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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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 너 똑바로 살아라!

양은 늘어도 내용 부실 불균형 심각 … 블록버스터 잇단 실패 투자 열기도 급랭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3-02-13 13: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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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화, 너 똑바로 살아라!

    드라마인 ‘이중간첩’(맨 오른쪽)과 ‘클래식’(가운데)의 분투에도 코미디 일색인 국내 영화계의 흐름은 바뀌지 않고 있다.최근 주목받고 있는 코미디 ‘동갑내기 과외하기’.

    요즘 한국영화가 맥을 못 추고 있다. 제작 편수나 관객은 늘어나는 추세지만 흥행성적은 부진하고 질적인 면에서도 기대 이하라는 소리가 높다. 더욱이 내용은 코미디 일변도고, 진지한 영화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지 못한다. 한마디로 겉만 번지르르한, 풍요 속 빈곤이다.

    최근 몇 주간 박스 오피스 결과를 지켜보면 이를 절감할 수 있다. 분단시대의 아픔을 그린 영화 ‘이중간첩’(감독 김현정)은 한석규라는 한국 영화계 최고 스타가 출연했음에도 ‘영웅’(감독 장이머우)의 위력 앞에 초라하게 고개 숙이고 말았고, ‘클래식’(감독 곽재용)은 나름의 품격을 갖추었지만 ‘멜로 바람’을 일으키는 데 실패했다. 반면 코믹액션인 ‘동갑내기 과외하기’(감독 김경형)는 개봉 전에 이미 50%에 육박하는 예매율을 기록하는 등 후끈한 열기를 내뿜고 있다.

    지난해에도 관객이나 제작 편수는 크게 늘어났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 따르면 한국영화는 전체 영화시장에서 흥행수입을 기준으로 본 시장점유율(전국 기준)이 전년과 비슷한 47%고 개봉작도 13편이 더 늘어난 77편(외국영화 186편)에 이르렀다. 영화 관객은 1억800만명, 전년도에 비해 20.8% 증가한 수치다. 방화와 외화의 관객 증가율은 각각 13.4%, 28.1%였다. 2000년 대비 2001년 관객 수의 경우 외화는 6.6% 증가한 반면, 방화는 96.8%라는 기록적 수치를 보였다.

    그러나 지난해 ‘아 유 레디?’ ‘예스터데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등이 엄청난 제작비를 투입하고도 질적인 면과 흥행 모두에서 실패하면서 투자자들이 큰 손실을 떠안았다. 이로 인해 투자 열기가 급격하게 얼어붙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77편 개봉 … 영화 관객은 1억800만명



    방화, 너 똑바로 살아라!

    최근 관객 동원수 1, 2위를 다투고 있는 ‘영웅’(왼쪽)과 ‘캐치 미 이프 유 캔’.

    최근 김성홍 감독은 제작비 부족으로 코믹액션극 ‘스턴트맨’의 제작을 중단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몇 군데 배급·투자사가 제작비 지원을 약속했다가 뒤늦게 철회하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그러나 ‘스턴트맨’은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고 현재 80% 정도 촬영을 마쳤으며 3월부터 후반부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 회사 김명균 PD는 “제작비 60억원 이상의 대형 영화들이 계속 흥행에 참패하자 투자자들이 자금 회수가 어렵다고 판단해 돌아선 탓”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한국영화 전체의 수익성도 급격히 떨어져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영진위가 분석한 64편의 평균 관객수는 서울 27만7000명, 전국 76만9000명이었다. 손익분기점은 80만~85만명 선. 이들의 흥행수입은 편당 20억원이 조금 넘는다. 비디오 등 관련 시장의 예상 수입까지 합치면 편당 27억4000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2001년에 비하면 수익률은 평균 17%나 떨어졌으며 전체적으로 500억원 가량의 적자를 봤다. 2001년에는 작품당 4억5400만원, 전체 236억원의 흑자를 봤고 수익률도 18%나 됐다.

    내용적인 면에 대한 불안감도 크다. 무엇보다 코미디나 액션 일색이다 보니 내용이 다 비슷비슷하다. 지난해부터 흥행가도를 달려온 ‘색즉시공’과 ‘품행제로’에 이어 흥행 돌풍이 예상되는 ‘동갑내기 과외하기’(2월7일 개봉) 역시 코미디다. 이런 코미디 바람을 마뜩찮게 여기는 이들도 많다. 한 영화평론가는 “관객이나 제작자나 모두 웃음 강박증에 걸린 것 같다”며 “지나친 재미 추구는 결국 가슴에 남을 만한 걸작 영화의 출현을 막는 꼴이 된다”고 지적했다.

    내용이 진지하고 무거운 편인 ‘이중간첩’은 이런 코미디 바람 속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중간첩’은 많은 기대 속에 개봉됐지만 언론과 관객의 외면으로 개봉(1월23일) 2주 만인 2월6일 현재 상영관이 165개에서 79개로 줄어들었다. 관객 97만명을 동원하며 분투하고 있지만 이는 다른 영화들에 비해 상영관 수가 많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45억원의 제작비를 들이고 15억원의 마케팅비를 쏟아부은 대작이어서 관객 150만명은 들어야 손익분기점에 달하는데 현재로선 그 목표를 달성하기가 쉽지 않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런 결과는 한석규에 대한 제작자들의 지나친 집착, 유행과는 동떨어진 영화 내용, 그런 약점을 보완할 내용적 완성도 부족 등 때문인 것으로 지적된다.

    물론 ‘이중간첩’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요즘처럼 가벼운 코미디 영화가 득세하는 시기에 시대적 아픔을 그린 영화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영화의 내용을 결정짓는 주요인은 제작·배급업자들의 기호다. 이들의 기호는 당연히 돈이 되는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이들이 최근 잇따라 ‘대박’을 터뜨려온 코미디와 액션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특정 배급사를 통하지 않으면 상영되지도 못하고 사장되기 일쑤다 보니 배급사의 기호에 맞추려고 특정 유행 장르만 반복 제작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최근 2002년 배급 실적 2위인 CJ엔터테인먼트가 1위인 시네마서비스의 일부 지분을 인수키로 하면서 독점체제가 더 강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독점체제가 강화되면 군소 투자·배급사가 몰락하고 프로덕션도 투자·배급사에 종속될 수 있으며, 소극장이 설 자리도 점점 좁아질 가능성이 높다.

    방화, 너 똑바로 살아라!

    멀티플렉스극장들은 다양한 영화를 한 곳에서 볼 수 있게 하겠다는 원래 취지에서 벗어나 흥행 가능성이 높은 영화 위주로 상영하고 있다. 메가박스(위)와 CGV강변

    또한 멀티플렉스극장들이 다양한 영화를 한 곳에서 볼 수 있게 하겠다는 원래 취지에서 벗어나 흥행 가능성이 높은 영화 위주로만 상영하고 있는 현실에서, 관객의 선택 폭은 점차 좁아지고 작품성 있는 영화가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충무로의 권력은 이미 제작자에서 배급업자로 이동이 이뤄진 상황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지난해 청룡영화상 시상식 때 ‘취화선’으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베테랑 제작자인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은 자신보다 한참 후배이자 시네마서비스의 최대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강우석 감독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사장이 자세한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한 영화계 인사는 “대중성보다는 작품성이 우위에 놓이는 ‘취화선’을 잘 배급해준 데 대한 특별한 감사의 메시지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작비 줄이고 수익성 최우선 과제

    배급의 중요성이 커진 것을 보여주는 이 같은 일화는 영화가 자본의 손아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이야기 구조를 갖춘 드라마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관객과 제작·배급업자들의 코미디 편식현상은 결국 한국영화의 심각한 영양 불균형을 초래했다. 국내 영화계에서 이야기 구조보다 재미와 웃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투자 분위기는 ‘가문의 영광’을 계기로 더욱 뚜렷해졌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영화평론가 김시무씨는 “요즘 영화는 오락적인 측면과 산업적인 측면만이 지나치게 강조돼 영화의 다른 기능, 즉 예술성과 실험성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그 결과 자연히 방화끼리 관객을 나눠 갖고 외화와의 경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것.

    현재의 편향된 영화 제작 경향은 사실 영화의 수익성 하락과도 관련이 있다. 즉 전체적으로 수익성이 낮아지다 보니 이익을 남길 수 있는 한 곳으로만 돈이 몰리게 된 것이다. 영진위 김혜준 사무국장은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먼저 두 가지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첫째 지나치게 많이 드는 제작비. 주연급 배우에게 지급되는 과다한 개런티, 무리한 마케팅비, 제작기간 관리 부재 등이 주요인인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2년의 평균 흥행수입인 27억4000만원 이내, 즉 총비용을 현 수준에서 편당 5억원 가량 줄여야 한다는 것이 김국장의 주장이다.

    둘째 투자관리의 문제다.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에 돌입하고, 합리적인 기획과 관리로 예측 가능성을 따지기보다는 한방의 승부를 노리는 무모함이 큰 문제라는 것.

    이에 따라 최근 감독 제작자 배우들로 구성된 영화인회의가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한 특별위원회(위원장 이창동)를 마련하고, 여러 방안을 찾고 있어 주목된다. 배우를 포함한 영화인, 프로듀서 등이 중심이 돼 자체 반성과 함께 수익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구체적인 대안은 1차로 2월 말께 나올 것으로 알려졌다.

    제작비가 줄어들고 수익성이 개선되면 더욱 다양한 내용의 영화들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코미디 일변도의 제작 풍토가 갑자기 개선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따라서 다양한 관객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곳은 일반 상영관이 아니라 영화제와 시네마테크 같은 곳이 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같은 대규모 영화제뿐 아니라 고다르영화제, 여성영화제 같은 작은 영화제들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일반 상영관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양질의 영화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영화나 비상업영화를 정기적으로 상영하는 시네마테크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영진위에서 시행하고 있는 예술영화 전용관 제도 역시 목마른 관객들의 욕구를 일부나마 채워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영진위는 예술영화의 저변을 확대하고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2002년 12월26일 전국 3개 극장을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지정했다. 동숭아트센터가 운영하는 ‘하이퍼텍 나다’, 미로비전의 ‘미로스페이스’, ㈜광주극장의 ‘광주극장’ 세 곳은 앞으로 연간 상영일수 가운데 5분의 3 이상을 예술영화로 채울 경우 전년도 관객 점유율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를 보조금으로 받게 된다.

    물론 요즘의 영화환경에 대한 이런 우려가 기우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김혜준 사무국장은 “해마다 폭력물과 코미디물에 대한 우려는 높았지만 그것은 영화시장에서 스스로 자정작용을 거치면서 해결돼왔고 투자 문제 역시 시장에서 효율적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많다”며 낙관론을 폈다.

    그러나 올 봄에도 국내 영화는 외화의 그늘에 가려 주춤거릴 가능성이 높다. 외화의 경우 이미 개봉된 ‘영웅’ ‘캐치 미 이프 유 캔’ 등이 롱런 채비를 하고 있는 가운데 작지만 질적으로 높다는 평가를 받는 커티스 핸슨 감독의 ‘8마일’, ‘링’으로 유명한 나카다 히데오 감독의 신작 ‘검은 물 밑에서’, 휴 그랜트와 샌드라 블록 주연의 ‘투 윅스 노티스’, 량차오웨이(梁朝偉)와 류더화(劉德華) 주연의 ‘무간도’ 등이 잇따라 개봉돼 국내 관객을 끌어들일 것으로 보인다. 반면 국내 영화는 이정국 감독의 해양액션극 ‘블루’(7일 개봉), 이정욱 감독의 ‘국화꽃 향기’ 외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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