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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무너지는 청와대

게이트마다 단골 … ‘사고뭉치’ 국정원

故 엄익준씨 보물 발굴 지원 핵심역할 제기 … 권력 주변 브로커와 한통속 충격

  •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게이트마다 단골 … ‘사고뭉치’ 국정원

게이트마다 단골 … ‘사고뭉치’ 국정원
죽은 자는 말이 없다?’ 2000년 5월 사망한 엄익준 전 국가정보원 2차장은 각종 대형 비리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최근 차정일 특별검사팀이 ‘이용호 게이트’를 재수사하는 과정에서 엄 전 차장이 몇 가지 비리사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죽은 자’에게 모든 것을 덮어씌운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엄익준씨와 관련된 의혹 가운데 핵심은 김대중 대통령 처조카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의 보물 발굴사업을 ‘지원’해 준 혐의. 사실이라면 국정원이라는 국가기관이 민간인인 대통령 친인척의 ‘민원’ 해결에 동원된 셈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김 전 대통령 차남 현철씨가 안기부를 ‘농단’했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다. 엄 전 차장은 또 ‘수지 김 살해사건’ 은폐와 ‘진승현 게이트’에도 관련됐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형택씨의 보물 발굴사업과 관련, 현재까지 확인된 내용은 △99년 말 전남 진도 앞바다에 매장돼 있다는 보물을 발굴하기 위해 이씨가 이기호 대통령 경제수석에게 부탁하고 △이수석은 엄익준 당시 국정원 2차장에게 협조를 구했으며 △엄차장은 해군과 해경에 보물 인양 협조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민간인의 사업을 도와주라는 국정원의 부탁에 대해 해군은 협조를 거부했으나, 해경은 특수기동대원 5명을 동원했다.

이에 따라 당시 엄익준 2차장-김은성 대공정책실장-김형윤 경제과장-정성홍 경제팀장 라인이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엄차장이 사망 직전 사표를 내면서 김은성 실장이 2차장으로 승진한 것을 비롯해 김형윤 과장→경제단장, 정성홍 팀장→경제과장 등 모두 한 단계씩 올라섰다. 이 가운데 ‘정현준 게이트’에 개입돼 구속된 김형윤씨는 이용호씨의 광주상고 선배인 데다 평소 이용호씨와 자주 어울린 것으로 드러나 그가 보물 발굴사업을 이용호씨에게 연결해 준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그러나 김형윤씨 변호인은 “김 전 단장은 특검에서 보물 발굴사업과 관련한 오해를 푼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문제는 국정원 전 경제과장 정성홍씨의 역할. 지난해 말 ‘진승현 게이트’에 관련돼 구속된 정성홍씨는 지난해 초 국정원 감찰실에서 자신의 ‘진승현 게이트’ 관련 혐의에 대해 감찰 조사를 벌이자 공개적인 자리에서 “나는 보물선 사업 등 특수 임무를 열심히 해왔는데, 왜 나 같은 사람을 건드리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이트마다 단골 … ‘사고뭉치’ 국정원


정성홍씨의 이런 발언이 감찰 조사를 무마하기 위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가 이형택씨의 보물사업과 관련된 것인지 현재로선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후자라면 국정원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더 ‘조직적으로’ 이형택씨의 보물 발굴사업에 개입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김은성씨가 엄익준씨로부터 보물 발굴사업을 인계받아 이를 자신의 ‘심복’인 정성홍씨에게 은밀히 추진하도록 지시했다는 가정이 성립하기 때문.

물론 현재까지는 김은성씨가 보물 발굴사업에 개입했다는 단서는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김은성씨가 ‘진승현 게이트’에 발을 딛게 된 과정을 보면 엄익준씨가 김은성씨에게 보물 발굴사업도 인계해 주었을 수 있다는 얘기가 국정원내에서 나오고 있다.

국정원 일각에서는 김은성씨가 ‘진승현 게이트’에 개입한 계기는 엄익준씨로부터 인계받은 내용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엄씨가 2000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진승현씨를 통해 여야 의원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후 이런 내용을 김은성씨에게 전하면서 진승현씨의 ‘보호’를 부탁하지 않았겠느냐는 추론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에 대해 엄씨를 잘 아는 국정원 직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엄씨는 과거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국정원 내에서도 주시 대상이 됐기 때문에 상당히 엄격한 자기 관리를 한 사람인데, 엄씨가 모든 비리 의혹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희생양 만들기’ 성격이 강하다는 것. 국정원의 한 간부는 “90년 충북지부장 시절 충북 진천·음성 보궐선거에서 무소속 허탁 후보가 여당 후보를 이기고 당선되자 국정원 내부에서 엄씨를 ‘문책’하려고 나름대로 뒷조사했으나 꼬투리를 잡지 못해 연구원으로 발령낸 사실이 있다”면서 “그가 각종 비리에 개입되었다 해도 이를 주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로선 어느 쪽 얘기가 실체적 진실에 가까운지 확인할 수 없다. 국정원 조직의 특성상 엄익준씨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아 각종 비리에 개입한 직원이 ‘양심선언’을 하지 않는 한 진실이 드러날 수 없기 때문. 차정일 특별수사팀의 수사 진행 상황에 따라 일부 진실은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엄씨의 사임 이후 2차장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인 김은성씨와 전 대공수사국장 김승일씨가 모두 사법처리됐다는 점이다. 김승일씨는 2000년 2월 엄익준씨 지시를 받고 경찰의 ‘수지 김 살해사건’ 수사를 중단시킨 혐의로 지난해 말 검찰에 구속됐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66년 중앙정보부에 입사한 엄씨는 호남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40대에 충북지부장을 역임하는 등 능력을 인정받았다. 개인 능력 못지않게 출신 지역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던 국내 정치 파트보다는 주로 대북전략 파트에서 일한 것이 그에게는 ‘행운’으로 작용했다고 국정원 관계자는 말한다.

97년 대선은 엄 전 차장에게 큰 고비였다. 정권교체로 국정원에 대대적 물갈이가 예고되었기 때문. 당시 3차장이었던 그는 이종찬 초대 국정원장-신건 2차장이 취임하면서 국정원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는 99년 5월 개각에서 이종찬 원장 후임으로 천용택 국방장관이 임명되면서 2차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천용택 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1, 2차장은 자신이 알아서 임명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양해를 구한 다음 엄익준씨를 추천한 것으로 안다”면서 “천원장이 엄씨를 2차장에 추천한 것은 97년 대선 당시 뭔가 ‘교감’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국정원 사정에 정통한 인사들은 국정원 사람들이 각종 게이트에 개입해 물의를 빚게 된 것은 임동원 전 국정원장(99년 12월~2001년 3월)의 업무 스타일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임원장은 취임 직후부터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주력했고 마침내 이를 성사시켰다. 소식통에 따르면 임원장은 대북문제는 꼼꼼히 챙겼으나 국내 분야는 2차장 중심으로 운영했다고 한다. 엄익준 차장이 이형택씨의 부탁을 들어주고, 엄차장이 간암으로 사직한 후 후임자가 된 김은성씨가 진승현씨와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소식통은 말한다.

국정원 게이트는 곧 국정원 국내파트 게이트다. 이러한 국정원 게이트는 국정원 개조론을 촉발하는 실마리가 되고 있다. 국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국정원 국내파트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거나 사정의 칼날을 받게 되면, 해외와 대북 분야까지 얼어붙으니 차제에 국정원을 국내 정보기관과 해외 및 대북 정보기관 둘로 나누자는 것이 개조론의 골자다. 국정원 개조론자들은 미국의 FBI와 CIA처럼 국정원을 국내-국외(북한 포함) 정보기관으로 나눠 상호 견제시키는 것이 국가정보기관을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국정원 전직 고위간부가 각종 게이트에 개입한 의혹이 일면서 국정원의 위상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한 간부는 “전직 고위간부의 게이트 개입 의혹도 의혹이지만 현직 직원이 ‘윤태식 게이트’와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은 후 미국으로 도피한 사실이 곧바로 언론에 새나가는 등 보안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면서 “정권 말기 ‘줄대기’가 이미 시작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이형택씨의 보물 발굴사업 개입에서 보듯 국정원이 여전히 권력 주변 인사의 민원이나 청탁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는 점. 국정원 관계자들은 “국정원은 이형택씨 등 친인척 주변에 브로커들이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역할도 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들과 한통속이 됐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다. 정권교체 직후 대기발령을 받자 김대중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의원에게 부탁해 구제받은 정성홍 전 경제과장의 경우에서 보듯 정권 실세들의 인사 개입까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현상은 국정원 요직을 특정지역 출신들이 장악함으로써 권력기관간 ‘견제와 균형’ 기능을 상실한 데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김대중 정부는 정권교체 직후 ‘정치공작’으로 얼룩진 국가안전기획부를 국가정보원으로 개칭하고, 모토도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에서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꾸는 등 국정원 쇄신작업을 펼쳤다. 그러나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각종 게이트를 볼 때 ‘눈 가리고 아웅’식이었음이 드러난 셈이다. 이와 관련, 한 간부는 “국정원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시대에 맞게 기능과 역할을 재조정하는 게 진정한 개혁이었음에도 주요 보직을 영남 출신에서 호남 출신으로 바꾸기만 한 데서 개혁의 실패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고 말했다.



주간동아 321호 (p20~21)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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