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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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노갑 ” 차라리 꿈이었으면”

쇄신정국 충격의 10일 … 은퇴 요구에 분노 동교동 분열 허탈 DJ 총재 사퇴에 비탄

  • < 김시관 기자 > sk21@ donga.com

    입력2004-11-22 16: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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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노갑 ” 차라리 꿈이었으면”
    “70을 넘긴 나이에 무슨 욕심이 있겠느냐. 그저 대통령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산 사람 아니냐. 그런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고 정계은퇴를 요구했으니…. 오죽했겠느냐.”

    민주당 권노갑 전 최고위원이 보낸 쇄신정국 10일은 냉온탕을 오가는 극심한 감정의 변화 그 자체로 얼룩졌다고 동교동 한 관계자는 전한다. 분노와 허탈감 그리고 체념, 그 뒤를 다시 분노가 뒤따랐다. 결벽증에 가까운 그의 섬세한 감정이 쇄신파의 공격에 격렬하게 반응했음을 이 측근은 숨기지 않았다.

    11월9일 공개할 예정이던 그의 기자회견문에는 분노로 일그러진 그의 속내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소장파가 증권가 루머에 나오는 얘기로 나를 국정농단의 주범으로 모는 처사에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중략). 나는 내 가족과 정치 동지들에게 한점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쇄신파와 언론, 여론의 십자포화 속에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것이라는 측근들의 만류에 권 전 위원은 회견문을 가슴에 묻고 돌아섰지만 마음속 분노까지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다.

    10월31일, 소장파로부터 정계은퇴를 요구받은 그날 권 전 위원이 보인 첫번째 반응은 침묵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시달린 전력도 있고 10·25 재·보선 참패 직후 소장파의 거사 기운을 사전에 감지해 일정부분 감정정리를 끝냈다는 것.



    11월1일 오후 권 전 위원은 ‘동교동은 하나’라는 신화가 무너지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이윤수 안동선 의원 등 동교동 식구들이 “더 이상 동교동 안 한다”며 동교동을 부정하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 동교동 분화에 대해 남다른 회한에 시달렸다는 것이 옆에서 지켜본 한 측근 인사의 전언이다.

    다음날부터 권 전 위원의 감정은 가파른 상승선으로 이어졌다. 동지로 알고 있던 인사들이 쇄신파와 한배를 탄 흔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화갑 고문의 언행이 특히 권 전 위원 주변의 분위기를 거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한 측근이 전한 권 전 위원의 당시 멘트. “그때(9월4일 외국에서 돌아와 한화갑 김옥두와 함께 만난 날) 맏형으로 큰 역할을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제안했다. 자네들(한화갑 김옥두 의원)은 동지요 동생이다. 당 대표를 해라. 당을 이끌어 봐라. 그러나 후보는 안 된다. 가신 출신으로, 호남 출신으로… 어렵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 마음 그대로다. 그것에 마음이 상했다면, 그것을 수용할 수 없었다면 미안하다. 지금 와서 내가 무얼 어떻게 하겠느냐.”

    권노갑 ” 차라리 꿈이었으면”
    치열한 권력싸움 와중에 터져나온 권 전 위원의 한가롭기까지 한 과거 회상이다. 과연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

    “동교동 분열과 양갑의 결별을 현실로 인식하고 측근들에게 통보한 것 아니겠는가.” 권 전 위원의 핵심 측근이 헤아린 뉘앙스는 한마디로 ‘양갑’의 결별이다.

    쇄신정국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쇄신파에 대한 권 전 위원의 감정은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특히 느닷없이 터진 외유설은 애써 감정을 절제하고 있던 권 전 위원에게 분노의 폭풍을 몰고 왔다.

    권 전 위원은 직접 유력 신문사와 방송사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외유설을 부인할 만큼 자기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기자회견을 준비하기 위한 측근들과의 모임(7일)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측근이 대신 토한 울분에는 쇄신파에 대한 극도의 반감이 묻어 있다. “자기들(대선주자)은 한 달에 2000만~3000만원씩 들어가는 대선캠프 만들어 세몰이하면서 마포 사무실마저 폐쇄하라고 한다. 도대체 말이 되는가.”

    극단적 방법론이 동교동 주변을 감싼 것도 이 시점이다. 지난해 총선 때 공천 로비를 한 사람, 새 정부 출범 이후 장관자리를 달라고 매달린 사람, 정치자금을 요구한 사람 등을 공개하는 방안까지 거론됐다. 권 전 위원을 공격하는 세력의 이중적 행태를 공개하자는 네거티브 전략론이 부상한 것. 권 전 위원의 한 측근의 설명이다. “아니할말로, 말 안 해도 누가 자리를 요구했는지, 또 어떤 사람이 돈을 요구했는지… 다 아는 사실 아니냐. 그렇지만 권 전 위원이 그것(공개)을 하자고 한들 할 사람이냐.”

    감정이 격해진 권 전 위원에게 또 다른 빅뉴스가 전달됐다.

    김대통령의 당 총재직 사퇴 입장이 흘러나왔다.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길 바랐는데… 이렇게까지 되다니. 모든 게 내 잘못이야….”

    권 전 위원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70 노정객의 눈물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9일, 권 전 위원이 기자들 앞에서 다시 눈물을 보였다. 이날 눈물은 김대통령의 총재직 사퇴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교동계가 뿔뿔이 흩어지고 권력투쟁 양상까지 보이자 김대통령이 상심하고 있다는 말이 전해져 왔다. 권 전 위원 마음이 어땠겠는가.”

    권 전 위원은 쇄신파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자회견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첫번째 예정했던 3일 회견은 분노보다 무욕(無慾)론이 주류였다. 누구를 원망하기보다 “이 나이에 무슨 욕심이 있겠느냐”는 내용이 주류였다고 한 측근은 설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9일, 회견 내용은 매우 공세적 내용으로 채워졌다. △이인제 상임고문을 지원하는 이유 △각종 의혹 사건에 대한 입장 △마포 사무실 폐쇄 문제 △외유 문제 △쇄신파에 대한 반박 △향후 정치 계획 등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밝힐 예정이었다. 대통령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고 고집해 온 그림자 행보에서 벗어나 직접 명예회복에 나서겠다는 의지가 넘쳐 흘렀다. 그러나 권 전 위원은 끝내 이 기자회견을 갖지 못했다.

    권노갑 ” 차라리 꿈이었으면”
    쇄신파동을 거친 권 전 위원의 처지는 다소 처량해 보인다. 동교동은 여전히 해체 대상 신세고 울타리(DJ)마저 허물어졌다. 계파는 내부 갈등을 겪는 데다 박지원 수석마저 사퇴함으로써 청와대 내 교두보도 사라졌다. 막막한 사면초가의 상황이다.

    그렇지만 권 전 위원은 전의를 잃지 않고 있다. 기자회견에서 밝히려던 그의 향후 플랜에는 “난파 위기에 처한 민주당을 재도약시켜 정권재창출에 백의종군하겠다”는 내용이 있다. 아직 정치적 역할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 말로 보인다. 역설적이지만 김대통령의 용퇴는 권 전 위원에게 오히려 활로를 열어준 측면도 없지 않다. 마포 사무실을 폐쇄하거나 외유를 떠난다고 발표하지 않아도 총재직 사퇴와 박지원 수석의 사퇴로 쇄신파가 그에 대한 공격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권 전 위원은 요즘 시간만 있으면 골프장을 찾는다. 9일에는 원외위원장 8명과 함께 뉴서울 CC에서 라운딩을 했다. 10일에도 원내외 인사들이 위로 골프 모임에 그를 초청했다. 11일에는 천용택 박광태 의원과 함께 골프장을 찾았다. 한 측근은 “울분을 달래기 위한 억지 운동 아니겠느냐”고 한다. 그러나 그의 골프가 ‘억지 운동’인지, 다음 행보를 위한 숨 고르기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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