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5

2001.12.27

베트남, 26년 만에 가진 ‘적과의 동침’

미국과 무역협정 체결 수출·외자 유치 청신호 … 문화적 충돌 등 부작용 우려 시각도

  • < 이강우 통신원 / 하노이 > lkwvn@yahoo.co.kr

    입력2004-12-14 14: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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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26년 만에 가진 ‘적과의 동침’
    지난 12월4일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쟁을 치른 적대국이던 미국과 베트남 간의 역사가 새로 쓰인 날이었다. 이날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주석이 미-베트남 무역협정 비준서에 서명함으로써 지난해 7월 양국 정부간 체결되었던 무역협정이 드디어 결실을 본 것이다.

    베트남은 이미 1986년 개방·개혁을 선언한 이후 연간 7%대의 GDP 성장률을 유지하며 안정적 성장가도를 달려왔으나, 98년부터는 세계경제 불황의 여파로 성장률이 4%대로 떨어졌고 물가지수도 마이너스를 나타내는 등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세계 최대 소비시장인 미국과 무역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베트남은 제2의 도약을 맞게 되었다. 외국 언론들은 베트남의 진정한 대외개방은 지금부터라며 미국과의 무역협정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 역시 시장개방 일정에 따라 관련분야의 법률과 규정을 포괄적으로 정비하고 거대자본 침투에 대비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관세 줄어 대미수출 2배 이상 늘 듯

    베트남, 26년 만에 가진 ‘적과의 동침’
    베트남에서는 최근 미국과의 무역협정을 어떻게 볼 것인지의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대체로 베트남이 세계경제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무역협정이 필연적이며 그 시기는 이르면 이를수록 유리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무역협정의 긍정적 측면보다 부정적 측면에 주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베트남 전쟁을 남-북 베트남 간의 내전이 아닌 베트남 민족에 대한 미국의 침략전쟁으로 이해하고 있는 베트남 국민은 무역협정으로 인한 경제 교류가 새로운 형태의 속박을 낳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미국시장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다양한 소비계층으로 베트남의 저가상품에 대한 수요가 확고하다. 그러나 그동안 30~40%의 수입관세 부과로 베트남이 갖고 있던 가격경쟁력을 살리지 못한 베트남 상품들도 이번 무역협정 발효로 수입관세가 3~4%로 줄면서 본래의 경쟁력을 되찾게 되었다. 베트남 수출상품은 대부분 낮은 임금을 이용한 노동집약적 제품으로 의류, 신발, 농수산물, 수공예품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협정 발효 즉시 대미수출량이 2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노이 인근에서 실내장식재를 생산하는 한 기업인은 “무역협정 발효 이후 미국으로부터 과거보다 3배 이상의 주문이 밀려들고 있다”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이 기업인은 앞으로 미국과의 직항노선이 열리면 물류비용까지 크게 줄어들 것으로 기대했다.



    이렇게 베트남에서 생산되는 상품의 수출이 급증하면서 세계경제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 대한 외국인 투자는 급격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지금까지 33억 달러를 투자하여 투자 4위국이 된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제조업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베트남 총 수출액의 10%를 차지하고 있다. 때문에 베트남의 대미수출 증가는 베트남 내 한국 기업의 생산·수출을 증가시켜 한국의 대 베트남 원부자재 수출도 덩달아 증가하게 된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하노이사무소 정원준 과장은 “베트남도 그동안 정상적 무역관계(NTR)를 적용받던 중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 이번 무역협정의 의미”라고 진단했다. 게다가 인건비를 기초로 한 가격경쟁력은 베트남이 오히려 우위에 있다는 분석이다. 1인당 인건비를 100으로 보았을 때 여기에 드는 각종 복지혜택 등 부대비용이 중국이 80이라면 베트남은 23에 불과하다는 것. 이 때문에 한국 기업들의 베트남 투자 관련 문의도 최근 크게 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베트남 시장이 단계적으로 개방되어 미국의 선진기술과 경영 노하우에 접근할 수 있어 베트남 기업들도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얼마 전 베트남을 방문한 마이크 무어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은 2년 내에 베트남의 WTO 가입을 전망하기도 했다. 베트남 주재 세계은행(World Bank) 대표는 베트남 인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베트남 무역협정 발효 즉시 베트남 수출이 10억 달러 이상 늘어나고, 앞으로 몇 년 동안 최대 1000억 달러의 파급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베트남, 26년 만에 가진 ‘적과의 동침’
    한편 무역협정이 발효되면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도 있다. 당장 경제적으로 베트남은 금융, 보험, 교육, 서비스 등 전 분야에 걸친 개방과 함께 모든 관련법규를 선진국 형태로 조속히 개정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특히 베트남이 우려하는 것은 농업사회적 전통을 가진 베트남 국민이 계약 위주 산업사회인 미국문화와의 마찰을 어떻게 견뎌낼 것이냐 하는 문제다. 현재 베트남 내 외국인투자 기업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노사분규도 농업에 익숙한 베트남 노동자들이 현대 산업사회의 노동강도와 엄격한 규율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베트남 학자들은 “베트남을 먹여 살려온 농업은 적절한 강우량과 햇빛 등의 자연조건이 1년 내내 변함없기 때문에, 오늘 하다가 못하면 내일 하고 다른 일이 있으면 또 그 다음날로 미루어도 무방하지만 산업사회에서의 노동은 정확한 기일까지 일정한 상품을 선적해야 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베트남에 투자하는 많은 외국인 투자가들은 값싼 임금만 보고 들어왔다가 무조건 노동자들만 우대하는 사회주의 베트남의 풍토 속에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수익 위주의 경영에만 익숙한 미국 기업들이 이러한 마찰에 직면할 경우, 상황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새로운 양상이 전개될 가능성도 있다.

    또한 미국의 선진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베트남 기업들의 구조조정도 빠르게 이뤄져야 한다. 사회주의 베트남은 국영기업이 국내총생산의 40% 이상, 수출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등 국가경제를 사실상 지탱하고 있다. 이러한 국영기업들은 경영효율성 증대를 통한 수익 창출과 동시에 실업문제 해결의 짐도 함께 지고 있다. 역사적으로베트남 전역을 무대로 30년 동안 벌어진 독립과 통일 전쟁은 수백만명의 베트남 국민을 희생시켰다. 따라서 베트남 정부는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모든 베트남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경제 도약을 위해 국민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국민적 반발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미국 기업들이 베트남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베트남 기업들이 점차 퇴출되고 실업자들이 속출하면 베트남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질 것이다.

    미-베트남 무역협정은 이러한 베트남의 변화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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