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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원 태풍 美 근로자 “뭉쳐야 산다”

10년 장기호황 ‘파이’없이 고용 불안… 닷컴 직원 등 노조원 1천7백만 명 육박

  • < 방형국 / 인디애나폴리스 통신원 > hkbahng@bsu.edu

감원 태풍 美 근로자 “뭉쳐야 산다”

감원 태풍 美 근로자 “뭉쳐야 산다”
미국의 노동절인 지난 9월3일. 시카고 트리뷴지에 실린 한 컷짜리 만평은 장기호황을 누린 미국 경제의 ‘그늘’을 그렸다. 한 손에 삽을 든 근로자가 철 지난 쓸쓸한 바닷가에서 바닷물에 씻겨 허물어지는 모래성을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고, 저 멀리 반석 위의 화려한 성에서는 파티가 열리는 장면이다.

이 만평은 미국 경제가 1990년대에 건국 이후 사상 최장기 호황을 누렸지만 경제호황이 근로자에겐‘모래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들에게 돌아온 ‘파이’는 구조조정을 위한 ‘해고’(layoff)뿐임을 알게 된 근로자들의 불안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노동주간(법정 노동절은 매년 9월4일이지만 실제 휴일은 9월 첫째 월요일)을 맞아 정치 중심지인 워싱턴 D.C.를 비롯해 시카고 디트로이트 시애틀 미시간 등 노동집약산업이 발달한 대도시에선 노동운동 확산을 위한 캠페인이 어느 해보다 활발했다.

10여 년에 걸친 장기호황 뒤의 경기 침체에다 실업률이 치솟는 등 근로자의 불안감이 고조됨에 따라 CNN 등 주요 언론들도 앞을 다퉈 노동문제를 주제로 ‘특집’을 마련해 노동문제가 사회 이슈로 떠오를 것임을 시사했다. CNN은 ‘노동조합은 죽었는가’(Are Labor Unions Dead?)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에서 “최근의 경기침체와 대량해고가 근로자에게 노조 결성을 부추기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정부가 마련한 노동절 행사에서는 ‘21세기 바람직한 노사관계 및 근로자 복지정책’이 주요 이슈였다. 반면 세계 최대 노동조합단체인 AFL-CIO (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nd Congress of the Industrial Organiza tion: 미국노동총동맹-산업별회)는 최근의 심각한 근로자 해고 사태를 주요 이슈로 내세웠다.



감원 태풍 美 근로자 “뭉쳐야 산다”
미 노동부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7월 말 현재까지 원가절감 등을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된 근로자는 모두 112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는 작년 한 해 동안 ‘잘린’ 전체 해고 근로자 수보다 무려 83%나 높은 수치다. 이에 따라 실업률도 4.5%로 껑충 뛰었고, 대학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한 졸업생들이 넘쳐나는 실정이다.

근로자들은 지난 10여 년 간의 호황기에 그토록 강조하던 ‘부의 효과’(wealth effect)마저 잃고 말았다는 상실감에 빠졌다. 미국의 주식투자 인구는 99년 말 현재 34%로 3년 전의 16%보다 급신장했으나, 최근의 주가 폭락으로 ‘부의 효과’란 것도 ‘공염불’이 되고 만 것.

때문에 이번 노동절의 화두는 단연 지난 호황기에 만든 ‘파이’가 어디로 갔느냐 하는 데 모아졌다. 경영자와 주주에게 돌아간 파이의 크기에 비해 근로자에게는 파이는커녕 고용불안만 돌아온 탓이다. 산업구조가 경량화·첨단화하는 과정에서 CEO 등 경영진의 힘은 지나치게 커진 반면 근로자 파워는 상대적으로 크게 위축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미국의 노동운동은 이른바 ‘다운 사이징’ ‘슬림화’ ‘리엔지니어링’ 등 90년대 경영계의 화두에 밀려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1995년 존 스위니 현 AFL-CIO 회장 취임 이후 조합원 수는 물론 전체 고용인구 대비 조합원 비율이 급격히 하락했다. 97년 1600만 명에 이른 조합원 수가 불과 1년 새 1300만 명으로 줄어든 것. 이로 인해 지난해 노조 가입 근로자 비율은 13.5%로 60년 만에 최저치로 곤두박질쳤다.

노동 전문가들은 이를 AFL-CIO 지도부의 오판 때문으로 분석한다. 노동시장을 유연화해 새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경영자측 주장을 그대로 수용해 결과적으로 고용안정을 원하는 노조원들의 욕구를 저버렸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미국 근로자의 노동시간은 선진국 가운데 가장 긴 것으로 조사되었다. 2000년 미국인 평균 근로시간은 연간 1978시간으로 10년 전인 1990년의 1942시간보다 오히려 늘었다. 이는 호주 일본 캐나다 등 다른 선진국의 근로자보다 연간 100시간(약 2주), 독일 근로자보다는 500시간(약 12.5주)이나 일을 더하는 것이다. 반면 미국 근로자의 노동생산성(1995∼2000년)은 연평균 2.6%씩 성장해 같은 기간 유럽연합(EU)의 평균 노동생산성 증가율 1.2%를 크게 앞질렀다.

근로자의 불만이 커짐에 따라 부시 행정부도 근로자 달래기에 나섰다. 지난 6월 한국 및 일본산 철강에 대해 덤핑판정을 내린 데 이어, 8월 말에는 현역 대통령으로선 30년 만에 처음으로 펜실베이니아 소재 철강단지를 방문해 철강 근로자에게 클린턴 행정부와 차별화된 노동정책을 주제로 연설했다. 노동절엔 미시간주 목수노조와 위스콘신주 팀스터 유니온(미 트럭 운전자 노조연맹)의 피크닉 행상에 참가,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며 그들을 토닥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산업현장 곳곳에선 이미 노동운동이 꿈틀거리는 조짐이 나타났다. 주목되는 곳이 ‘노조 사각지대’로 알려진 실리콘밸리. 그동안 벤처기업은 설립 초기 서너 명의 직원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고, ‘노사 구분’보다는 ‘동업자 정신’이 강한데다 직원 수도 얼마 되지 않아 노조결성 자체가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근로자에 대한 대량해고가 계속되면서 아무리 계약에 의해 고용환경을 보장하고, 수요 초과로 인해 대우가 좋다 해도 근로자들이 뭉쳐야 회사와 대등한 위치에서 스스로 권익을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우선 Dot.com 직원들이 AFL-CIO에 가맹하겠다는 신청서를 제출한 데 이어 최근엔 아마존닷컴이 가맹 신청서를 받아갔다.

미국 내 3위 항공사로서 무(無)노조 경영을 자랑하던 델타항공의 2만여 승무원도 최근 항공승무원 노조연맹 (Association of Flight Attendant, AFA)에 가입했다. 지난 8월 초엔 보잉항공사 전투기 등 군수용품 프로젝트 소속 직원 5000여 명이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항공부품 관련 사업소의 직장폐쇄에 항의, 연맹파업에 돌입하는가 하면, 1995년 미 자동차 노조연맹(UAW)을 탈퇴한 닛산자동차 근로자도 같은 달 조합원 투표로 UAW에 재가입하기로 결정했다. 무선통신서비스 업체인 싱귤러 와이어리스도 최근 일리노이주에 노조결성을 신고했고, 대형 통신서비스 업체인 버라이존도 노조출범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테네시에선 이 지역 병원노조연맹을 발족했다.

이처럼 올 들어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1998년 1300만 명 수준으로 감소한 조합원 수는 최근 다시 1700만 명에 근접했다. 이런 추세라면 내년엔 2000만 명을 넘을 것이라는 게 AFL-CIO의 전망이다.

올해 AFL-CIO 회장 선거를 앞둔 스위니 회장이 어려운 상황에 몰린 것도 새 노사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요인이다. 지나치게 경영자 편에 서왔다는 평가를 받는 그가 재선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근로자에게 커다란 선물 보따리를 내놓아야 할 것으로 관측된다.

AP통신이 최근 근로자 4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자 2명 중 1명이 고용불안이 가중됨에 따라 노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1990년대 들어 크게 위축한 미국의 노동운동이 21세기에 다시 활발해질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세계 노동계 특히 한국의 산업현장과 노동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주간동아 2001.09.20 302호 (p58~59)

< 방형국 / 인디애나폴리스 통신원 > hkbahng@bs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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