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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1300년 전 백제에 ‘寶憙寺’가 있었네

부여 능산리 ‘유물의 증언’… 금동대향로, 사리감 출토 역사적 상상이 ‘史實’로

  •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1300년 전 백제에 ‘寶憙寺’가 있었네

1300년 전 백제에 ‘寶憙寺’가 있었네
서기 660년 백제의 수도 사비성(부여). 수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든 나당(羅唐) 연합군은 사비성 인근의 ‘보희사’(寶憙寺)에도 어김없이 쳐들어왔다. 연합군은 백제의 왕실 사찰인 이 절을 철저하게 파괴한다. 서기 567년 백제 창왕이 신라와의 전투에서 숨진 부왕(성왕)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 사찰은 신라군에겐 눈엣가시. 왕실 무덤에 들어갈 부장품 생산을 담당한 이 절의 주지는 다급하게 금동 대향로를 비롯한 각종 제기와 귀중품을 절 안 깊숙한 곳에 숨기거나 배수로에 버렸다. 그러나 연합군이 물러간 뒤에도 그는 절터로 돌아오지 못했고, 폐허가 된 이 절은 백제 패망의 슬픔을 간직한 채 1300여 년의 세월 동안 사람의 기억과 기록에서 사라졌다.

국립부여박물관 발굴단이 1992년 7월부터 지난 7월15일까지 약 9년 여 간 계속한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에 대한 발굴 결과는 이런 ‘역사적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절터지만, 이곳은 백제시대 절터 중 유일하게 절의 창건 주체와 목적, 연대를 정확하게 기록한 사리감(舍利龕)이 출토된 곳.

서기 567년 창왕이 아버지 위해 창건

1300년 전 백제에 ‘寶憙寺’가 있었네
특히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발견한 절 이름이 쓰인 유물(목간)의 발견은 이 절터의 비밀을 푸는 핵심 단서를 제공했다.

더욱이 동양 최고의 금속공예품으로 인정 받는 금동대향로의 출토는 백제 미술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밖에 문헌상으로만 존재하던 백제 관직을 써놓은 목간(木簡)과 절 소실 당시의 상황을 재현이라도 해놓은 듯한 유구(遺具) 등, 문헌 사료(史料)의 절대적 부족에 목말라 있는 백제시대 연구자들에게 능산리 절터의 유물과 유구들은 더운 여름의 한줄기 소나기 같은 소중한 존재로 인정 받고 있다. 발굴 유물 모두가 희귀한 것이었고, 백제시대 정치사와 사회사 연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1차 사료들. 발굴을 거듭하면서 ‘역사적 상상’은 하나씩 그 증거를 획득하며 하나의 사실(史實)로 바뀌어 가고 있다.



하지만 백제 왕실의 무덤군으로 알려진 능산리 고분군과 사비성의 외곽성인 나성 유적 사이에 방치한 4000여 평의 논이 1300년의 세월을 뚫고 역사적 사료의 보고(寶庫)로 부활하기까지는 말도 많고 사연도 적지 않았다.

7차에 걸친 발굴에 참여한 학자들은 능산리 절터를 ‘하늘이 돕는 유적지’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예산 부족으로 부여군과 문화재청이 매번 발굴 중단 위협을 할 때마다 이를 무마하고 발굴을 계속할 수 있도록 ‘굵직한’ 유물들이 나와 주었기 때문. 그것도 늘 발굴 기간이 끝나기 바로 직전에 유물들이 발견됨으로써 발굴단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발굴팀의 한 연구원은 “늘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발굴에 임했다”며 “하지만 백제는 우리에게 무심하지 않았고, 더 이상 소외된 역사로 남기 싫은 듯 마지막에 선물을 줬다”고 말한다. 발굴팀이 말하는 발굴 후담은 한편의 드라마 같다. 사실 능산리 절터는 발굴 동기부터가 ‘우연’에서 출발한다. 능산리 고분군의 배수로를 내던 인부들이 발굴 이전 계단식 논이던 절터에서 연꽃무늬 기와를 발견한 것이 발굴의 ‘격발자’였다. 삼국시대 고분 옆에는 반드시 제사를 모시는 절이 있다는 상식에 착상한 발굴단은 부여군에 정식 발굴을 요청한다. 하지만 군측은 어떤 뚜렷한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 발굴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발굴단은 독립 발굴을 포기한 채 나성 주변 유적지 발굴이라는 편법을 선택했다. 나성에 인접해 있으므로 이곳에서도 나성과 관련된 유적이 나오지 않겠느냐며 군청을 속인 것.

이렇듯 어렵게 시작한 발굴이었지만 1차 시험발굴을 거쳐 93년 12월 2차 발굴이 끝날 때까지도 공방으로 쓰인 건물 유구와 토기 몇 점을 발견했을 뿐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이번에 뭔가를 건지지 못하면 이곳에 대한 발굴은 ‘끝’이라는 우려는 이미 법적 발굴기간이 종료되었는데도 발굴 작업을 계속하게 했다. 그러기를 3일째, 차가운 날씨 속에 당시 부여박물관 학예실장인 신동섭씨(현 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장)의 손 끝에 금속성 물체가 만져졌다. 한 마리의 용이 용트림하며 연꽃 위에 뜬 봉래산과 신선들을 받치는 모습. 언뜻 보기에도 백제 공예품의 수작임을 신부장은 눈치챘다. 여차하면 영원히 땅 속에 묻힐 뻔한 국보 287호 백제 금동대향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향로가 발견될 곳이 아니었습니다. 불에 단 쇠를 녹이는 공방터의 목곽수조에서 향로가 발견된 것은 절 소실 당시 위급한 상황에서 누군가 인위적으로 향로를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 파묻었다고 봐야 합니다.” 신부장은 발굴 당시를 회고하며 “국보급 유물을 발굴한 후에도 법을 어겼다며 군청과 실랑이를 벌였다”고 웃어 보였다.

1300년 전 백제에 ‘寶憙寺’가 있었네
그러나 금동대향로 발굴의 ‘약발’은 채 2년을 넘지 못했다. 3차 발굴과 4차 발굴을 거치면서 발굴단은 제2 공방지와 강당 터(본당), 목탑 터를 발견함으로써 이 건물 터가 백제시대 절터임을 명백하게 확인했다. 하지만 문화재 당국의 눈길은 날로 싸늘해졌다. 가시적인 성과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4차 발굴이 끝나가던 지난 95년 10월 능산리 절터는 다시 한번 진가를 드러냈다. 목탑의 기둥[心柱]이 넘어진 지점 밑 지하를 110cm쯤 파 내려가던 발굴단이 화강암으로 된 돌덩이를 발견한 것.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라는 문장이 또렷이 새겨진 사리감이었다. 이를 번역하면, “백제 창왕 13년(567년)에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내용이다. 창왕은 자신이 주도한 신라와의 전쟁에 격려차 왔다가 신라 병사의 칼에 맞아 숨진 아버지 성왕(聖王)을 기리기 위해 이 절을 지은 것이었다. 사리감의 발견으로 절의 창건 연대가 밝혀졌고, 절을 지은 주체가 누구인지도 명확해졌다. 이후 ‘백제 창왕명 석조 사리감’이라 명명된 이 사리감은 국보 제288호로 지정되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 절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것. 그리고 왕실과 이 절의 관계, 또는 능산리 고분과 이 절의 관련성을 밝힐 유물이 나와야 했다. 그러나 97년과 98년에 걸친 5차 발굴에서는 절의 내부 유구에 대한 발굴을 마쳤을 뿐 추가 유물의 발굴에 실패했다.

비장한 각오로 99년 9월 6차 발굴에 들어간 발굴단은 역시 발굴 마감시한인 2000년 4월이 되어서야 6점의 금싸라기 같은 목간 유물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절 경내도 아닌 사찰의 정문 서편 앞 부분에서였다. 절 내부에서 더 이상의 유물을 발굴하지 못한 발굴단은 절 밖으로 진출했고, 거기서 백제사 연구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보다 사료적 가치가 더 있다는 목간을 발견한 것이다. 목간은 종이가 널리 보급되기 전에 나뭇조각에 글을 적어 책이나 문서로 쓰던 것으로, 신분증이나 상표 역할을 하기도 해 학계에서는 시대상을 생생하게 반영하는 1차적 사료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중 “쭛奉義 쭛道쭛立一二年 无奉天”이라고 적힌 목간은 의를 숭상한다거나 하늘 천자가 쓰여 있는 것으로 미뤄 제례의식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이 절이 왕실의 제사를 책임진 절이라는 가정이 힘을 얻게 되었다. 평평한 형태로 다듬어 몸에 지니고 다닌 일반 목간과 달리 원통형 자연목을 쐐기형태로 무엇인지에 꽂아 고정할 수 있는 형태를 지녔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이 목간은 붓으로 쓴 다른 목간들과 달리, 칼로 글자를 새겼다는 점에서 국내 최초의 각자(刻字) 목간으로 인정 받고 있다.

하지만 진짜 발굴의 위기는 올 7월에 찾아왔다. 부여군이 7차 조사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절터를 정비 복원해 관광지로 개발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다급해진 발굴단은 장마와 한여름 땡볕이 내리쬐는 속에서도 발굴을 계속했지만 별다른 유물을 발굴하지 못했다. “대지 조성토까지 팠는데 유물이 발굴되지 않아 포기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조성토 밑 뻘층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7차 발굴의 책임을 맡은 이종환 학예사는 발굴 마감 3일을 남기고 ‘중대 결정’을 내렸다. 보통 절터의 발굴에서 절 조성 당시의 지표층(대지조성토)까지 유물이 나오지 않으면 더 이상 유물이 없다는 관념을 깨고 발굴단에 지하까지 파 들어갈 것을 지시한 것.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지하 뻘층에서 절의 또 다른 배수로 시설과 함께 무려 23점의 목간을 발견하였다. 절 소실 당시 지하 배수로로 흘러든 유물들이었다. 특히 그의 눈을 번쩍 띄게 한 것은 ‘보희사’(寶憙寺)란 절 이름이 쓰인 목간. 이로써 능산리 절터의 당시 이름을 알리는 결정적 실마리가 제공된 셈이다.

한편 목간 중에는 ‘전생에서 맺은 인연으로 한 곳에 태어났다’(宿世結業 同生一處)는 불교적 연기론을 반영한 내용이 쓰인 것도 발견되어, 이 절이 왕실의 구복사찰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이 밖에 ‘삼국사기 직관지’에 나오는 백제 16관등 중 6, 11품에 속하는 ‘나솔’(奈率) ‘대덕’(對德)의 관직명이 쓰인 목간의 발견은 믿을 수 없던 ‘삼국사기’ 내용에 신빙성을 더했다.

“능산리 절터도 곧 사적지로 지정될 것입니다. 추가 발굴도 박물관측이 요구하면 문화재청의 예산을 받아 발굴이 가능하도록 처리하겠습니다.” 역시 백제의 혼령이 보호하는 것일까. 능산리 절터를 관광지로 개발하겠다던 부여군은 발굴단의 열의와 따가운 여론에 밀려 최근 마음을 돌렸다. 백제는 잊힐만 하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는 사학계의 징크스가 이후 발굴 작업에도 맞아떨어질지 주목된다.



주간동아 2001.08.30 299호 (p64~66)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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