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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 나서기엔 너무 많은 피 흘렸다”

중동 학자들의 탄식 … 학문적 교류 단절, 이-팔측 서로 “네 탓이오”

  • < 요르단 암만=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 kimsphoto@yahoo.com

“지식인들 나서기엔 너무 많은 피 흘렸다”

“지식인들 나서기엔 너무 많은 피 흘렸다”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에는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학 연구소인 모세 다얀 센터가 있다. 이곳 선임연구원인 40대 초반의 브루스 매디 와이츠만 박사는 미국에서 이스라엘로 거주지를 옮겨온 이른바 이민 1세대다. 그러나 이즈음 그는 학문적인 공허감에 빠져 있다. 말이 중동-아프리카 지역학 연구소지 해당 지역 지식인들과의 교류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2000년 9월 말 예루살렘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진 뒤 서로간에 교신이 끊어졌다”는 얘기다. 정치적 긴장상황이 학문적으로 자유로운 토론을 벌여야 할 지식인들 사이마저 거리를 두도록 속박하는 모습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식인 사회도 마찬가지다. 희생자가 2000명을 넘어선 이-팔 유혈사태는 지난날 오며 가며 만나는 사이였던 이들의 관계를 아예 단절시켰다. 예루살렘 헤브루대학의 모세 마오즈 교수(역사학)는 “유혈충돌이 길어지면서 느슨하게나마 이어져온 팔레스타인 쪽과의 학문적 교류가 완전히 끊어졌다”고 안타까워한다. 마오즈 교수는 “지난날 두 번쯤 지금 같은 유혈충돌이 일어났을 때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식인들이 공동선언문을 발표한 적도 있었다”고 밝힌다.

“지식인들 나서기엔 너무 많은 피 흘렸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 같은 선언문 작성은 생각조차 못한다. “우리 지식인들이 나서기엔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는 게 마오즈 교수의 탄식이다. 그는 “워낙 상황이 나빠져 팔레스타인 친구들에게 전화 걸기도 조심스럽다”고 덧붙인다. “이 땅의 영구평화는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가능하다”는 게 이 이스라엘 역사학자의 믿음이지만, 현실은 각박하다 못해 살벌하기만 하다.

이스라엘의 각종 여론조사에서 약 80%가 아리엘 샤론 총리의 강공책을 지지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 마오즈 교수 같은 온건한 이스라엘 지식인들이 설 자리는 좁아 보인다. 텔아비브대학 부설 자페 전략문제센터 부소장 에프라임 캄 교수(정치학)는 “우리 지식인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낼 때가 적어도 지금은 아닌 것 같다”는 우회적인 발언으로 샤론의 강공책에 대한 지지를 나타냈다. 그는 샤론의 밀어붙이기식 군사적 강공책이 궁극적으로 유효한지에 대한 회의를 나타내면서도 “날마다 자살폭탄 공격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생존과 보안문제에 관한 한 우리 지식인들도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식인들 나서기엔 너무 많은 피 흘렸다”
이스라엘의 보수적 두뇌집단이 모여 있는 바르일란대학의 제럴드 스타인버그 교수(정치학)는 이스라엘 강경파 지식인의 한 표본이다. 스타인버그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강점에 대한 비판여론은 “전 세계 반유대주의자들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그는 예닌 난민수용소에서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을 죽인 것을 두고 일부 비정부기구(NGO) 인권단체와 언론들이 ‘예닌 학살’이라고 부른 것이 음모의 단적인 예라고 강변했다.



이스라엘을 ‘악마화’(demonization) 하려는 음모는 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한 뒤 본격화됐다는 게 스타인버그의 주장이다. “거대한 아랍 세계에 포위된 이스라엘의 생존전략이란 시각에서 현 사태를 봐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들(아랍인들)이 우리 이스라엘을 지중해 바다 속으로 수장(水葬)하려는” 음모를 차단하고 생존하려면, 전략적으로 67년 6일 전쟁 점령지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무단통치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지식인들 나서기엔 너무 많은 피 흘렸다”
스타인버그 교수는 나아가 “이스라엘 점령지란 없다. 점령에 대해 아랍인들에게 이해를 구해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정착(settlement)이란 개념도 잘못된 것”이라는 극단논리를 편다. 그는 현 상황을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전쟁으로 파악한다. 일단 전쟁이 시작됐으면, 이스라엘이 소명받은 조국(homeland)을 지킬 권리가 분명해진다는 논리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한 전쟁을 미국의 베트남 전쟁처럼 ‘침략’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동정하면서 이스라엘을 악마화하려는 전 세계 비판적 지식인들은 알 카에다 테러리스트처럼 대량살육을 지지하고 있다”는 주장마저 편다.

“정착민이란 없다”는 스타인버그 교수의 주장은 중동 지식인 사회에선 극단적으로 여겨질 것이다. 유대인 정착촌 문제는 이스라엘 내부에서조차 중동 평화협상의 걸림돌로 여겨져왔다.

“지식인들 나서기엔 너무 많은 피 흘렸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의 6월 신내각 구성에서 노동장관에 임명된 가산 카티브(예루살렘 미디어센터 소장)는 팔레스타인의 대표적 온건파 지식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유대인 정착촌이야말로 팔레스타인 영토를 조각내려는 샤론 이스라엘 정권의 정치적 도구”라고 주장한다. 유대인 정착촌 건설 확장, 그리고 올 들어 샤론이 추진하고 있는 대규모 방벽 건설은 지난 67년 6일 전쟁 뒤 유엔이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했던 유엔 결의안 242조를 바탕으로 한, 중동평화를 이루려는 노력을 근본적으로 어렵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샤론 총리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이스라엘 영토 안으로 넘어 들어와 테러공격을 못하도록 막는다는 이른바 보안(security) 문제를 내세워 ‘완충지대’(buffer one)라 불리는 대규모 방벽 건설에 나서고 있다. 그는 서안지구와 이스라엘 영토 사이에 110km 길이의 방벽을 곧 설치할 참이다. 이 장벽이 완성될 경우 완충지대 안에 자리한 마을에 사는 약 40만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군의 통제를 받게 된다. 이미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쪽에 10km 넓이의 완충지대를 설정해 가시철망으로 가로막아 놓았다.

카티브 노동장관은 “지난날 소련이 막강했을 때 세운 동베를린 장벽도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의지를 막을 수 없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끝내 무너졌다. 이런 역사적 실패 사례를 샤론은 잊고 있다”고 비판한다. 팔레스타인 변호사인 이하브 아부 고쉬는 “이스라엘이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방벽과 도로봉쇄 정책은 지난날 나치의 히틀러가 유대인에게 가했던 수법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라 주장한다. “우리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일종의 게토(ghetto) 안에 가두어두고 이동의 자유를 막으려는 물리적 장치”라는 지적이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통제정책은 지난날 남아프리카에서 백인들이 폈던 흑백 인종차별 정책(apartheid)과 다를 바 없으며 우리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가져다 준다”고 그는 주장한다.

한편 카티브 노동장관은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이스라엘에서 취업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막게 될 방벽 건설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내 도로봉쇄 정책과 더불어 팔레스타인 경제를 마비시킬 것”으로 진단한다. 팔레스타인 주요 도로를 봉쇄하는 샤론의 정책은 “팔레스타인을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로 분리하고, 그 안에서도 다시 도시와 마을들을 고립시켜 팔레스타인 경제를 마비시키려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걱정한다.

서안지구 라말라 비르제이트대학 아델 자그하 교수(경제학)는 “지난 20개월에 걸친 인티파다(봉기)로 이스라엘 경제도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팔레스타인 경제는 말 그대로 고사(枯死) 상태에 이르렀다”고 우울한 진단을 내린다. 경제학자의 시각에서 보면, 이스라엘군의 봉쇄정책은 팔레스타인 경제를 마비시켜 항복을 받아내려는 ‘경제전쟁’이다. 이웃 이집트나 요르단에서 넘어오던 물자가 끊겨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지금 심각한 생필품 빈곤을 겪고 있다. “군사적으로 팔레스타인을 파괴하지 못하더라도 경제적으로 말려 죽이는 것은 가능하다”는 게 자그하 교수의 진단이다.

현재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아라파트의 운명을 두고 강온파 사이에 견해가 엇갈린다. 아리엘 샤론은 아라파트를 제거한다는 쪽이지만,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은 그를 팔레스타인 지도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다. 모파즈 참모총장은 아라파트를 제거하자는 쪽이고, 벤야민 벤 엘리제르 국방장관(노동당 지도자)은 “아라파트를 제거하려고 우리가 나선다면, 국제사회에서의 그의 영향력만 더 높여줄 뿐”이라고 반대한다. 벤 엘리제르 국방장관은 “아라파트의 라말라 집무실을 완전히 파괴하자”는 샤론과 모파즈의 주장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강경파인 모파즈 참모총장과는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지식인들 나서기엔 너무 많은 피 흘렸다”
미국 내에서도 부시 대통령과 콜린 파월 국무장관 사이엔 아라파트를 보는 시각이 다르다. “아라파트는 신뢰감이 안 가는 인물”이라고 발언한 부시의 대(對) 아라파트 시각이 샤론을 닮았다면, 파월의 시각은 페레스와 닮았다.

아라파트의 운명에 대한 아랍권 지식인들의 시각은 하나로 모아진다. ‘요르단 타임스’의 아이만 사파디 편집국장은 “팔레스타인 지도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못박는다.

자살폭탄 공격이 벌어질 때마다 아라파트는 그것을 비난하면서 “폭력 사용 중지”를 외쳤다. 아라파트의 측근으로 신임 내무장관에 오른 압델 라자크 알 아흐야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무장을 해제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로 보인다.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그것은 ‘이적(利敵) 행위’로 비쳐질 게 뻔하다. 인티파다 과정에서 하마스, 이슬람 지하드 등 아라파트에 비판적인 세력은 물론, 친(親)아라파트 계열의 알 아크사 순교여단과 같은 조직들도 자살폭탄 공격을 거듭해 왔고 이들에 대한 팔레스타인 대중의 지지는 높은 편이다(팔레스타인 쪽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약 80%가 자살폭탄 공격을 지지한다).

필자가 접촉한 아랍권 지식인들은 “자살폭탄 공격이 바람직한 것이라고는 보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좌절에서 비롯된 저항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집트 카이로의 유력 일간지 ‘알 아흐람’ 부설 정치전략문제센터 부소장 하산 아보우 탈레브 박사는 “하마스의 주장처럼 자살폭탄 공격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스라엘의 불법적 점령이 사라지기는커녕 지금처럼 압제가 심해진다면 자살폭탄과 같은 극한전술이 멈추기를 바라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진단한다.





주간동아 340호 (p62~64)

< 요르단 암만=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 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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