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6

2002.08.08

줄 것 다 주고 번번이 뺨 맞는다

원칙·전략·조직 등 협상시스템 완전 ‘초보’… 문제 생기면 ‘네 탓 타령’ 국익 손실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 < 성기영 기자 > sky3203@donga.com

    입력2004-10-11 13: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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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 것 다 주고 번번이 뺨 맞는다
    ”서명을 하면서 영문 합의문도 작성하지 않다니!” 매년 반복되는 마늘협상 파동을 지켜보며, 전문가들은 다른 실책은 제쳐두고 2000년 7월 첫 마늘협상 때 합의문을 국제통용어인 영어로 하지 않고 한국어와 중국어로만 작성한 것이 두고두고 화근이라고 지적한다. 2002년 7월 이 문서가 또 말썽이 됐다. 이번에는 합의문의 부속서 파문. 부속서에 적힌 “2003년부터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다”는 구절이 세이프가드 연장 불가냐 아니냐를 놓고 관련 부처는 명확한 합의도 없이 2년 동안 동상이몽(同床異夢) 상태였다.

    ‘한국인은 왜 항상 협상에서 지는가’의 저자인 김기홍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면서 “이번 마늘협상은 협상과정의 실패, 협상조직의 문제, 협상문화의 부재를 총체적으로 보여준 뼈아픈 사례”라고 했다.

    협상의 원칙 실종

    처음부터 마늘협상은 영문 합의문 미작성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실책을 비롯해, 최종협상 결과를 국민(혹은 이해 당사자)에게 정확히 알리지 않는 등 기본 원칙조차 지키지 않았다. 2년 전 협상 결과를 놓고 이제 와서 농민들이 “비밀협상 책임지라”며 시위를 벌이는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까.

    경희대 정진영 교수(국제관계학)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통상협상 결과를 반드시 관보에 게재해 공개하도록 하고, 공개되지 않은 협상 결과는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하도록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협상 결과뿐 아니라 협상 과정까지 꼼꼼히 기록해서 추후 논란의 여지를 없애야 한다. 육군본부 무기체계대외협상팀장인 정호수 중령은 협상이 끝날 때마다 손바닥만한 두께의 바인더가 하나씩 늘어난다고 말한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공식 회의록과는 별도로 대표들끼리 나눈 사소한 대화까지 기록해 둔다. 한번은 외국기업과의 협상 도중 상대가 ‘그런 약속 한 적 없다’고 발뺌했는데 당시 대화록을 보여주며 항의해 정식으로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이 기록은 다른 협상 때 매뉴얼로 활용한다.” 마늘협상의 경우 문제가 된 최종합의까지 기록이 없어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늘 전문가는 없다

    지난해 11월 KBS TV ‘일요진단’에 출연한 김명자 환경부 장관은, 기후변화협약과 관련해 “국내에 이 문제를 가지고 협상에 임할 전문가가 부족하지 않느냐”는 지적을 받자 “공무원 인사를 하다 보면 전문성을 갖고 한 자리에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현실적으로 참 어렵다”고 토로했다. 공무원의 순환보직제가 협상 전문가 양성에 걸림돌이라는 사실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2000년 4월부터 2001년 4월까지 한·중 마늘협상이 5차례 진행되는 동안 한국측 협상 책임자는 매번 달라졌다. 그나마 본협상 대표였던 최종화 국장은 협상이 끝나기도 전에 요르단 대사로 발령을 받았다(2000년 7월15일까지 협상, 7월31일 합의서 서명, 7월11일 주 요르단 대사 발령). 이에 대해 민주당 김성호 의원은 ‘외교부 대외협상능력 문제 있다’는 정책보고서에서 “협상대표를 맡고 있는 외교통상부와 주무부처간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 공무원, 전문가, 이익집단 대표 등을 중심으로 전략과제팀(Task Force)을 구성하고, 협상 책임자는 초기부터 종료 단계까지 협상에 임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결국 마늘협상 파문은 한덕수 청와대경제수석(당시 통상교섭 본부장)과 서규용 농림부 차관이 사표를 내는 것으로 일단락됐으나, 일각에서는 아까운 통상 전문가만 잃었다고 아쉬워한다. 특히 한 전수석은 통상교섭본부라는 ‘취약한’ 조직을 이끌며 통상교섭 본부장의 국무회의 참석을 성사시키는 등 능력을 인정받아왔다.

    줄 것 다 주고 번번이 뺨 맞는다
    마늘협상의 가장 큰 실수는 99년 한국 정부가 국내 여론을 너무 의식해 성급히 관세인상을 강행한 것이다. 중국은 곧바로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 수입 전면금지 조치로 보복을 했고, 그 뒤로 우리는 계속 내주기식 협상을 해야 했다. “협상은 전투와 같다”고 말하는 정호수 팀장은 “내가 이렇게 움직이면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해서 전략을 세워야 한다. 2차, 3차, 4차까지 대응논리가 없으면 아예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

    연내 타결을 목표로 진행중인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국내 포도재배 농가들의 반대. 사실 자동차나 전자산업의 경우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면 칠레에 대한 수출 물량이 크게 늘어 이득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생존권이 걸린 포도재배 농가의 입장을 무시하기 어렵다. 전윤철 경제부총리는 “3년간 진행한 협상을 타결하지 못하면 대외 신뢰도에 문제가 생기고, 어느 나라와도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지 못한 통상낙오 국가가 된다”며 협상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나, 내부 조율에 실패하면 자칫 제2의 마늘협상이 될 수도 있다.

    내부 갈등도 이용하는 노련함이 부족하다

    협상전문가는 예비협상 단계에서 갈등을 조율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본협상에 들어가면 이런 압력단체의 목소리를 충분히 이용해야 한다. 현재 갈등의 핵인 마늘만 해도 무역위원회는 합법적 권한을 이용해 산업피해 조사를 개시하고 강도 높게 대응해 나가면서, 중국과의 협상에서는 이를 이용해 협상력을 최대한 높일 필요가 있다. 내부협상과 외부협상을 병행하는 일종의 이중전략이다.

    무역에서 농산물 의존도가 높은 유럽연합 국가들의 경우 협상이 열리는 제네바로 몰려와 토마토를 던져대는 농민들을 적절히 활용한다. ‘지금은 저 농민들 손에 토마토가 들려 있지만 이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돌멩이를 들게 될지도 모른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빨리 타결짓는 것이 좋다’고 압박을 가하는 것. 물론 이러한 내부협상과 외부협상 전략을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시킬 전문가가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이 문제다.

    절호의 기회 놓치고 뒤통수 맞는다

    미국의 ‘슈퍼 301조’ 발동으로 한미 자동차협상이 한창 진행중이던 97년은 우리나라가 대북 지원용 원자로를 놓고 경수로(미국)냐 중수로(캐나다)냐 저울질을 하던 시기였다. 두 나라는 원자로를 팔기 위해 엄청난 로비를 벌였다. 원자로는 1기에 8억 달러나 하는 대규모 프로젝트. 미국의 자동차시장 개방압력에 캐나다 원자로로 대응했다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수도 있었다. 이에 대해 서강대 안세영 교수(국제협상)는 “그동안 한미 협상에서 안보동맹 관계와 통상이익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협상의 전술도 안 써보고 무조건 안보동맹이라는 우산 속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프랑스와의 외규장각 도서반환협상도 내줄 것은 다 주고 얻은 것은 별로 없는 경우다. 1993년 서울에서 개최된 한·불 정상회담에서 미테랑 대통령이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를 꺼낸 속셈은 프랑스 고속철 TGV를 팔기 위해서였다. 이 협상은 10년 가까이 끌면서 프랑스에 주도권을 뺏겼다.

    협상은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협상 현실은 훈련도 끝마치지 않은 신병을 변변한 무기도 주지 않고 전장으로 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략마저 상대에게 노출돼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결국 다 주고 돌아온다. 누구 탓을 할까. 협상의 ‘협’자만 나와도 국민들 가슴은 ‘덜컥’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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