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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와 함께한 태극마크 16년

황선홍 월드컵 끝으로 대표 은퇴 … ‘황새’ 컨디션 따라 한국 축구도 울고 웃어

  • <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 kisports@hanmail.net

한국 축구와 함께한 태극마크 16년

한국 축구와 함께한 태극마크 16년
‘황새’ 황선홍(35·가시와 레이솔)이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앞으로 일본 프로축구 가시와 레이솔 팀에서만 활약하다가 현역 생활을 마감하려는 것이다.

황선홍은 이번 월드컵에서 자신 때문에 포항제철의 팀 후배 이동국 선수가 23명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한 것에 약간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실력 있는 후배가 자신 때문에 월드컵이라는 중요한 무대를 밟지 못한 것에 미안한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스포츠 세계는 정글의 약육강식 생리와 비슷해 실력만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만, 그래도 후배의 앞길을 막는 것 같아 개운치가 않다.

아무튼 황선홍의 퇴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한국 축구의 변화를 의미한다. 황선홍은 1986년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후 부상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국가대표에서 제외된 적이 없다. 그가 없는 한국 축구의 공격진은 어딘가 허전했고, 실제로 좋은 성적을 올린 적이 거의 없다. 한국 축구는 최근 10여년간 황선홍의 컨디션에 따라 웃고 울었다.

한국 축구와 함께한 태극마크 16년
황선홍은 6월4일 폴란드전에서 터뜨린 결승골로 한국 축구 사상 처음 A매치 50골을 기록했다. 98경기 만에 50골을 터뜨린 것이다. 2경기에 한 골꼴이다. 날고 긴다는 선수들이 출전하는 국가대표팀간의 경기인 A매치에서 2경기당 한 골을 넣는다는 것은 세계 축구계에서도 보기 힘든 대기록이다. 물론 상대팀이 주로 아시아권 팀이었다는 약점은 있지만 국제축구연맹(FIFA)은 A매치 골의 경우 상대팀의 강약을 따지지 않는다.

황선홍은 이번 월드컵에 출전한 736명의 선수 중 아르헨티나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이번 대회 첫 경기 나이지리아전 포함 56골)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골을 넣었다. 한국 축구는 황선홍의 골로 이번 월드컵 폴란드전을 포함해 국제대회에서 최소한 20승 이상을 올렸다.



황선홍은 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는 한 경기 8골이라는 대기록도 세웠다. 이는 세계 축구계에 유례없는 대기록이다. 한 팀도 아닌 한 선수가 한 경기에서 8골을 넣었다는 것은 물론 상대팀이 약한 원인도 있겠지만 엄청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국내 프로축구에서는 8경기 연속 득점이라는 신기록도 세웠다. 선수가 나갈 때마다 득점을 올려주면 감독은 할 일이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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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은 일본 프로축구에서도 지난 99년 24골로 득점왕을 차지해 한국 선수로는 유일하게 해외 프로리그 득점왕 기록을 갖고 있다. 일본 프로축구는 배타성이 심해 외국 선수, 더구나 한국 선수에게 개인 타이틀을 내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득점왕에 등극한 것이다. 황선홍이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유럽이나 남미 일변도인 J리그가 한국 선수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되었다. 그만큼 황선홍이 한국 축구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그러나 황선홍도 지나간 세 차례의 월드컵을 기억할 때면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 축구 월드컵 도전사와 맞물려 황선홍에게는 월드컵에 관한 한 ‘슬픈 기억’만 남아 있는 것이다. 황선홍은 지난 10여년간 한국 축구의 간판 스트라이커로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정작 월드컵 무대에서는 번번이 불운을 겪어야 했고, 어느덧 축구선수로는 황혼기나 마찬가지인 3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한국 축구와 함께한 태극마크 16년
황선홍은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때는 연륜이 달려 주로 벤치에서 선배들이 뛰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태극마크를 달고 월드컵 무대를 밟았지만 고정운 황보관 최순호 정해원이라는 쟁쟁한 공격수들이 있어 주로 벤치를 지켜야 했다. 특히 최순호의 벽은 당시만 해도 난공불락이었다. 황선홍도 최순호 현 포항제철 감독이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 “최선배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골 마우스 앞에서의 위치 선정과 극도로 침착해야 한다는 기술 외적인 면을 배웠다”며 고마워했다. 황선홍은 이탈리아 월드컵 때 벤치에 앉아 한국이 벨기에(0대 2), 스페인(1대 3), 우루과이(0대 1)에 패하는 것을 보며 가슴을 쳤다.

한국 축구와 함께한 태극마크 16년
황선홍은 그로부터 4년 후인 94년 미국 월드컵 때는 팀의 주 공격수가 되어 세 경기에 모두 출전했다. 스페인과의 첫 경기에서는 정작 자신에게 돌아온 몇 차례 찬스를 놓치고, 홍명보 서정원이 골을 터뜨리는 것을 축하해 주기에 바빴다. 볼리비아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는 5~6차례 득점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만약 그중 한 번만 살려주었어도 한국 축구의 월드컵 첫 승은 그때 이뤄졌을 것이다. 그때부터 “황선홍은 큰 경기에 약하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황선홍은 독일과의 최종전에서 한 골을 뽑았지만 그 자신에게나 팬들에게나 모두 성에 차지 않는 성적이었다. 만약 황선홍이 미국 월드컵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의 절반만 발휘했어도 한국 축구의 ‘월드컵 1승’은 물론 ‘월드컵 16강’도 앞당겨졌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번 대회는 16강이 아니라 8강 또는 4강을 목표로 했을 것이다. 미국 월드컵이 끝난 후 축구 전문가들은 황선홍이 스페인전에서 1골, 볼리비아전에서 2골, 미국전에서 1골 등 모두 4골을 놓쳤다고 폄훼했다. 황선홍이 국내 프로축구 경기에서 보여주었던 볼 감각을 발휘해 주었다면 적어도 그 정도의 골은 넣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황선홍도 나중에 “뭔가에 씌인 듯 볼이 안 들어갔다”며 안타까워했다.

사실 황선홍의 전성기는 30대 초반이던 98년 프랑스 월드컵 때였다. 당시 황선홍은 체력적 기술적 정신적으로 절정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월드컵 때는 본선을 앞두고 치른 중국과의 친선경기에서 왼쪽 무릎을 다쳐 결국 한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한 채 초라하게 귀국해야 했다. 큰 대회에 약하거나 운이 따르지 않는 징크스가 이어진 것이다.

만약 황선홍이 98년 프랑스 월드컵 무대를 밟을 수만 있었다면 분명히 한국 축구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멕시코에 그렇게 허무하게 역전패하지 않았을 것이고, 네덜란드전에서도 이기지는 못했을망정 대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황선홍의 마지막 힘이 남아 있을 때 홈에서 월드컵을 맞이한 한국 축구는 어쩌면 행운이 따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간동아 340호 (p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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