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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 뒤덮은 스위스인의 한숨

의사당 총격 살인사건, 스위스에어 파산으로 연쇄 충격 … 동화나라 이미지 ‘와르르’

  • < 최재덕/ 유럽정보문화센터 전문연구원 > sahara2@orgio.net

알프스 뒤덮은 스위스인의 한숨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순박한 사람들, 푸른 초원과 흰 봉우리의 숨막힐 듯 아름다운 자연. ‘세계인의 이상향’이라는 스위스가 흔들리고 있다. 테러로 상처를 입은 미국이 수많은 국가로부터 위로와 지지를 받는 동안 스위스인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치유하느라 정신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위스 은행에 보관된 ‘검은 비밀자금’으로 인해 알프스 골짜기의 순진한 농부들이 받은 모욕감은 지난 9월 발생한 두 사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듯하다. 두 사건이란 지난 9월 발생한 추크주 의사당에서 일어난 총격 살인사건과 스위스에어 항공사의 파산. 국민들은 이제 스위스가 걸어온 사회적 발전방향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느끼고 있다.

총격사건이 일어난 추크주는 스위스에서 세금이 가장 낮은 주로 백만장자만 2000명이 넘는 풍요로운 고장이다. 이 사건은 평소 행정관리들에게 불만을 품은 버스 운전사 프리드리히 라이바허(57)가 감청색 현대자동차(!)를 몰고 의회건물 앞에 나타나 욕설과 함께 폭약과 총탄을 퍼부은 단순사건이다. 그러나 사건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얘기가 다르다.

공격받은 주 의사당 건물이 상징하는 지방자치제와 직접민주주의는 스위스 정치제도의 핵심이다. 3개월 동안 5만 명의 서명을 받으면 법률을 의회에 상정할 수 있고, 18개월 동안 10만명의 서명만 있으면 헌법개정까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스위스의 정치 의사결정 시스템이다. 주 의회에는 출입감시원이 없어 시민들은 신분증 제시나 소지품 검사 등의 제한 없이 회의과정을 참관할 수 있다.

스위스 경찰은 일반 가정에서 보유하고 있는 소총이 대략 45만정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강력한 예비군제도 아래에서 병역의무가 있는 모든 국민은 자신의 집에 탄약과 무기를 함께 소지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즉 14명의 정치인이 사망한 이 사건에는 ‘국민 개개인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스위스의 예비군제도도 한몫 하고 있다.

선혈이 낭자한 의사당을 바라보며 국민들이 느끼는 혼란은 상상 이상이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대다수 주민들은 “우리는 그간 스위스를 평화의 오아시스로 생각해 왔고, 뉴욕에서 일어난 테러사건이 스위스에서도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반응이다. 국회의장인 페터 헤스는 “이번 사건은 단순히 피살자들에 대한 공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와 국민 신뢰의 원칙에 대한 공격이다”고 말했다. 그동안 스위스 국민은 지방자치제도와 직접민주주의제도로 세계 어느 국가 국민보다 더 적극적으로 정치과정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 체제는 제대로 기능하기 어렵게 됐다. 관공서 건물에 대한 출입 통제, 정치인의 경호원 대동 등은 이제 스위스에서도 자연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무기소지에 대한 법률 역시 도마에 올랐다.



한편 며칠 뒤 불거진 스위스에어 항공사 사태는 경제에 또 다른 일격을 가했다. 스위스에어 항공은 다른 국가의 국적항공사와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기업 규모는 작지만 아름답고 우아한 이미지를 가진 이 회사는 에멘탈 치즈만큼이나 스위스를 상징하는 기호의 하나였다. 스위스의 유력 일간지 ‘블릭’지는 “이 무슨 망신인가!”라는 표제로 관련 기사를 다루면서 “성실성, 안목, 신용 등 스위스가 자랑하던 모든 장점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됐다”고 단정적으로 표현했다.

국민들의 불만은 UBS(스위스연방은행) 등 대형 은행들이 스위스에어를 구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더욱 심각해졌다. 스위스에어가 노린 마지막 승부수는 수익성을 갖춘 자회사 크로스에어에 대부분 지역에 대한 운항권을 이전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스위스에어라는 간판과 스위스인의 긍지라는 비행기 위의 붉은 십자가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은행들 역시 수백만 스위스프랑에 이르는 긴급 수혈주사를 당초 약속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정유회사들의 급유 중단에 따라 운항이 정지된 이틀 동안 UBS와 크레디스위스 은행은 ‘결제권자와 업무연락이 닿지 않아’ 긴급자금을 제공하지 못하는 웃지 못할 실수를 범했다. 곧이어 “스위스에어가 뉴욕 테러사건의 첫번째 간접 희생자가 됐다”는 뉴스가 전 세계에 보도됐다.

두 은행의 업무처리에 분노한 고객들 사이에선 UBS와 크레디스위스의 거래계좌를 폐쇄하고 다른 은행으로 예금을 전환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이러한 반응은 해당은행의 영업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차원을 넘어 자국 내 금융시스템 전체에 대한 외국인 고객들의 신뢰 상실로 이어질 것으로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부의 반응 역시 혹독했다. 모리츠 로이엔베르거 연방 대통령은 “정부의 모든 권고를 항상 간섭이라 비난한 재계가 이번 혼란사태로 국가 전체의 이미지를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고 차갑게 논평했다.

스위스에어의 파산은 단순히 한 항공사의 도산이 아니라 스위스 경제체제에 대한 국민 신뢰의 붕괴를 일으켰다. 많은 시민들은 “만일 스위스 은행들이 1만개가 넘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스위스에어를 파산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이는 파렴치한 범죄”라는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다. 관계자들은 스위스에어를 대신할 새로운 국적항공사를 11월 초까지 설립하겠다고 말하지만 누구도 이 일정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상태다. 지난 10월14일 91세의 억만장자 발터 해프너가 새 항공사를 위해 2억 스위스프랑을 제공하겠다고 나서 주목받았지만 국민들의 상처 입은 신뢰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스위스는 정치·경제적 역학관계와 살벌한 파워게임이 몰아치는 유럽에서 섬처럼 독자적인 위치를 구가해 왔다. 부러움과 동시에 비웃음의 대상이었지만 지난 수백년간 스위스 사회는 뭔가 다른 규칙에 의해 질서를 유지하는 듯 보인 게 사실이다. 많은 유럽인들이 “이제야 스위스가 현대라는 시대에 진입한 듯하다”는 소감을 나타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총기난동과 항공사 파산이 같은 원인으로 촉발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스위스 시계’로 상징되는 확실성, 정확성, 철저함의 이미지는 하루아침에 무너졌고 이들은 자신들이 지켜온 원칙에 대해 진지하게 회의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국민들은 스위스가 더 이상 ‘동화의 나라’로 남아 있기 어려우리라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다.

당초 스위스에어의 파산은 외국항공사를 인수해 사업을 확장하려던 무리한 시도가 원인이었다. 결국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렇다고 양을 키우며 깊은 산골짜기에 묻혀 살던 19세기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이들은 알프스 봉우리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세계화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바라보며 자국의 정치·경제 체제가 시대의 요청에 적합한 것인지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장 이들은 유럽 대륙의 한복판에서 홀로 유지하고 있는 ‘유로화 비사용국’의 이름표를 떼어내야 좋을지를 결정하는 문제부터 고민하게 될 듯하다.



주간동아 2001.11.15 309호 (p54~55)

< 최재덕/ 유럽정보문화센터 전문연구원 > sahara2@orgi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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