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6

2001.08.09

“너 죽고 나 살자” … 반도체업계 생존게임

DRAM 폭락 3~6개월 내 시장 재편 가능성 … 하이닉스 유동성 위기 ‘생사의 기로’

  • < 전병서 / 대우증권 리서치센터 수석연구위원 > bsjeon@bestez.com

    입력2005-01-17 14: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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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죽고 나 살자” … 반도체업계 생존게임
    지난해 9월부터 하강국면에 들어간 반도체경기가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DRAM 경기 침체는 최근 15년간을 통틀어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는 최악의 사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7월 들어 경기침체가 심화하면서 일부에서는 L자 형태의 장기불황도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경기가 나빠지더라도 바닥은 있게 마련. 이번 경기 폭락은 L자형의 회복보다는 회복 속도가 빠른 U자형이나, 구조조정이 빨리 일어나면 V자형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러한 전망이 있는데도 반도체 분야의 경우 지금과 같은 가격하락 추세라면 아무리 선발업체라도 3/4분기에는 적자를 면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이 닥치면 불황기에 항상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휘둘러대는 덤핑 제소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런 추세라면 3~6개월 내에 죽느냐 사느냐의 결판이 날 것이라는 이야기다.

    지금과 같은 경기침체에서 벗어나는 길은 PC경기 회복과 같은 수요측면의 요인보다는 공급측면에서 빠른 구조조정으로 공급압박이 줄어 수급균형을 맞추는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DRAM 업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런 전망에 설득력을 더해준다. 역사상 가장 심한 85년 불황 때 세계 1위의 반도체업체인 인텔이 DRAM 사업을 포기하면서 반도체업계는 V자형 회복 곡선을 그렸다. 95년의 DRAM 호황기에 26개 업체가 치고 받던 시장이 96~98년 불황에서는 일본·미국 업체가 손을 털면서 상위 6개사가 시장의 79%를 차지하는 시장으로 정리되었다. 현재 세계 DRAM 시장은 살아남은 상위 6개사 중 3개 업체 정도로 시장이 과점화하는 과정이다. 서바이벌게임에서는 최후에 살아남는 자가 ‘대박’을 터뜨린다. 그 한가운데에 세계시장 1위인 삼성전자와 3등인 하이닉스반도체가 있다.

    경기가 호황이든 불황이든 세계 1위 업체는 걱정이 없다. 호황에는 떼돈을 벌고 불황에는 호황 때 번 돈으로 먹고 살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발업체들이 자기들끼리 치고 받다가 죽어나가면 그들이 남기고 간 시장을 피 한방울 안 흘리고 ‘접수’할 수도 있다. 그래서 1등 회사의 투자 축소나 감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런 조치는 옆에서 보는 사람을 겁에 질리게 하지만 사실상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너 죽고 나 살자” … 반도체업계 생존게임
    1등 하는 업체는 짧으면 1년, 길어도 2년 정도만 기다리면 ‘쨍’ 하고 햇볕 나는 날을 만날 수 있다. 그때 젖은 속옷을 모두 말리면 그만이다.



    문제는 3위에 머물러 있는 하이닉스반도체다. 시장 점유율 세계 3위에 생산능력 세계 1위.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럴듯할지 모르지만 거대기업 하이닉스의 지갑은 텅 비어 있다. 하이닉스는 세계 DRAM 반도체업체로는 유일하게 차입금이 매출액보다 큰 업체다. 이런 회사는 호황기에는 레버리지 효과로 그럭저럭 버틸 수 있지만 불황기에 매출이 줄면 레버리지의 역효과가 나기 때문에 심각한 생존 위기를 맞는다.

    유동성 위기에 몰린 하이닉스는 주식예탁증서(DR)를 액면가의 40%로 할인한 덕분에 그나마 외국투자가들의 자금을 1조6000억 원이나 끌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1조6000억 원을 유치한 지 두 달도 채 안 된 지금, 그 사이 밀린 외상값을 갚고 나니 하이닉스의 금고에는 6600억 원밖에 남지 않았다. 하이닉스로서는 하반기에 돌아올 만기채무와 유동성 문제가 또다시 걱정거리로 떠올랐다. 경쟁사들을 향해 적자가 더 커지기 전에 감산하자고 졸라봤지만 DR를 발행하기 위해 전 세계에 주머니 사정을 다 드러내 보인 지금,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경쟁사들이 감산할 리도 만무하다. 결국 하이닉스반도체는 스스로 못 견딘 나머지 적자 나는 공장문을 닫고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세계 시장의 반도체 가격을 보더라도 불과 6개월 전에 4.5달러 하던 128메가디램이 1.7달러로 63%나 떨어졌다. 덕분에 하이닉스는 상반기에만 1조8000억 원의 적자를 냈다. 게다가 마이크론이 4억5000만 달러, 인피니온이 11억 달러를 유치하면서 감산은 이미 물 건너 간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가격하락을 가속화해 원가를 못 맞추는 후발업체의 도태는 더욱 빨라질 수밖에 없다. 하이닉스는 이 서바이벌게임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아야 할 형편이다. 게임에서 필요한 건 어설픈 협상기술이나 영어 실력이 아니고 오로지 ‘죽음의 계곡’을 건널 때까지 먹고 살 수 있는 현금이다.

    한국의 금융기관들은 18년 간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털어 키운 딸이 수렁에 빠졌는데 이를 더럽다고 버릴 것인지, 아니면 그래도 건져올려 살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하이닉스는 하이닉스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경제의 앞날이 달린 문제다. 하이닉스가 없어지면 삼성전자와 세계 DRAM 업계는 뒤돌아서서 웃을지 모르나 한국경제는 줄 초상이 난다. 하이닉스에 7조 원을 빌려준 23개 금융기관이 돈을 떼이면 주식시장이 성할 리 없고 주식시장이 흔들리면 손실을 줄이려는 외국 투자가들이 달러를 바꾸려고 한국은행 앞에 줄을 설 것이다. 그러면 환율은 기약을 못하고 치솟는 상황이 다시 재연할 가능성도 있다.

    “너 죽고 나 살자” … 반도체업계 생존게임
    어차피 지금과 같은 가격하락이면 금융기관이 돈 받기는 어려운 일이다. 반도체는 도박과 같아 패가 여러 번 돌아갈수록 포기하는 선수들이 늘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반대로 살아 남으면 대박을 꿈꿀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경기가 좋아지는 1~2년을 버틸 자금을 지원하지 않으면 본전마저 떼일 수 있다. 출자전환, 이자감면도 좋은 얘기지만 당장 현금 유동성이 중요하다. 지금 DRAM 업계는 기술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변동비를 밑도는 현물가격을 감안하면 누구의 지갑이 더 두꺼운지의 싸움을 벌이는 형편이다. 싸움터에서는 주먹다짐을 해서 이기기보다는 겁을 줘서 아예 덤비지 못하게 하는 것이 희생을 최소화하는 길이다. 옆집 친구가 1만 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면서 유동성을 과시할 때 텅 빈 지갑을 보이면서 싸움을 그만하자고 하면 결과는 보나 마나지만 그 대신 10만 원권 수표를 보여주면 싸움은 끝난다.

    전문가들 사이에는 하이닉스를 살려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 언제 우리가 세계에서, 그것도 최첨단 하이테크 산업에서 40% 점유율을 가지고 세계시장을 호령한 적이 있었는가. 세계시장 점유율 17%짜리 회사를 키우는 데는 18년이 걸렸지만 버리는 데는 6개월이면 된다. 물론 금융기관의 유동성 지원의 전제는 하이닉스의 자구 노력이다. 99년 LG반도체와 합병 이후 반도체를 제외한 모든 사업부를 매각해 구조조정한다는 얘기를 2년째하고 있지만 하이닉스는 아직도 변한 게 없다. 자구노력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고 확보한 현금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백화점에서 철 지난 물놀이 용품을 가격이 안 맞는다고 그냥 쌓아놓고 있으면서 금융기관에 운영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한다면 지나가는 소도 웃을 일이다. 철 지난 제품을 처분하는 길은 바겐세일 외에는 방법이 없다.

    금융기관의 지원이 미국과 통상마찰을 일으킬까 봐 걱정하는 속 깊은 사람도 있다. 미국은 DRAM 시장에서 19% 점유율을 가졌지만 DRAM을 가장 많이 쓰는 컴퓨터는 5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하이닉스가 없어지면 DRAM 가격 폭등으로 19%의 점유율을 가진 업체는 춤을 추지만 50% 점유율을 가진 업체에서는 곡소리가 난다. 미국의 입장에서 어느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는 불문가지다.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사가 있는 주의 상원의원들을 겁내지 말고, 하이닉스의 지원이 미국의 국익을 위한 일이라고 당당하게 나서는 한국의 금융기관은 왜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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