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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權府’ 국정원 40년

정권 사수…국가 안보…‘영욕의 40년’

‘정치공작 산실’ ‘무소불위 권력’ 씻기지 않는 오명… ‘정보기관’ 본연 임무 찾아 서서히 양지로

  • < 김 당 기자 > dangk@donga.com

정권 사수…국가 안보…‘영욕의 40년’

정권 사수…국가 안보…‘영욕의 40년’
본인은 국가안전보장 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으로서 투철한 애국심과 사명감을 발휘하여 국가에 봉사할 것을 맹서(盟誓)하고, 법령 및 직무상의 명령을 준수·복종하며, 창의와 성실로써 맡은 바 책무를 다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국가정보원의 신입 직원들은 원장 앞에서 국가정보원 직원법(제15조)에 규정된 이런 선서를 해야 한다. 1999년 1월21일 개정된 국가정보원 직원법(법률 제5682호)에 따른 것이다. 국가안전기획부가 국가정보원으로 다시 태어난 뒤에 생긴 변화한 풍속도 중 하나다. 그 전신인 중앙정보부 시절에는 신입 직원을 어두운 암실에 집어넣고 선서를 하게 했다. 안에 있을 때는 물론 퇴직한 뒤에도 지득(知得)한 기밀을 절대 외부에 누설하지 않겠다는 보안서약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은 것은, 이 특정직 공무원은 입사와 동시에 사표를 내고 업무를 시작한다는 점이다. 역설적이지만 이 사표를 근거로 국정원은 직원에게 ‘사고’가 생기면 언제든지 “우리 직원이 아니다”라고 ‘도마뱀 꼬리 자르기’를 할 수 있다. 국내외에서 비합법적 정보수집 활동을 하다 발각되거나, 또는 북한에 잠입해 특수공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는 이런 ‘사고’가 흔치는 않지만 특수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 같이 익명(匿名)으로 존재한다. 수천 명의 직원 중 정무직인 원장과 1·2·3차장 그리고 기조실장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공보관만이 신원(身元)을 공개할 수 있는 특수 집단이다. 심지어 죽어서도 이들의 신원은 비공개이고 더러는 신원(伸寃)하지 못한 억울한 죽음으로 남기도 한다. 그래서 정부 부처 중 유일하게 청사 내에 보훈탑이 있어 순직자 42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 중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피살당한 최덕근 영사처럼 일반에 알려진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어떤 임무를 수행하다 죽었는지 베일에 싸여 있다.

전쟁에 대비한 무력집단인 군(軍)을 빼고는 평시에도 이처럼 보안과 익명을 생명으로 삼는 집단은 없다. 그것이 이들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익명에의 정열이 조직을 유지하는 덕목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익명에의 정열과 맹목적인 국가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이들은 국가안보를 정권안보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그 국정원이 6월10일로 창설 40주년을 맞이했다.



1961년 중앙정보부가 생긴 것은 한국의 국가정보기관 역사에서 크게 두 가지 의의를 갖는다. 첫번째 의의는 중앙정보부의 출범으로 전략적 차원의 국가정보기관이 처음 생겼다는 점이다. 45년 8월 광복 후 중앙정보부가 창설될 때까지 군과 경찰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온 정보기관은 전술적 또는 부문 정보기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에 비해 명칭에서부터 권한에 이르기까지 미 중앙정보국(CIA)을 모델로 한 중앙정보부(KCIA)는 명실상부한 국가정보기관의 형태를 띠었다.

또 다른 의의는 해외정보 수집 기능을 갖춘 중앙정보부의 출범으로 비로소 해외정보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 해외정보(대북정보 포함)에 대한 경험은 군이 전술적 필요성에 의해 정보를 운영한 것이 전부였다. 대북 전술 첩보조직이었던 첩보부대(HID)와 특무대, 그리고 헌병대 정도가 고작이었다. 중앙정보부 창설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은 그 모델이던 CIA였다. 비록 규모는 비교가 안 되지만 특히 조직과 기구 편제 면에서 중앙정보부는 선진 정보기관인 CIA 모델을 답습했다. 문제는 하드웨어는 모방할 수 있지만 소프트웨어는 모방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런 점에서 중정 창설에 더 많은 영향을 주었고, 영향력이 그 후로도 오랫동안 계속 된 것은 군의 정보 경험과 일본식 첩보수집과 공작에 대한 이해였다. 즉 하드웨어(조직)는 미국식이었지만 그것을 운용하는 소프트웨어(인력)는 일제시대 때 군과 경찰에서 경험을 전수받은 군과 경찰의 그것, 즉 일본식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역시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정보의 최종 사용자가 된 박정희 대통령의 정보에 대한 이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한마디로 말해 ‘옷’만 미제(신식)일 뿐 사람은 일제(구식)였던 것이다. 다음은 안기부 차장을 지낸 L씨의 증언이다.

“정보에 대한 일본식 이해는 만주사변에서 일본군, 특히 헌병 장교의 역할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의 기본 임무는 조작과 공작이었다. 즉 현대적 의미의 CA(Covert Action)였다. 그러다 보니 중정의 초기 운영도 음모적인 시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중정이 창설된 후 70년대 중반까지 대북 정보를 포함한 해외정보를 담당한 사람은 일본군 헌병 출신의 이철희 차장이었다. 중앙정보부 시절 그의 정보관(情報觀)은 일본식 정보개념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박정희 대통령의 정보관에도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전해진다. 즉 정세를 조작하고 이를 위해 정치문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주임무였다.”

이처럼 서구식 정보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정치 안정이 최우선 목표가 되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중앙정보부의 초기 기능은 정보기관 본연의 길에서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국내보안·정보 분야보다 비교적 정치적 영향을 덜 받은 해외 정보 분야에서도 체제 반대세력을 감시하는 것이 주임무가 되어 버릴 만큼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권 사수…국가 안보…‘영욕의 40년’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정치체제의 변환과 함께 명칭도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뀌면서 중앙정보부는 중대한 변환을 맞이한다. 그러나 국가안보와 정권안보를 동일시하는 정보기관의 전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치적 안정이라는 정보기관 존립의 최우선 목표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기관 내부로 눈길을 돌리면 이철희씨와 같은 리더십이 퇴진하고 일본군 색채의 운영방식이 퇴색한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었다.

1980년대 안기부 운영방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른바 ‘관계기관대책회의’를 들 수 있다. 이는 정보기관인 안기부가 법적인 근거는 없지만 실질적으로 정치현실을 강제하는 통치기구로서의 역할을 맡은 것을 의미한다. 1987년 1월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으로 드러난 것처럼, 안기부는 80년대 정치 안정에 영향을 주는 중대사건이 생길 때마다 수시로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열어 대책을 마련하는 등 정국 운용을 주도했다. 이는 전통적 의미의 정보수집 및 분석기능을 뛰어넘어 정보수집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정책 집행결과를 점검 조율하는 기능까지 장악한 것을 의미했다. 즉 정보수집, 정책대안 모색, 집행, 모니터, 피드백(feed-back)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안기부가 개입한 것이다.

이처럼 전지전능(全知全能)한 힘을 가진 ‘올 라운드 플레이어’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안기부의 ‘국정 개입’은 안기부의 위상과 이미지에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우선 이로 인해 국가 정보기관에 대한 국민의 올바른 이해를 어렵게 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즉 제3공화국과 유신정권 그리고 제5공화국의 나쁜 이미지와 연계해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주도하는 법 위에 군림하는 기관, 정보를 자의적으로 운용하고 국가 안보가 아닌 정권 안보를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라는 인상이 국민에게 각인되었다. 그 유산은 지금까지도 정보기관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큰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국정 개입’으로 인한 또 다른 부정적 영향은 정보수집 기능이 상대적으로 약화했다는 점이다. 안기부 본연의 기능인 정보수집 기능이 정책수립 기능과 혼재함으로써 정보 운용자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정책수립 기능 쪽에 더 쏠렸다. 정보 사용권자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그 쪽이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정보수집 기능은 상대적으로 약화해 비밀정보를 비밀수단으로 수집하는 전문적인 기능으로서의 정보수집에는 소홀해졌고, 훈련 등으로 정보수집을 위한 자산을 축적하는 데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정보자산의 축적과 같은 일은 장기적으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일이었으나 이를 소홀히 함으로써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문민정부 : 국가안보와 정권안보의 혼동‘

이른바 ‘문민정부’라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도 안기부는 큰 변화를 겪었다. 그것은 일단 안기부에 대한 통제 형식을 띠었다. 김영삼 정부는 94년 1월 국가안전기획부법을 개정해 국가보안법 제 7·10조(찬양-고무·불고지) 수사권 및 보안감사권을 폐지하고, 방첩·대테러·국제범죄조직 업무를 추가해 94년 2월 국제범죄신고상담소를 개소했다. 또 94년 6월에는 국회 상임위로 정보위원회가 설치되어 사상 처음으로 국회에 의한 정보기관의 통제가 시도되었다. 내부적으로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사라져 정보수집과 정책수립 기능이 분리되었다. 안기부는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 서울 남산과 이문동 청사에서 근무해 온 ‘두 지붕 한가족’ 시대를 끝내고 95년 9월 내곡동 통합 신청사로 이전하기도 했다. 안기부는 통합 신청사 준공을 계기로 PC통신 하이텔에 대국민 정보서비스 창구를 개설해 ‘국민에 안기는 안기부’를 표방했다.

그러나 안기부는 안기부법 개정 이후 줄곧 정보위를 상대로 재개정을 추진했고, 결국 김영삼 정부는 96년 12월 야당과 재야의 반대를 무릅쓰고 안기부법을 재개정해 국보법 제7·10조 수사권을 원상 회복시켰다. 또 각종 정치개입 사례와 예산 횡령(여당 선거자금 불법 전용) 사건, 그리고 북풍공작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국회 정보위의 통제를 받는 문민정부하에서도 안기부는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히려 더 교묘한 방법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정보기관의 예산을 여당 선거자금으로 빼돌리는 등 구태를 답습했다. 결국 김영삼 정부의 안기부 개혁은 IMF 긴급구제금융 사태를 초래한 김영삼 정부의 운명과 비슷한 ‘외화내빈’의 실패로 끝난 셈이다.

선거에 의한 50년 만의 여야 정권교체라는, 안기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혁명적 상황’ 속에서 출범한 이른바 ‘국민의 정부’의 안기부 개혁은 잘못된 과거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98년 2월25일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3월5일 제22대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취임한 이종찬은 ‘작지만 강력한 정보기관’을 표방하며 명칭을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국가정보원(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NIS)으로,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써온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부훈(部訓)을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원훈(院訓)으로 바꾸고, 총원의 11.1%를 줄이는 등 조직과 기능을 대폭 개편했다. 국정원은 이종찬 초대 원장에 이어 천용택·임동원·신건 4명의 원장을 맞이했다.

4명의 원장 중 이종찬 초대 원장은 정규 공채 1기 출신으로 누구보다 국정원을 잘 아는 처지였지만 ‘손에 피를 묻히는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게다가 이원장은 안기부 개혁이라는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 비밀정보기관 조직의 생리상 거부감이 큰 외부 인사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외부에서는 이것을 ‘거물 정치인’인데다 대권 후보 중 한 사람으로서 ‘인력 풀’의 용량이 큰 그에게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내부에서는 ‘점령군’쯤으로 간주했다. 특히 수십 년간 지속된 폐쇄 조직을 개방형으로 탈바꿈시키려는 노력을 포함한 그의 행보는 종종 ‘정치적 행보’로 인식되었다.

이종찬 원장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은 육사 16기 이원장 동기생 천용택 2대 원장이 맨 먼저 한 일은 외부 출신 차장을 내보내고 내부인사들로 보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개방형에서 폐쇄형으로 선회하는 것을 의미했다. 상당수 직원들은 이런 조처에 내심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6개월을 지나야 업무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는 국정원을 맡아 이제 막 일을 시작할 때쯤인 7개월 만에 대통령 정치자금과 관련한 실언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

군인, 외교관, 관료를 거치는 동안 외교·안보·통일 분야를 두루 섭렵한 전략가인 임동원 3대 원장에 대한 평가는 매우 양극적이다. 임원장 부임 당시 대공정책실장을 지낸 국정원 간부 K씨는 당시 이렇게 평가했다. “임원장은 국정원장으로서는 전무후무하게 외교·안보·통일 분야를 두루 섭렵한 분이다. 이런 분이 원장으로 오기는 처음이다. 앞으로 국정원의 업무 특성상 중요한 군 및 청와대와의 조화로운 업무 협조와 내실 있는 조직 운영이 예상된다.” 국정원 조직의 골간이 해외정보·국내보안·대북 분야를 각각 담당하는 1·2·3차장제로 3분된 것에 비추어 사실 임원장의 경력은 중정·안기부 시절을 포함한 역대 국정원장 중 최적임자였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안팎에서 모두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가장 흔한 비판은 DJ ‘햇볕정책’의 전도사인 임원장이 대북분야만 챙기고 국내보안 쪽은 외면했다는 것이다. 정보기관의 힘은 생산 정보의 질량(質量)과 비례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임원장 체제에서 국내파트는 해외·대북 파트보다 과거에 비해 힘이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바로 그 때문에 적극적인 정보수집활동을 선호하는 국내 I.O.(정보관) 가운데 상당수는 임원장의 조직 운영방식에 비판적이었다. 이런 비판은 여당 쪽에서도 컸다. 최근 여권에서 발생한 정풍 파문 때 민주당의 한화갑 최고위원은 이런 말을 했다.

“과거의 여당은 확실히 행정부보다 우위에 있었다. ‘관계기관대책회의’를 공공연히 열고 ‘안가’회의 결과를 발표했고 행정부에서 시행했다. 당에서 국정운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대처했다. 우리는 민주국가의 모범을 보이느라고 정보기관과의 유대가 끊어졌다. 당과 그런 협의가 없다. 정보를 솔직히 모른다. 정보는 청와대와 정부가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필요한 역할을 해야 할 청와대가 나름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여당의 현주소고, 과거와의 차이점이다.”

한최고위원의 발언은 권력의 핵심인 청와대에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지 정보기관과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당 내, 특히 동교동계 구파 내에서는 여당에 일절 정보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국내정치 정보수집활동 자체를 현저하게 위축시킨 임원장의 조직운영 스타일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임원장 재임중 동교동계 구파로 권노갑씨의 측근인 K 전 의원의 기조실장 부임설이 끊임없이 나돈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다음은 중간간부 S씨의 증언이다.

“K 전 의원이 여권 실세의 힘으로 기조실장으로 오려 한 것은 사실이다. 그 실세가 기조실장은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가신이 해야 한다는 마인드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의를 받은 대통령께서 임원장에게 ‘K 전 의원을 기조실장으로 쓰면 어떻겠느냐’고 의향을 물었는데 임원장이 ‘정치인 출신 외부 인사가 그 자리에 오면 줄 대기 등 내부 부작용이 커진다’고 완곡하게 거절해 무산된 것으로 알고 있다. 임원장이 외풍을 막은 것은 평가해야 한다.”

임원장의 조직 운영 및 인사가 가져온 작지만 중요한 변화는 그가 원장으로 부임할 때 외부 인사를 한 명도 데려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관행은 신건 현 국정원장으로 이어졌다. 신원장은 단신으로 입성했을 뿐만 아니라 전임 원장이 임명한 비서실 직원을 아무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다. 게다가 신원장은 1차장(최명주, 전북 출신), 기조실장(장종수, 강원)을 내부 인사로 발탁해 기존의 김은성 2차장(서울, 원적은 전남), 김보현 3차장(제주)과 함께 차장급 간부 전원을 내부 인사로 보임했다(기조실장은 1급이지만 정무직이기 때문에 통상 차장급으로 간주한다). 차장급 4명 전원을 내부 출신으로 보임하기는 국정원 40년 역사상 처음이다. 다음은 이번 인사에 대한 국정원 간부 Y씨의 평이다.

“이번 인사를 계기로 앞으로 차장까지 외부 인사가 원내에 들어오기가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공채 출신 원장이 나오는 것 아니냐는 ‘원장 대망론’까지 조심스럽게 점칠 만큼 정치적 중립을 이뤘고 이제 그럴 만한 연륜도 되었다는 것이 내부의 평가다.”

앞서의 중간간부 S씨는 “현행 법체계에서 정보기관의 정치적 중립은 정보의 최종 사용권자인 대통령과 운영권자인 원장의 의지에 달렸는데 현 대통령은 정보기관이 적법활동을 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정보를 사용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그런 점에서 국정원이 과거와 달리 정권안보가 아닌 국가안보를 위해 운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제 국정원이 정권안보와 국가안보를 혼동하지 않는 불혹(不惑)의 나이가 되었다면 다행한 일이다.





주간동아 2001.06.14 288호 (p18~21)

< 김 당 기자 > da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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