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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세계의 정보기관 ⑤ 미국 CIA

지구촌 정보 틀어쥔 ‘비밀공작’ 본산

냉전시대에 탄생 후 세계 곳곳 분쟁 개입 … 미 본토 테러 감지 못해 명성에 흠집

  • < 정리·김 당 기자 / 자료제공·국가정보연구회 > dangk@donga.com

지구촌 정보 틀어쥔 ‘비밀공작’ 본산

지구촌 정보 틀어쥔 ‘비밀공작’ 본산
테러리스트들의 미 본토 공격이라는 최악의 참사를 당한 미국의 상원 정보위는 최근 중앙정보국(CIA), 연방수사국(FBI) 등 정보·수사기관이 이번 테러사건을 왜 예견하지 못했는지를 가리기 위한 청문회를 곧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미 언론도 뉴욕과 워싱턴에서 동시다발 연쇄테러를 일으킨 범인들이 미국에서 항공학교를 다니는 등 수년 간 범행을 준비해 온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구멍뚫린 미국의 허술한 정보·보안망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이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은 이번 최악의 참사를 당하고서도 총론적으로 정권을 비판하는 것보다 각 정보·보안기관에 더 책임을 묻고 있다. 사건 발생 1주일 만에 CNN 방송과 USA 투데이지(紙)가 갤럽에 의뢰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연방항공청(FAA) 78% △CIA 59% △FBI 52% 순서로 책임 소재를 지적했다. 항공기 납치가 대참사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연방항공청에 1차적 책임을 지운 것이다. 또 응답자들은 이번 테러가 2∼5년 간 준비한 결과라는 점에서 부시(34%)보다는 클린턴(45%) 쪽에 더 많은 책임을 지웠다.

그러나 정보·보안기관에 대한 책임론을 곧바로 제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치인들은 CIA 권한 강화론을 제기한다. 상원 정보위 리처드 셸비 의원(공화·앨라배마)은 한 인터뷰에서 “테러에 대한 전쟁에서 적을 공습목표로 삼는 것과 암살단을 이용해 살해를 시도하는 것은 별 차이가 없다. 외국의 적을 암살하고 비밀 공작원을 고용할 수 있도록 더 자유로운 재량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제임스 울시 전 CIA 국장도 “부시 행정부가 정보기관활동에 일대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고 전했으며 포드 행정부에서 CIA 국장을 지낸 조지 부시 전 대통령도 “규제를 걷어내고 정보기관의 자율성을 높이는 방안이 절실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포드 대통령 시절인 1970년대 중반 의회 청문회에서 CIA가 쿠바의 국가원수인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암살을 기도한 사실이 밝혀진 것을 계기로 대통령 행정명령으로 금지한 이른바 ‘더러운 전쟁’(암살공작)을 25년 만에 공식적으로 재개할 태세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스와 CBS 방송이 공동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5%가 CIA의 외국 테러리스트 암살공작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러운 전쟁’을 수행할 만반의 준비태세를 다진 CIA에서 일하길 희망하는 지원자도 쇄도하고 있다.

지구촌 정보 틀어쥔 ‘비밀공작’ 본산
뉴욕포스트지(9월19일자)에 따르면, 테러사건 이전엔 1주일 평균 600명 정도의 지원자가 CIA의 문을 두드렸으나, 그 후 1주일 간 몰린 지원자는 3000여 명에 달한다는 것. CIA측에 따르면 정보분석가나 컴퓨터 전문가 외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비밀공작 스파이로 일하길 원하는 지원자도 이전보다 배로 늘었다는 것이다. 또 지원자 중 상당수는 아랍어나 이슬람권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CIA 지원자가 급격히 늘어난 것은 물론 테러참사로 인해 고취된 미국인의‘애국주의 물결’ 때문이다.



미국 언론들은 테러리스트가 뉴욕과 워싱턴을 공격했을 때 처음 ‘America under attack’이라는 제목과 함께 ‘진주만의 악몽’을 떠올렸다. 과거의 일이지만 당시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은 미국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국가정보의 원활하고 적절한 평가·보고체계가 국가안보에 얼마나 사활적 역할을 하는지 미국 정부가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1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기 전 이미 미국은 상당한 수준의 암호해독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암호전문을 해독함으로써 일본측 기습계획을 사전에 파악하였지만, 일본군이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을 기습 공격할 것인지는 파악하지 못하였다. 미국측 정보부서가 마지막으로 입수한 일본군 암호전문은 1941년 12월7일 이른 시각 워싱턴에 접수되었는데, 전문 내용은 기습공격을 그날 오후 1시에 시작한다고만 했을 뿐 어느 지역인지 명기하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일본군의 기습 목표가 필리핀이나 동남아일 것이라 예측하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정보가 정작 하와이 주둔 미군에게는 적절한 시각에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관료주의의 병폐와 통신기술상의 제약 등 여러 가지 배경이 작용한 결과였지만, 아무튼 미국의 정보 역사상 최악의 실패 사례로 기록된 이 사건은 전후 CIA 설립을 주장한 사람에게 중요한 논거가 되었다. CIA의 탄생 배경에는 정보활동의 체계화를 통해 다시는 진주만 사건 같은 치욕을 겪지 않겠다는 의지가 배었던 것이다.

CIA의 전신은 제2차 세계대전중 창설한 합참 산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다. 그러나 전시 비밀공작과 비정규전, 조사 및 분석을 임무로 한 OSS 활동은 일본이 항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를 지시한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 OSS가 맡은 정보수집 기능은 전쟁부 및 육군으로, 조사·분석 기능은 국무부로 이관되었다. 비밀공작 활동은 전면 중단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행정부 내 여러 당사자의 불만을 샀다. 또 정보담당 부서 사이에 충분히 조율하지도, 제대로 분석하지도 않은 정보보고가 대통령에까지 올라가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국가안보를 위한 정보체계를 확립해야 할 필요성은 점점 커졌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에 1946년 1월 CIG (Central Intelligence Group) 신설을 지시했다. CIG는 국무부·전쟁부·해군의 최고 수뇌들로 구성된 CIA(Central Intelligence Authority)의 지휘를 받아 국가정보 활동의 통합·조정 기능을 맡았다. 그리고 CIG는 1947년 미 의회에서 국가안전보장법(National Security Act)이 통과되면서 오늘날의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로써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법률적 근거를 가진 국가정보기관으로 탄생한 CIA는 1949년 중앙정보국법(Central Intelligence Agency Act)에 의해 더욱 확고한 법적 기반을 갖게 되고 이른바 NIEs(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s)의 생산을 시작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훗날 회고록에서 CIA를 탄생시킨 것을 후회했다. 트루먼은 자신이 구술한 자서전에서 “자유롭고 민주주의적인 정부와 CIA의 비밀주의는 조화하기 어렵다. CIA는 막대한 예산을 쓰면서도 비밀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른 채 감시와 통제 바깥에 있다”고 CIA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집권 시절 이미 CIA는 비밀공작 활동을 시작했고, 1952년 암호해독 및 개발을 전문으로 하는 NSA(National Security Agency)의 창설을 승인하기도 했다.

지구촌 정보 틀어쥔 ‘비밀공작’ 본산
CIA의 전체 규모는 구체적으로 드러난 적이 없지만, 예산과 관련한 한 비밀공작 활동의 빈도와 범위에 따라 해마다 상당한 변동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대에는 전체 정보예산의 상당 부분이 CIA 몫이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CIA는 니카라과, 앙골라,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대규모 비밀공작 활동 등 다수의 비밀공작을 벌였기 때문이다. 1986년 CIA 예산은 28억 달러 정도로 추산되었다. 1994년도 예산은 30억 달러, 직원 수는 1만5000명선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4000명에 달하는 계약직과 파트타임 근로자를 제외하고도 2만2000명선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CIA 본부는 워싱턴 D.C. 근교인 버지니아주 랭글리(Langley)의 포토맥 강가에 있으며, CIA 국장이 수장(首長)을 겸하는 DCI(Director of Central Intelligence)는 본부 7층 집무실 외에 백악관 옆 구행정건물에도 전용 사무실이 있다.

CIA 조직체계의 핵심은 관리부(DDA)·첩보부(DDI)·공작부(DDO)·과학기술부(DDS&T) 등 4개 부서다. DDA는 인력·예산·보안·의료 서비스·해외 병참지원 등 행정 및 관리를 맡는 부서다. CIA의 부서 중 최대 규모인 DDI는 정보를 분석하고 최종 생산해 내는 부서다. 1952년에 설립했으며 카터 행정부 시절 국가해외평가센터(NFAC)로 이름을 바꿨다가 훗날 윌리엄 케이시 국장이 원래 이름으로 환원했다. DDI는 무기통제 정보·수집 소요 및 평가·기획 및 관리·생산평가 등 4개 특수 스태프를 거느렸으며, 당면정보 생산·지구적 사안·영상분석·정보자원·리더십 분석·과학 및 무기연구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 및 전 세계를 5개 지역으로 나누어 담당하는 부서들을 배치했다. DDS&T는 기초 및 응용과학 연구 개발·기술정보 수집시스템의 설계 및 운용·과학기술 정보의 최종 생산 등을 담당한다. 이곳에는 연구개발·연구 엔지니어링·해외방송정보서비스·신호정보(SIGINT) 공작·기술 서비스·국립사진판독센터 등의 부서를 배치했다.

지구촌 정보 틀어쥔 ‘비밀공작’ 본산
공작부(DDO)는 비밀수집·방첩·비밀공작을 담당하는 공작부서다. CIA라고 하면 일반인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공작부지만, 인력과 배당하는 자원 면에서는 다른 부서보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편이다. 첩보기관으로서 CIA는 그동안 신비롭고 전지전능한 이미지를 쌓아왔고, 이는 외부인으로 하여금 실제로 CIA가 관여하지 않은 일까지 CIA의 탓으로 돌리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CIA 업무의 상당 부분은 공개자료 속에서 의미 있는 정보를 추려내는 단조롭고 지루한 일이다.

CIA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정보기관이 냉전 이래 수행해 온 비밀공작(Covert Operation)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사례가 알려졌다. CIA가 성공 예로 제시하는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의 반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자금 지원 및 마셜 플랜 막후 지원.

△소련 블록의 내부적 이완을 목표로 수행한 자유유럽 라디오(Radio Free Europe) 및 자유 라디오(Radio Liberty) 활동.

△냉전중 소련 블록에 서방세계의 서적 및 잡지를 밀반입함으로써 공산권 주민에게 서방문화 및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주입.

△라틴 아메리카에 소련 영향력이 침투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저지. 대표적 예로 1963~73년까지 칠레 내정에 개입해 사회주의자인 아옌데의 집권을 방해했고, 1970년 끝내 아옌데가 집권에 성공하자 1973년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를 지원해 성공.

△1954년 과테말라의 좌익 민선정부인 아르벤츠 정권을 전복한 아르마스 대령의 쿠데타 지원.

△1953년 이란에서 민족주의 정권인 모사데크 정권을 전복하고 권좌에서 축출당한 팔레비왕이 재집권하는 데 성공.

△1953년 필리핀에서 훅스(Huks) 게릴라 진압을 위해 막사이사이 집권을 지원.

△63년 베트남의 쿠데타를 이용해 고딘 디엠 암살. 또 베트남에서 베트공 조직 붕괴를 목표로 한 악명 높은 ‘피닉스 작전’을 수행했는데, 작전의 총책임자는 훗날 CIA 국장을 역임한 윌리엄 콜비.

△80년대 아프간 반군에 스팅어미사일 등 군사·경제적으로 지원하여 소련이 아프간 전쟁을 지속하는 데 대해 회의감이 들게 함.

그러나 이러한 성공 사례 뒤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실패 사례가 있다. 대표적 실패 사례가 61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제거할 목적으로 수행한 피그스만 공격이었다. 이 작전은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승인하고 케네디 행정부하에서 실행했는데, 1400명의 침공군 중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미국의 대외적 위신은 크게 실추했고, CIA에 대한 여론 또한 최악으로 떨어졌다. 피그스만에서 참사가 일어났는데도 CIA는 카스트로 정권 타도를 위한 비밀공작을 계속했다. 카스트로 암살 공작을 시도하는 한편‘몽구스(Mongoose) 작전’이란 공작명으로 전복공작을 전개했다.

이외에 CIA 실패 사례로는 58년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정권 전복기도, 아프리카의 앙골라 내전 개입 등이 있다. CIA는 해외에서 반공주의를 내건 반군세력을 지원한다면서 오히려 그들을 곤경에 몰아넣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심지어는 미-소 데탕트 기간중에도 대소 비밀공작 활동을 벌임으로써 냉전이 더 심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탈냉전이라는 새로운 상황은 국가안보 개념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냉전 시절의 전통적 국가안보 개념이 군사적 측면에 큰 비중을 두었다면, 탈냉전 이후에는 경제·기술·생태·사회 안보 등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했다. 냉전 종식과 함께 비밀공작의 빈도와 범위는 대폭 감소했다. 반면 방첩 부문은 탈냉전 이후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고, DCI는 여러 정보기관들이 연합해 기구를 새로 구성하는 방법으로 방첩, 대테러, 대마약, 비확산 등의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주간동아 2001.10.04 304호 (p102~104)

< 정리·김 당 기자 / 자료제공·국가정보연구회 > da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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