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0

2002.11.21

추락하는 검찰 날개가 없다

국민의 정부 들어 구속된 검사만 5명… 툭하면 재수사로 신뢰 잃고 간부 항명 등 기강도 흔들

  • 하종대·이명건 / 동아일보 사회1부 기자 orionha@donga.com, gun43@donga.com

    입력2002-11-13 13: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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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락하는 검찰 날개가 없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초기 검찰 조직을 향해 던진 첫 마디는 ‘바로 서라’는 질타였다. 검찰은 이후 김대통령의 발언을 액자로 만들어 검찰청사마다 걸어두었다. 새롭게 태어나겠다는 검찰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후 5년이 다 돼도록 검찰의 모습은 여전히 ‘거꾸로 선’ 모습이다. 정치권력에 휘둘리던 권위주의 정부 시절의 모습에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정치검찰’에서 ‘정치검찰+폭력 검찰’로 오히려 퇴보한 느낌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검찰은 권력 핵심의 의도에 따라 수사 결과를 손바닥 뒤집듯 했다. 12·12 및 5·18사건 관련 검찰 수사가 대표적이다. 검찰은 당초 두 사건 관련자들을 불기소처분했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자 곧바로 수사 결론을 뒤집고 전두환 전 대통령 등 신군부 인사들을 대거 구속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불거졌을 때는 ‘낭설’이라고 수사 결론을 내렸다가 몇 개월 뒤 노 전 대통령 등 전직 대통령 2명을 모두 구속기소했다.

    1997년 초 불거진 한보특혜대출비리 사건 당시에는 현직 대통령 차남인 김현철씨를 상대로 한 한보측의 로비설에 대해 “시중 낭설만 가지고는 수사에 착수할 수 없다”고 버티다가 결국 재수사로 이어져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 아들이 구속되고 대통령의 ‘레임 덕’ 현상을 가속화하는 사태를 불러왔다.

    ‘국민의 정부’라는 김대중 정부 아래서 검찰의 모습은 더 참담하다. 김영삼 정부 시절 ‘불신의 대상’이었다면 이젠 ‘개혁 대상’으로까지 추락했다. 사상 최초로 도입된 특별검사제를 통해 재수사가 이뤄진 사건만 3건이나 된다. 검찰 스스로 재수사한 사건도 3건이다. 검찰 수뇌부의 결정에 불복, 검찰 간부가 항명하는 사태가 일어났는가 하면 검찰청사 내에서 조사를 받던 피의자가 11시간 가량 얻어맞다 결국 숨지는 사건도 벌어졌다.





    이 같은 불미스러운 사태로 구속된 검사만도 김태정 전 법무장관과 신광옥 전 법무차관, 박주선 전 대통령법무비서관, 진형구 전 대검 공안부장, 홍경령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 등 5명이다. 신승남 전 검찰총장이나 김대웅 법무연수원 연구위원(고검장급), 이덕선 전 군산지청장 등 불구속기소됐거나 잘못된 수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내거나 전보 조치된 검사는 부지기수다.

    검찰의 추락은 검찰 조직에만 타격을 준 것이 아니었다. 현 정부의 신뢰 위기로 이어졌다. 청와대나 민주당 등 여권에서 “현 정권에선 검찰의 덕을 본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검찰이 여권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김대중 대통령이나 여권 스스로 자초했다는 지적이 많다. 검찰 출신 한 여권 인사는 “검찰 독립에 대한 국민적 여망이 과거보다 훨씬 높아졌는데도 김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핵심부가 여전히 구태를 벗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김대통령이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검찰에 당한 ‘피해의식’ 때문인지 검찰 등 사정기관을 ‘장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믿을 만한 사람을 요직에 앉히려다 보니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다. 이 인사의 계속되는 설명이다.

    “과거 정권은 검찰 내 자기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매끄럽게 검찰을 컨트롤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권력을 운영해온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노하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수정권인 현 정권으로서는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과거 정권과 똑같은 전철을 밟다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무리한 제 사람 심기… 여권 스스로 禍 자초

    추락하는 검찰 날개가 없다

    김대중 정부 검찰 총수 가운데 박순용 전 총장만 임기 2년을 다 채웠지만 재임 기간중 ‘진승현 게이트’ ‘정현준 게이트’ 등으로 편치 않은 시간을 보냈다. 김태정 박순용 신승남 이명재 전 총장(왼쪽부터).

    그런 한계 가운데 대표적인 게 인사 실패다. 특수통으로 알려진 한 부장검사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해서 호남 출신을 중용했지만 인재풀이 적다 보니 적임자로 보기에 어려운 사람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국민의 정부’ 아래서 검찰의 수난이 시작된 것은 99년 1월 ‘대전 법조비리 사건’에서부터. 대검 수뇌부가 “이종기 변호사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았다”며 심재륜 당시 대구고검장을 중징계하려 하자 “차기 검찰총장 구도와 관련한 음모”라며 발끈했던 것. 심고검장은 “김태정 검찰총장 등 검찰 수뇌부는 ‘정치권력의 시녀’”라며 맹공을 퍼부으면서 김태정 총장과 동반 퇴진을 요구, 항명사태로 발전했다.

    그러나 법무부는 그의 주장을 일축하고 “검찰 조직의 기강을 흩뜨렸다”며 면직 처분했다. 그는 이에 불복, 법원에 소송을 냈고 2년7개월 만에 대법원으로부터 복직 결정을 받아냄으로써 그의 무죄 주장을 확인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 검찰 총수 자리에 올랐지만 김대중 정부에서도 김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던 김태정 전 법무장관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던 사건은 ‘옷 로비 사건’이었다. ‘옷 로비 사건’은 경찰의 별동대 수사 조직인 ‘사직동팀(경찰청 조사과)’이 99년 초 은밀히 내사를 벌여 조용히 마무리했던 사건. 그러나 같은 해 5월 언론에 이런 사실이 보도됨으로써 고위층 로비의혹 사건으로 발전했다.

    당시 김장관의 부인 연정희씨의 고소로 시작된 서울지검 수사는 “연씨는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부인 이형자씨의 잘못된 주장으로 명예를 훼손당한 피해자”라는 예상된 결론을 냈다.

    김장관에게 유리했던 검찰의 결론은 그러나 그를 ‘무덤’으로 몰고 가게 된다. 검찰의 수사 결과를 못 믿겠다는 여론이 비등해졌고, 특검은 같은 해 12월 “이 사건은 연씨를 상대로 한 로비 사건이긴 하지만 성공하진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김장관과 박주선 청와대법무비서관은 수사기밀 유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추락하는 검찰 날개가 없다

    이용호 게이트를 수사한 차정일 특별검사(위 오른쪽), 옷 로비 사건을 조사한 최병모 특별검사(아래 맨 왼쪽).

    99년 7월 전국의 공안 사건을 지휘하는 진형구 당시 대검 공안부장이 구속된 ‘파업 유도 사건’은 검찰이 수난을 겪은 사건이긴 하지만 취중 실언이 빚어낸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진부장의 발언이 보도되면서 검찰이 노사 문제에까지 편파적으로 개입했다는 노동계의 강력한 항의가 잇따랐고, 검찰은 곧바로 진상 조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수사 착수 8일 만에 진부장이 파업을 유도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진부장을 구속했다. 그러나 2개월 뒤 재수사를 맡은 특별검사팀은 “진부장 발언은 과장된 것으로 파업 유도는 없었다”며 상반된 결론을 내렸다. 동일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수사 결론에 대해 법원은 특검의 손을 들어줬다. 진형구씨는 결국 존재하지도 않은 ‘파업 유도’를 술김에 자랑 삼아 기자들에게 얘기했다가 결국 자신만 망쳤던 셈이다.

    2000년 말부터 1년 남짓한 기간은 ‘국민의 정부’ 검찰에가장 치욕스러웠던 시기였다. ‘정현준·진승현·이용호 게이트’ 등 각종 게이트가 잇따라 터졌고, 그때마다 검찰 수뇌부는 구속되거나 사표를 내는 등 곤욕을 치렀다.

    2000년 말에 한 달 사이로 터진 ‘정현준·진승현 게이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닮은꼴’이었다. 금융감독원이 거액 불법 대출을 적발하면서 수사가 시작된 점, 정치권에 대한 로비설이 무성했던 점, 검찰이 “정관계 로비는 없었다”고 1차 수사 결론을 내린 점, 1년여 뒤 재수사가 시작된 점 등이 모두 같다. 굳이 다른 점이라면 ‘진승현 게이트’에서는 검찰 고위관계자가 구속됐다는 점일 것이다. 민주당 당료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몇 백만원씩 총 18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신광옥 전 법무차관이 그 주인공이다.

    수사 경위에 대한 수사를 포함, 똑같은 사건을 무려 다섯 번이나 조사한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이용호 게이트’다. 2000년 5월9일 서울지검은 G&G 그룹 이용호 회장이 회사 자금 330억원을 횡령하고 주가를 조작한 혐의를 포착하고 긴급체포했다. 그러나 다음날 검찰은 무슨 영문인지 이씨를 풀어주고 사건을 종결했다(1차 수사).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대검 중앙수사부는 이듬해 9월4일 이씨를 회삿돈 450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전격 연행, 구속했다(2차 수사). 그리고 신승남 당시 검찰총장의 동생 승환씨가 이씨로부터 스카우트 등의 명목으로 6666만원을 받은 사실을 밝혀냈다.

    검찰은 이에 따라 이씨를 무혐의로 석방한 1차 수사 지휘라인에 대한 감찰 조사에 나섰다(3차 조사). 그러나 대검의 재수사 과정에서도 승환씨의 금품수수가 불법이라는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검찰은 “승환씨가 받은 돈은 스카우트비일뿐 로비자금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수사관행 개선·권력과의 유착 방지 제도 ‘절실’

    그러나 2001년 11월 말 시작된 차정일 특별검사의 조사(4차 조사)에서는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의 수뢰 사실이 추가로 밝혀지고 승환씨가 받은 돈 역시 로비자금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결국 신승남 총장은 이듬해 1월13일 사표를 내고 검찰총수직을 떠났다. 특검 조사에 이어 시작된 대검의 5차 수사에서는 신 전 총장과 김대웅 당시 광주고검장이 이용호 게이트 사건의 수사 상황을 정치권에 흘려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모두 재판에 회부됐다.

    서울지검 고문치사 사건은 끝없이 추락하던 검찰 조직에 결정타를 날린 셈이 됐다. 이전엔 “일부 정치검사들이 문제”라며 자위할 수 있었지만 ‘인권의 파수꾼’이 돼야 할 검찰이 ‘고문 검찰’이란 오명까지 뒤집어썼기 때문.

    검찰의 한 고위간부는 “김영삼 정부 시절 처음으로 검찰의 현직 간부가 구속되면서 조직 전체가 큰 충격을 받았는데 ‘국민의 정부’에선 검찰 간부가 구속되더라도 별다른 느낌이 없을 정도로 검찰이 수난을 겪었다”며 “검찰이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강압적인 수사관행을 바꾸고 권력과 검찰의 유착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개선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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