은 이름만 밭이었지 덤불이 우거진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아름드리 은사시나무가 자라 있었고, 밭가의 20여년 된 감나무는 칡과 가시덤불에 친친 감겨 있었다. 자기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머릿속에 온갖 망상과 번뇌가 들어차는 사람의 경우와 다를 바 없었다. 굴삭기로 밭의 모습을 되찾는 데 이틀이나 걸렸다. 감나무만 남겨놓고 십수년간 무단 입주한 불법체류자들을 물리치고 나니 그제야 밭이 되살아났다.

밭은 연못 크기의 몇 배나 되는 땅이었고, 다가오는 해를 더 기다려지게 했다. 아버지는 더덕과 배추와 무를 먼저 말씀하셨고, 나그네는 상추와 쑥갓, 고추를 심으라고 했다. 그 뒤로도 토란이나 우엉, 아욱, 부추, 방울토마토, 오이 등을 심자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그래도 밭은 우리 가족이 자급자족할 다른 채소를 더 키우고도 남을 것 같았다.

제 모습을 찾은 밭에 처음으로 이사 온 친구는 매화나무 묘목이었다. 매화나무 묘목을 이십 그루 사와 두 그루는 마당 앞에, 세 그루는 뒷산에, 나머지 열다섯 그루는 밭가의 감나무 사이사이에 심었다. 서열을 매긴다면 무법자 같은 덤불의 위협을 십수년 동안 견뎌낸 경이로운 감나무가 대선배고, 매화나무 어린 묘목은 까마득한 후배다.



매화나무 묘목을 심으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내 처소를 찾은 손님이 그 깨달음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이왕 밭에 심으려면 큰 나무를 심어야 꽃도 빨리 보고 열매도 빨리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은 손님과 조금 달랐다.

“저도 꽃을 빨리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뒷사람을 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심어놓으면 뒷사람이 꽃을 보고 마음이 즐거워지겠지요. 제 소임은 거름을 듬뿍 주고 잘 키우는 일입니다.”

물론 몇 년이 지나면 나도 꽃을 볼 수 있겠지만, 사군자에 그려진 것처럼 늠름한 고목에 핀 매화를 감상하려면 수십년 뒤가 될 것이었다. 그때 나는 뜬구름 같은 이 세상을 떠난 뒤일 터고.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 연기(緣起)의 가르침 줘

엊그제는 퇴비를 100여 포대 사들여 밭에 두 군데로 나누어놓았다. 차밭 주인 고씨가 자신의 경운기로 마당까지 실어다 주어 품을 덜 들였다. 퇴비 값도 농협 회원 자격으로 할인 혜택을 받았다. 아직 나는 회원이 아니지만 절골마을 농부 황씨가 자신이 사는 것처럼 거들어주었기 때문이다.

퇴비를 많이 산 것은 밭에 듬뿍 뿌려 땅심을 길러주기 위해서다. 그래야 흙과 채소들이 서로 원만하게 상생의 주고받기를 할 것이기에. 그러고 보니 진리는 내가 날마다 밟고 지나가는 밭에도 있다.

이른바 연기(緣起)의 가르침이다. 흙이 있으니 배추와 상추가 자라고, 배추와 상추가 있으니 흙이 살아나는 것이다. 햇볕이나 비나 바람 중에 어느 하나만 없다 해도 채소는 살아갈 수 없을 터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알게 모르게 서로 얽혀 있는 것이다.

밭에 씨 뿌릴 날이 기다려진다. 올해는 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 속에서 삶의 순리를 찾고 자신을 되돌아보고 싶다.



주간동아 377호 (p100~100)

정찬주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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