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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내분…‘비상구’ 안 보인다

기초학문 상대적 박탈감, 총장에 대한 불만 팽배… 뾰족한 해결책 없어 ‘이미지 손상’

서울대 내분…‘비상구’ 안 보인다

서울대 내분…‘비상구’ 안 보인다
발단은 수첩이었다. 서울대 교직원 수첩은 전통적으로 인문대, 사회과학대, 자연과학대를 맨 앞에 내세우고 그 다음부터는 ‘가나다’ 순으로 간호대, 경영대, 공과대가 이어졌다. 그러나 2001년 수첩부터 모든 단과대학에 ‘가나다’ 순을 적용했다. 자연히 사회대는 중간쯤인 사범대와 생활과학대 사이에, 인문대와 자연대는 나란히 끝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차지했다. 인문·사회·자연대 교수들은 발끈했고, 시정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교수들이 수첩을 문제 삼는 것은 단지 순서에서 밀렸다는 자존심 싸움이 아니다. ‘학문의 대학’으로서 서울대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으며, 기초학문이 무너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의 발로 때문이다. 지난 5월18일 서울대 인문·사회과학·자연과학대 교수들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교육개혁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시장 원리에 따라 대학과 학문의 기본구조를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다. 세속적 인기와 단기적 성과로 인해 학문의 내용을 평가하려는 추세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 한편으로, 기초학문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사회에서나 대학 내에서 현저하게 약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초학문의 위기는 곧 대학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며, 전체 학문의 위기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서울대학교는 경제논리만 앞세우는 가시적 성과주의와는 무관하게, 민족과 사회의 장래를 위한 장기적인 안목으로 학문 간 균형 발전을 도모해야 할 것이며, 특히 기초학문의 육성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명서 파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열흘 뒤에는 사범대 교수들이 움직였다. 두뇌한국21(BK21) 사업의 일환으로 물리교육과 교수 5명 중 3명이 자연대로 이적하는 바람에 홀로 남아 물리교육과 학생 157명을 이끌던 박승재 교수(65)가 지난 4월 과로로 쓰러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게다가 5월24일 사범대가 신규채용 교수후보로 올린 서울대 출신 3명에 대해 대학 인사위원회가 교수 쿼터제를 근거로 전원 부결하는 바람에 대학본부측과 사범대 간 감정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였다.

서울대 내분…‘비상구’ 안 보인다
지난 5월29일 발표한 사범대 성명서는 “대학 운영에 지나친 기업경영 논리를 도입하여 신상품을 만들어 재화를 창출할 수 있는 대학이나 학과는 집중적인 지원을 받고, 그렇지 못한 기초학문 분야나 민족의 앞날을 가늠할 인재를 교육하는 교원양성기관인 사범대학은 홀대를 받는다”고 분개하면서 자연계열 교수의 즉각 충원과 교수 임용 등에서 사범대의 자율권 보장 등 구체적인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한편 바로 전날 물리교육과 학생들은 교수들과는 별도로 학습권 침해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서울대 내분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번 서울대 사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지난 몇 년간 대학 구조조정의 틈바구니에서 벼랑 끝으로 내몰린 기초학문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대 출신 이기준 총장(응용화학부)에게 쌓였던 불만의 표출이다. 특히 시간이 흐를수록 총장 개인에 대한 반감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인문·사회·자연대 교수들은 “이기준 총장이 잔여 임기 중 학내의 비판적 여론을 겸허히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총장이 합리적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총장의 거취문제를 포함해 서울대학교의 위상을 정상화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공개적으로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며 총장을 압박하고 있다.



“이기준 총장은 역대 서울대 총장 중가장 개혁 지향적이고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이총장의 행보를 보면 교육부가 요구하는 것에 더 가까운 개혁안을 내놓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교수 한 사람 한 사람과 접촉해 설득하는 일도 할 사람이다. 새 총장을 뽑으면서 은근히 지금까지 논의하던 서울대 개혁안은 없던 일로 하고 원래대로 돌아가기를 기대한 사람이 있다면 판단착오다.”

지난 98년 10월21일, 딸의 고액과외 사건으로 중도하차한 선우중호 총장의 뒤를 이어 이기준 총장이 당선되자 한 사회과학대 교수가 한 말이다. 그 교수에게 앞으로 서울대 개혁안이 어떻게 진행될 것 같으냐고 묻자, 이총장이라면 대다수 교수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더욱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할 것이라 예측했고, 그 예측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평소 추진력 있는 인물로 정평이 나 있던 이기준 교수는 총장후보 5명 가운데 51%의 지지를 얻어 신임총장에 선출되었다. 당시 서울대는 모집단위 광역화와 입학정원 감축, 법대·의대·경영대 전문대학원 체제 등을 골자로 한 서울대 구조조정안을 발표한 뒤 뒤숭숭한 상태였다. 교수들도 이해찬 전 교육부 장관이 드라이브를 건 개혁안 지지파와 반대파로 갈려 첨예하게 대립했다(물론 교수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가 다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교수들이 이기준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 데에는 내심 이총장의 추진력으로 교육부의 외풍을 막아달라는 기대도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총장의 이후 행보는 교수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지난 99년 이총장이 추진한 ‘교수인사제도 개선안’(교수 정원관리, 조교수 계약제 및 연봉제 도입, 부교수 정년보장 철폐 등)이 교수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 BK21 사업 추진과 관련해 선우중호 총장에 이어 공학계열의 이총장이 기초학문을 차별한다는 불만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인문·사회·자연대 교수들이 총장의 독단적인 학교운영 방식에 반발, 처음으로 퇴진을 촉구한 것이 99년 12월이다.

지난해 말 서울대교수협의회는 최초로 총장 중간평가를 실시해 총장 압박카드로 이용했다. ‘서울대학교 발전을 위한 설문조사’ 명목으로 진행한 이 조사에서 이기준 총장은 행정, 교육, 대학 구조조정, 후생복지 등 5개 분야에서 7점 만점 중 평균 4점을 밑도는 점수를 받았다. 특히 각 분야별 항목 중 대학의 독립성(2점), 교수 처우개선(1.9), 학문 간 균형발전(2.2), 정부 설득(1.9) 등은 평균에도 훨씬 미치지 못해 총장에 대한 교수들의 불만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그렇다면 작금의 사태는 교수들의 요구대로 이총장만 퇴진하면 깨끗이 해결될 것인가. 다음 총장 선거 때 절대로 공대 출신은 안 뽑겠다는 분위기에 대해 한 대학관계자는 현 총장이 인문대나 자연대 출신이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말한다.

“모든 비난의 화살이 이총장을 향하고 있지만 결국 교수들의 불만은 연구비다. 기초학문 연구비는 응용학문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식의 문제가 계속 제기되어 왔고, 실제로 연구비 때문에 기초학문 분야 교수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무조건 지원액수를 늘려 달라거나 응용학문 분야와 같은 수준으로 해달라는 것은 무리다. 연구의 성격에 따라 지원액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어쨌든 인문·사회·자연대 교수들의 문제 제기로 시작된 총장과 교수들 간 갈등은 이제 기초학문과 응용학문 간 소모적 경쟁으로 확대하는 조짐을 보인다. 사범대 교수들은 성명서에서 “서울대학이 학문 영역 간은 물론 단과대학들 간 불필요한 견제와 경쟁을 조장하고, 서로 간 신뢰를 해치는 분위기”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이기준 총장은 “학문에 대해 보호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자생력을 갖추면 지원을 해야지 보호한다는 게 오히려 기초학문을 고사시킨다”며 현 정책을 고수하겠다는 강경한 의사를 비쳤다. 서울대 내분이 그리 쉽게 진화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문제는 이런 내분이 대외적으로는 밥그릇 싸움처럼 비춰져 결국 서울대 이미지만 손상시킨다는 데 있다. 박이문 전 포항공대 교수(철학)는 ‘한 이상주의자의 대학관’이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어느 나라 대학에서도 그렇지만 우리 나라 대학이라고 봉급, 시설, 연구비, 사회적 대우 등과 관련한 불만과 불평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사실 현재 한국은 교수의 천국에 가깝다. …교수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교육과 학문 탐구다. 우리 나라 대학은 물질적·제도적 개혁도 절실하지만 그에 앞서 교수의 의식이 먼저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 아무리 괴롭더라도 말이다. 물론 나는 이상주의자다.” 국민의 입장에서 서울대가 이상주의자의 전당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지나친 요구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주간동아 2001.06.14 288호 (p40~41)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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