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6

2002.08.08

“피는 피를 부른다, 전쟁 끝내라!”

“9·11 반성해야” 미국내 反戰운동 확산 … ‘평등한 지구촌’ 위한 부시정권 전향적 자세 촉구

  • < 뉴욕=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 kimsphoto@yahoo.com

    입력2004-10-11 1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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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는 피를 부른다, 전쟁 끝내라!”
    9·11 테러 공격으로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경비는 삼엄하다 못해 살벌하다. 이 건물에 들어서려면 공항 세관 못지않은 검색을 거쳐야 한다. 대다수 뉴욕 시민들은 이런 보안절차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의 이메일을 비롯한 컴퓨터 파일과 전화가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에게 도청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난 연말 의회를 통과한 이른바 ‘애국자법안’(Patriot Act)이 법적 근거다. 뉴욕 시민들은 부시 행정부가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이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자유와 안전을 가져올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를 겨냥한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 또한 뉴욕이다. 그 목소리들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미국 민주주의가 도둑맞았다.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한 독재자다”라는 민권운동의 목소리, 다른 하나는 “미국은 왜 9·11 테러를 당했는지 반성해야 한다. 전쟁만이 능사가 아니다. 초강대국 미국의 힘이 함부로 쓰이고 있다”는 반전운동의 목소리다. 필자는 9·11 뒤 1, 2주 간격으로 뉴욕에서 열리는 반전집회에서 이른바 ‘거대한 형님’(Big Brother)에 도전하는 날카로운 비판을 들을 수 있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1km도 채 안 떨어진 42번가 뉴욕 공공도서관 본관 건물 앞. 매주 수요일 이곳에서는 소규모 반전운동 시위가 열린다. 시위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옷을 입고 나타난다. 이들은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침묵시위를 하면서 도서관 앞을 지나는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며 부시 비판 메시지를 전할 뿐이다. 이 모임의 조직자인 줄리 핀치(45)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 낳을 것”

    “피는 피를 부른다, 전쟁 끝내라!”
    “우리는 9·11 희생자들에게 조의를 표한다. 9·11 테러를 저지른 자들은 국제법에 따라 재판에 회부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복수(vengeance)에 호소하는 것은 반대한다. 모든 인종 민족 종교에 대한 편견과 폭력에 반대하며, 아울러 반(反)이슬람·반(反)이민자 정책에 반대한다. 부시 행정부의 전쟁은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낳을 것이고, 국제 사회에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테러리즘은 전쟁으로 없앨 수 없다. 우리는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9·11 테러에 대해 복합적인 감정(mixed feelings)을 품게 된 배경과, 미국이란 초강대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이 제3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좌절과 함께 테러리즘을 키우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따라서 전쟁이라는 물리적 수단에 의지하기보다는 정의롭고 평등한 지구촌 사회를 세우는 데 미국 시민들이 앞장서야 한다.”



    미국의 진보적인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반전운동은 전쟁보다 더 빨리 일어났다”고 말한다. 9·11 테러 직후 부시 행정부가 아프간 공습에 나설 조짐을 보이자, 뉴욕의 반전운동가들은 거의 날마다 거리에 나와 ‘No War!’(전쟁 반대)를 외쳤다. 그러나 그들은 고달픈 나날을 보내야 했다. 시민들의 눈총 때문이었다. 9·11 테러 뒤 미국 뉴욕 맨해튼 중심가인 타임스 스퀘어 거리는 성조기로 뒤덮였다.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God Bless America)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단결해서 다시 일어선다”(United We Stand)는 구호가 곳곳에서 들렸다.

    현재 미국 유권자들의 부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80% 선이다. 5명 가운데 4명이 부시의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는 셈이다. 이런 애국주의 물결에 치여 반전운동가들의 목소리는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부시 행정부에 대한 이들의 비난은 곧 애국심이 결여된 배반·반역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대학가의 반전데모는 참가자들이 적어 중단되기도 했고, 워싱턴 백악관 뒤쪽에서 이뤄졌던 평화행진이 마침 지방에서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들에 의해 제지당하는 일도 생겨났다. 그러나 조금씩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고 반전운동가들은 평가한다.

    반전운동가들은 반전운동 국면의 전환점을 지난 4월 워싱턴에서 열렸던 대규모 반전집회로 꼽는다. “약 10만명이 참가했던 그날 집회를 통해 미국 국민들 사이에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이 미국의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고 무고한 희생자들과 지구촌 분쟁의 씨앗을 뿌릴 뿐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토니 머피·반전운동 조직인 International A.N.S. W.E.R. 조직자) 워싱턴 미 연방수사국 본부 건물 앞에서 지난 6월 말 이와 비슷한 대규모 반전·인권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반전운동가들은 이제 운동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베트남전쟁을 비판하던 반전운동도 초기에는 힘이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부시 행정부에 대한 반전운동은 이제 시작이나 다름없다. 계속되는 집회와 시위를 통해 우리의 목소리가 퍼져나가면, 보다 많은 참여와 호응이 일어날 것이다.” (레리 홈스·International Action Center 간사)

    미국 내 반전운동가들은 부시 정권의 미국 중심적 세계관을 질타한다. 부시를 정점으로 한 이른바 미국의 ‘신보수파’ 또는 ‘신우파’(New Right)들이 글로벌리즘을 자기 편한 방식으로 해석해 내놓은 것이 미국적 세계주의요 팍스 아메리카나라고 여긴다. 이를 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미국의 초강력 군사력이고, IMF와 세계은행을 지배하는 자본력이다. 그런 물리력에 바탕을 두고 부시의 공격적인 일방주의적 대외정책들이 나온다는 게 반전운동가들의 주장이다.

    미국의 보수학계에서도 미국의 패권(hegemony)이 일방적인 힘의 행사에 의해 보장될 수 없으며, 한 국가의 힘이 강해질수록 국제협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인식이 조금씩 확대되고 있다. 그런 인식을 대표하는 이가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차관을 지낸 조셉 나이(하버드 케네디스쿨 학장)다. 그는 올 봄에 펴낸 ‘미국 힘의 역설’(The Paradox of American Power)이란 책에서 미국의 일방주의와 오만, 편협을 비판하면서 “미국은 다른 나라들과 보다 협력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욕의 반전운동가들은 미 주류언론에 불만이 많다. 뉴욕 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 같은 주류언론들이 비판적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 이들은 특히 미국의 상업적인 TV 방송사들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다. “미 공영방송인 PBS 같은 예외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방송사들은 미국의 전쟁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곧 테러를 지지하는 목소리라는 부시 행정부의 흑백논리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못마땅해한다. 미 언론의 편향된 보도 태도를 모니터하는 뉴욕의 언론감시단체 FAIR(Fairness&Accuracy In Reporting)의 간사 라첼 코엔은 “폭스(Fox) 같은 일부 상업적인 방송들의 지나친 애국주의적 보도 태도가 오히려 미국인의 정상적인 판단을 흐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반전운동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반세계화 운동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스타급의 뚜렷한 지도자와 분명한 지휘계통이 없다. 존슨 행정부 시절 법무장관을 지낸 램시 클라크가 그런대로 지명도 있는 인물로 꼽히지만, 80을 넘긴 나이 탓에 활동반경에 제한이 따른다. 언어학자인 노암 촘스키, 역사학자인 하워드 진이 반전운동의 이론적인 뒷받침을 하지만, 활동가들과는 얼마간 거리를 두고 있는 모습이다. 60년대 흑인 인권운동가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틴 루터 킹 같은 실천적이고 행동반경이 큰 대중적 인물이 없는 상황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현재의 반전운동은 결집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잊을 만하면 열리는 이벤트성 시위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뉴욕의 반전운동가들은 낙관적인 모습이다. 지난 4월 워싱턴에서 열렸던 대규모 반전집회장에서 만난 뉴욕의 한 여성 반전운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국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치에 무관심하다. 지난해 말 CBS방송이 실시한 한 설문조사에서는 미국인들 중 60%가 오사마 빈 라덴이란 이름조차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무관심과 애국주의 열풍 속에서 반전운동이 이만큼 자리잡은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미 주류사회의 눈총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적 세계관과 미국 국민들의 맹목주의적 애국심에 반기를 든 반전운동가들. 이들이 훗날 미국사에서 9·11 테러의 복수를 외치는 전쟁의 광기 속에서도 이성을 지킨 이상주의자로 기억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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