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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사춘기의 블랙홀 ‘청소년 우울증’

‘애정’이란 이름의 치료제

정신과 의사의 치료경험담 … 형제간 차별·열등감 시달리던 여중생 ‘가족치료’ 병행 통해 회복

  • < 조인희/ 인천기독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장 > ellen98@hanmail.net

‘애정’이란 이름의 치료제

‘애정’이란 이름의 치료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지난 7월의 아침. 출근하자마자 e-메일을 확인했다. 낯익은 이름의 e-메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수진(가명)이가 여름방학을 앞두고 보낸 안부의 글을 읽으며 마지막으로 외래에서 만난 그 아이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수진이는 중3 때인 지난해 초 자살을 시도했다. 집안에 상비된 진통제와 위장약을 다량 복용한 채 응급실에 내원했다. 수진이는 자영업을 하는 아버지, 교사인 어머니, 고3인 오빠와 살고 있는 중산층 가정의 아이였다. 수진이 문제의 발단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진이가 5세 무렵, 아버지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하자 결혼 뒤 교사생활을 그만둔 어머니가 다시 교단에 섰고 할머니가 대신 아이들을 돌봐주었다.

평소 엄마를 무척 따르던 수진이는 출근할 때면 울고 매달리며 떨어지지 않으려 해 엄마는 몰래 도망치듯 출근했다. 뒤늦게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안 수진이는 떼를 쓰며 울거나 문 앞에서 종일 엄마를 기다리기도 했다. 퇴근한 엄마는 “내일부터 가지 말라”고 울며 매달리는 아이를 거짓말로 달래놓곤 다음날이면 또 몰래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아이와의 실랑이에 지친 엄마는 저녁마다 떼쓰는 아이에게 점차 화를 내고 매몰차게 야단치곤 했다. 설상가상으로 수진이 할머니는 남아선호 사상이 강해 반찬이나 과자 하나 줄 때조차 오빠와 엄격히 구분하여 남녀 차등을 두었고 수진 엄마가 이를 만류하면 “에미가 싸고 도니까 계집애 버릇이 더 나빠진다”며 도리어 역정을 내는 바람에 이를 말릴 수 없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수진이는 성적이 우수한 오빠와 늘 비교가 되었다. 자연히 집에선 거의 말이 없는 아이가 되었고,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공부를 점차 등한시해 성적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2학년이 끝날 무렵, 성적 때문에 엄마에게 심하게 꾸중을 듣고 친한 친구들에게서 따돌림당한 일이 생긴 뒤로는 폭식과 구토 증상마저 보여 수진은 부모와 잦은 충돌을 빚었다.

병원에 오기 한 달 전부터는 기운이 없고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수업을 빠지는 일이 잦았으며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며 우리 집에서 나만 없어지면 된다”라며 발작적으로 화를 내고 우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면담과 심리검사를 통해 수진이가 가진 문제가 우울증과 폭식증이며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애정욕구의 상실감, 오빠에 대한 편애와 비교로 인한 극도의 자신감 저하, 권위적인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이 또 다른 주된 문제로 평가되었다. 입원 및 외래치료로 먼저 우울증과 폭식증에 대한 정신치료와 약물치료를 시행하였다. 치료를 진행하면서 우울증상과 자살에 대한 생각은 많이 완화되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폭식과 구토, 오빠에 대한 열등감, 어린 시절 자신을 돌봐주지 않은 부모에 대한 적개심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2차적으로 가족치료를 병행하기로 했다. 12회의 가족치료를 하는 동안 초반엔 수진이 아버지가 가족치료를 거부하기도 하고, 때론 온 가족이 눈물바다를 이룬 시간도 있었다. 가족치료를 마친 날 수진이 부모는 “오히려 많은 도움을 받았고 자신들이 전혀 모르는 부분에서 수진이가 많이 힘들어한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후 외래치료를 지속했다. 이때 수진이의 우울증상과 친구관계, 학교생활 개선엔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여전히 스트레스가 가중하는 상황에서는 폭식증이 재발하곤 했다.

스트레스·열등감·폭식증에 초점을 맞춘 개인 정신치료를 수개월 더 지속한 뒤 수진이의 치료는 종료되었다. 그 이후로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수진이와 e-메일을 주고받으며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조언을 해주고 있다. 가끔 우울해질 때도 있고 그럴 때면 폭식 습관이 더러 나타나기도 하지만, 요즘의 수진이는 또래들이 겪는 소소한 갈등을 함께 겪으며 사춘기 소녀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



주간동아 2001.08.23 298호 (p38~38)

< 조인희/ 인천기독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장 > ellen9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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