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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발 끝까지 “온통 까맣게”

올 추동 패션계 블랙 유행 … 구두 가방 등 소품까지 블랙 일색

  • < 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머리에서 발 끝까지 “온통 까맣게”

머리에서 발 끝까지 “온통 까맣게”
쇼핑이 취미인 회사원 김수진씨(29)는 이상하게도 옷만 사러 가면 검정색 옷을 사게 된다고 말한다. “몸매가 통통한 편이다 보니 밝은 색은 부담스럽고,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이번엔 컬러풀한 옷을 사야지 하다가도, 이것저것 입어보면 그래도 검정색이 날씬해 보이고 세련되어 보이는 것 같아 결국 사게 되어요. 덕분에 옷장엔 온통 검은색 옷뿐이죠.”

우리 나라 여성 중에는 김씨 같은 ‘블랙 마니아’들이 꽤 많다. 체형이나 몸매에 상관없이 무난하게 입을 수 있고, 다른 옷과 맞춰 입기 편하고, 크게 유행을 타지 않으면서 상대적으로 날씬해 보이고…. 이처럼 패션에서 검정색에 대한 선호도는 다른 색보다 높은 편. 검정옷이 많은 사람이라면 새 옷을 장만하기 위해 공연한 돈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올 가을·겨울 패션계 최고 유행색은 바로 블랙이니까.

한동안 현란한 색의 향연에 밀려 기본색상으로만 존재한 블랙은 이번 추동복 시장에서 확실한 컬러로 자리잡았다. 국내외 디자이너들은 머리부터 발 끝까지 블랙으로 통일하는 ‘올 블랙 코디네이션’과 함께, 의상뿐 아니라 장갑 구두 가방 모자 등의 소품까지도 블랙 일색으로 맞춘 ‘블랙 룩’을 앞 다퉈 선보인다.

사실 패션에서 블랙은 새롭다고는 할 수 없는 색이다. 누구나 갖고 있고, 즐겨 입는 색이지만 자칫 무겁고 지루하게 느낄 수 있는 이 컬러가 왜 새 천년의 가을에 들어선 지금, 거리를 휩쓰는 걸까.

블랙 패션의 유행을 다룬 유명 패션잡지에는 “월스트리트가 침울해 있는 동안 ‘컬러’라는 것은 잠시 잊어라”는 의미심장한(?) 문구도 등장했다. 이는 경제 등 사회 전반의 흐름과 패션 사이에 깊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뜻한다. 제일모직 홍보팀 강이창씨는 “경기침체와 실업률 증가, 심각한 취업난 등 불경기의 어두운 분위기가 패션에 반영되어 블랙의 유행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머리에서 발 끝까지 “온통 까맣게”
패션 전문가들은 경제가 어려워지는 조짐이 보일 때 블랙·그레이 등 무채색 계열이 급부상한다고 설명한다. 검정색 옷 한 벌이면 다른 옷과 별로 어렵지 않게 겹쳐 입을 수 있고, 자주 세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경제성이 불경기용 패션으로 제격인 이유지만, 여기에는 블랙이 가진 이미지와 느낌도 한몫한다.

‘블랙볼’(blackball, 반대투표) ‘블랙메일’(blackmail, 공갈) ‘블랙리스트’(blacklist, 요주의명부) 등에서 볼 수 있듯, 검은색은 주로 ‘절망’ ‘악의’ 등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는 색이다. 사람들은 검은색에서 ‘밤’ ‘공허’ ‘죽음’ 같은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런데 이러한 검은색이 옷이나 자동차에 쓰였을 때는 의미가 좀 달라져 지성과 권위, 귀족성의 상징이 된다. 때문에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의 차는 검은색 일변도이고,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서 사람은 검정옷을 즐겨 입는다. 실제로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로 인정 받는 이들을 상대로 평소 즐겨 입는 의상 색을 조사하면 블랙&화이트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사람을 많이 상대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블랙을 즐겨 입는 이유는 이 컬러가 주목성을 높이고 확실한 이미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커리어 우먼일수록 블랙 수트를 많이 입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삼성패션연구소 서정미 수석연구원은 최근의 경기침체가 패션의 보수화 경향을 부추겼다고 설명한다. “급격하게 끓어오른 벤처 열풍이 식으면서 다시 전통으로 눈을 돌려 기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패션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자유분방한 느낌의 캐주얼과 달리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는 비즈니스맨들의 블랙 수트는 직업인으로서의 전통성과 전문성을 상징한다.”

머리에서 발 끝까지 “온통 까맣게”
한편 여성복에서의 블랙 유행을 미의 기준이 변화하는 데 따른 현상으로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 전통적으로는 흰색이 여성성을 상징하는 색이었지만 이젠 검정색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는 것. ‘툼 레이더’의 안젤리나 졸리처럼 검은 피부에, 탄탄한 근육질 몸매, 거기에 몸에 꼭 맞는 블랙 의상은 현대 여성이 추구하는 ‘섹시미’의 상징이라는 것. 이 때문에 이미 오래 전부터 영화 등에서는 검은 상복을 입은 미망인에게서 관능적 분위기가 느껴지도록 하는 연출법을 많이 써왔다.

“남성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제 여성은 연약함과 귀여움에서 벗어나 파워풀한 여전사 이미지를 닮고 싶어한다. 블랙은 어떤 색상보다 강인하면서도 섹시한 느낌을 가진 컬러다. 지금의 사회적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도 육체적으로나 감성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그런 강인함이 필요한 것이다”(‘여자와닷컴’ 패션콘텐츠팀 이정금씨).

머리에서 발 끝까지 “온통 까맣게”
블랙의 유행은 비단 패션에 국한한 것은 아니다. 지방시, 바비 브라운, 메이블린 등 세계 유명 화장품 회사들은 올 시즌 일제히 블랙과 회색을 기본으로 한 ‘스모키 메이크업’을 선보였다. 어두운 색조의 아이섀도와 블랙 아이라이너, 마스카라 등을 이용해 너구리눈처럼 시커멓게 눈매를 강조하는 이런 메이크업은 대담하면서도 도발적 분위기를 연출해 글래머러스한 멋을 풍기지만, 이전까지는 패션쇼에서나 볼 수 있는 ‘전위적인’ 것이었다.

이화여대 색채디자인연구소의 이미경 연구원은 “일반인의 색채감각이 전문가 못지않게 발달하고 표현방식이 대담해지면서 블랙 패션과 메이크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이씨는 또한 블랙을 선호하는 심리에는 불안을 감추고 감정을 자제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블랙의 광학적 특징이 모든 색을 흡수하는 색이란 걸 상기해 보면 일면 이해가 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상대에게 비밀로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나, 신비로운 느낌을 주고 싶을 때는 검정색 옷을 입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블랙의 유행으로 올 가을은 어느 때보다 차분하게 지나갈 전망이다. 그러나 불과 얼마 전 새 천년에 대한 기대심리와 낙관론으로 다양한 색채와 패턴물을 이용한 로맨틱 패션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준 걸 생각하면 호경기의 들뜬 기분이 사라진 지금의 블랙패션은 왠지 쓸쓸하게 느껴진다.

행복하고 즐거운 느낌의 컬러풀 패션을 보기 위해선 다시 얼마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



주간동아 2001.09.20 302호 (p78~79)

< 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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