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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종차별회의 외면하는 미국

‘시오니즘 논란’ 속 미 파월 국무 불참… 노예노동, 식민지배 청산 도마에

  • < 김재명/ 분쟁지역전문 기자 > kimsphoto@yahoo.com

반인종차별회의 외면하는 미국

반인종차별회의 외면하는 미국
지구촌 사람은 한가족인가. 모두가 말 그대로 법 앞에 평등한가. 남아공 더반에서 8월31일~9월7일에 열리는 반인종차별회의(WCAR)는 이같은 물음을 화두로 한 국제회의로 지난날 식민지배와 착취, 노예노동 등 지구촌의 해묵은 문제들을 인종차별이란 프리즘으로 접근하는 모임이다. 150여 개국 정부 대표와 민간단체(NGO) 대표 1만4000여명이 참가하는 이번 회의는 식민지배와 노예제도에 대한 사과ㆍ배상을 포함한 이른바 ‘과거 청산’ 문제와 중동 유혈사태 등을 주요 의제로 다룬 뒤 선언문을 발표한다.

1983년 제네바 WCAR대회의 주요 안건은 남아프리카 인종차별정책(apartheid) 철폐였다. ‘평등 정의 존엄’이라는 슬로건으로, 18년 만에 열리는 이번 더반 WCAR 회의는 21세기 들어 인종차별 및 불평등에 관한 인류의 고민을 논의하는 첫 회의란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회의에선 난민, 인도의 카스트 제도, 사형제 폐지 문제 등과 함께 일본군 군대위안부와 교과서 왜곡문제, 탈북자 난민지위 인정 문제도 함께 다뤘다. 그러나 개막 전부터 선진부국과 후진국들 사이의 힘겨루기 신경전이 난기류를 형성하기도 했다.

중동 유혈 충돌사태 치열한 설전

이즈음 들어 지구촌 후진 빈국들을 대변하는 볼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선진국들의 회의장 앞에는 어김없이 시위대가 모여든다. 이는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으로 상징되는 국제금융계를 지배하는 선진부국들이 세계화(globalism)를 이데올로기로 지구촌을 주무르는 데 대한 후진빈국들의 반발로도 풀이된다. 유엔 WCAR 회의는 최근 들어 두드러진 후진빈국들의 목청을 다시 한번 들을 수 있는 국제적인 행사다.

WCAR 회의에 미국과 이스라엘은 장관급 대표단을 보내지 않고 차관보를 우두머리로 한 하위급 대표단을 보냈다. 이스라엘의 시오니즘(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유대민족주의운동)이 논란거리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미국은 1978년과 1983년 회의 때도 시오니즘이 의제로 포함되자 회의에 불참했다. 이번 더반 회의 사무총장을 맡은 메리 로빈슨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이 “시온주의를 인종주의와 동일시하는 문구를 선언문에서 삭제키로 합의했다”고 발표했지만, 미국은‘이스라엘 흠집내기’가 불 보듯 뻔하다며 불참 뜻을 굽히지 않았고, 이스라엘도 당연히 뒤를 따랐다.



국제사회에서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이 인종주의라 규탄을 받은 것은 1975년도 유엔총회 결의안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1991년 마드리드에서 중동평화회담이 열리면서 “시오니즘=인종주의” 결의안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더반 회의장에서 아랍권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겨냥해 목청을 돋웠다. “시온주의 운동은 인종적 우월주의(선민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 점령을 ‘인종청소’라 비판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더반 회의가 인종주의를 더 불거지도록 만들었다”(재미 유대인 법률가 다니엘 랙)는 반론을 제기한다. 시오니즘을 비판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인종주의라는 주장이다. 지난 9월 이래 벌어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유혈 충돌사태가 더반으로 번진 느낌이다. 이번에는 실탄이 아닌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성명전이라는 점이 다르다.

전 세계 7000여 비정부기구(NGO) 대표들이 더반 회의에서 통과시키려 한 중동사태 관련 결의안 초안은 한마디로 반(反)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의 민족자결과 인권을 침해하는 식민주의적인 인종차별국가로 낙인찍고 팔레스타인 사람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by any means) 이스라엘군의 점령에 저항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초안은 이스라엘이 점령지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더반에 온 소수의 친이스라엘 유대인 단체들은 “중동사태는 인종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다. 더반 회의가 (아랍계 세력에게) 공중납치되었다”는 주장을 폈다.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을 인종주의로 몰아붙이는 것은 신나치주의(neo-Nazism)란 반격이다. 이번 WCAR 회의는 지난날 제국주의 시절에 저지른 식민지 착취와 노예노동문제도 다루었다. 이는 미국과 유럽 선진국들을 자극하는 쟁점 사안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식민주의와 노예무역은 반인도적 범죄로 국제법상 시효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더반 WCAR 회의를 1주일 앞두고 아프리카의 40개 비정부기구연합체는 WCAR 회의가 노예제도를 반인륜범죄로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노예제도를 시행한 당사국들에 대해 배상을 요구했다.

파월 국무장관이 더반 회의에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국은 노예제도와 식민주의 문제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파월의 불참결정을 내리도록 만든 한 요인임은 틀림없다.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들은 노예제도와 식민지 착취란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공식사과와 배상문제를 의제로 다루는 것은 강력히 반대해 왔다. 미국에겐 특히 노예제도가 거북스런 주제다. 미국은 “금전적 배상과 공식 사죄는 오늘날의 차별과 불평등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부 대변인)며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다.

더반 회의에선 미국 내 소수인종 차별도 도마 위에 올랐다. 미국 내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이 심각하다는 것은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다. 미국의 서부개척사는 인디언 말살사에 다름아니다.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이 상대적으로 높은 미국 남부 지역(앨라배마 플로리다 조지아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텍사스)에서의 사형수 비율을 보면 소수인종이 백인보다 훨씬 높다. 지난 8월에 나온 유엔의 한 보고서는 “미국의 소수인종 비율이 전체 인구의 30%지만 사형 선고자의 54%를 차지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강제송환 탈북난민 문제도 논의

WCAR 회의에서는 난민문제도 주요한 토론주제로 다루었다. 지금 전세계에는 무려 2500만 명에 이르는 난민이 고통 받고 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난민 지위를 얻지 못하거나, 망명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와 함께 북한난민에 대해서도 토론을 했다. 지난 8월 초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한 보고서를 통해 “탈북자들은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에서 난민으로 인정했는데도 조직적으로 망명인정이 거부된 채 송환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탈북자에 대해 중국 정부가 보다 객관적인 심사기준을 마련하도록 요청한 바 있다. 이번 회의에는 한국이 일본 침략과 관련해 씨름해 온 주제들도 포함되어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파문 등이 그것이다. 국제적인 인권단체 HRW(Human Rights Watch)를 비롯한 비정부기구들은 WCAR 회의를 계기로 인종·민족차별 폐지를 위한 국제적인 연대가 본격화할 것으로 기대한다. 더반 WCAR 회의를 앞두고 유엔은 여러 차례의 준비회의를 거쳤다. 그러나 선언문 초안의 절반 이상이 미정인 채로 본회의를 열었다. 그런 까닭에 회의가 순조롭게 끝나지 못하고 파행을 거듭하다 막을 내리리란 전망도 없지 않다.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은 이번 더반 국제회의가 과거를 청산하고 앞날의 새로운 길을 여는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미국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인 파월의 불참문제는 ‘국제외교 무대의 록스타’라고 하는 아난 총장으로서도 어쩌지 못했다.



주간동아 2001.09.13 301호 (p54~55)

< 김재명/ 분쟁지역전문 기자 > 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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