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2

2001.09.20

심해의 진미 입안에서 '살살'

  • 입력2004-12-22 15:0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심해의 진미 입안에서 '살살'
    올 여름에는 더워지기로 능성어회와 능성어 어죽을 먹은 게 아직도 입맛을 감미롭게 한다. 전라도에서는 능주(화순군 능주면)에서 서울까지 멱서리에 담아 날라도 죽지 않는 것이 능성어로 알려졌다. 낚시꾼이 얼음간에 채웠다가 수족관에 풀어놔도 살 수 있는 생선이 능성어다. 고흥·녹동·여수·나로도 등 남해안이 그 산지로 알려졌다.

    능성어는 회로도 먹지만 특히 어죽으로 먹는 여름 보양식이 그만이다. 필자가 사는 순천 시내에 자랑할 만한 음식이 없던 차에 모처럼 만난 친구를 따라간 곳이 능성어죽을 잘 끓인다는 금강회타운(061-724-2411·최치성)이었다. 얼음 같은 살은 발라 회로 먹고 뼈꼬시는 머리와 함께 확독에 갈아 죽을 끓인다. 고흥지방에서는 이른바 능생이죽이라고 하는데 여름 설사나 이질 배앓이 때는 특효약으로 먹던 어죽이다.

    능성어죽은 고소하고 쫀득거리며 담백하고 향기롭다.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어죽 중에는 최상으로 치는 죽이요, 값도 그만큼 비싸다. 1kg에 15만 원선 또는 18만 원선이라면 제주에 가서 먹을 수 있는 다금바리와 맞먹는다. 일식집에서는 40만 원을 호가한다.

    심해의 진미 입안에서 '살살'
    연향동 금당지구 금당고등학교 정문 통에 있는 금강회타운 최사장 말에 따르면 특별한 노하우로 끓이는 죽으로 먼저 쌀을 물에 불려 가루로 빻는다. 고명은 대추 녹각 황기 인삼 김 마늘 등인데 인삼은 열물이라 사전에 체질검증을 해서 넣거나 빼기도 한다. 또 어죽 대신 ‘미역 수제비’를 청해봄도 좋다.

    노하우 없이는 장사도 못한다는 것이 최사장의 철저한 철학이다. 그래서인지 짜고 싱겁고 맵게 먹는 단골 손님의 취향까지 일지에 기록으로 남긴다. 또 얼음 같은 횟살을 담는 그릇도 나무를 깎아 만든 배모양의 그릇인데 직접 디자인한 노하우가 담겨 있다. 여기에 영하 30℃로 냉각한 옥돌 위에 생선회를 얹어낸다. 술안주로 오래 먹게 신선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다. 아이들은 이 옥돌 몇 개를 빼내어 공깃돌 놀이를 하거나 기념품으로 가져가기도 한다. 고려대 농대를 나온 최사장은 “대구·부산 쪽 생선 선호도는 물메기나 가오리회 등인데 호남은 능성어를 먹어야 제대로 신토불이 맛을 느낄 수 있다”며 음식에서 다진 오랜 철학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것이 향토 미각에서 길들여진 맛의 차이점임은 물론이다. 또 같은 향수음식이라도 호남은 남도와 북도가 조미료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남도에서는 비린내 나는 생선은 방앗잎이나 조피향을 사용하는데 북도 사람은 이를 싫어한다. 어죽도 마찬가지다. 양반가의 마님은 20여 가지의 죽을 쑬 줄 알아야 하는 것이 반가(班家)의 전통이다.



    뼈꼬시는 한 시간 가량 끓여야 제맛이 나므로 독촉하지 않는 것이 단골 손님들의 매너로 어느새 정착되었다. 이것이 또한 한정식에 스민 맛과 멋의 정서기도 하다. 그만한 느긋함과 교양에서 다진 것이 붙박이 식탁의 기질이다. 이는 곧 냄비 기질이 아닌 뚝배기 기질이다. 뚝배기 기질에서 나온 것이 곧 민족의 선풍(仙風)이며 선풍에서 나온 것이 검약과 절제의 민족식탁임은 다시 말할 나위가 없다.

    멋은 맛에서 왔다고 한다. 무더운 여름날 어죽을 끓이는 것은 맛 이전에 확실히 멋이다. 죽맛 같은 세월, 그것은 배고픔이 아니라 최사장 말대로 이 시대에 와서는 다이어트 식사법의 최상 음식인지도 모른다. 깨죽이나 밈(미음), 잣죽이나 녹두죽에 앞서 능성어죽이야말로 남해안 지역에선 별미식으로 여름 더위를 푸는 데는 최상의 죽이었다. 옛 선비들이 천렵(川獵)하며 탁족(濯足)하고 옥계수 냇가에 앉아 어죽을 쑨 것은 오랜 습속의 전통이기도 했다. 죽은 곧 청렴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