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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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 상실한 재탕 “이제 그만”

  • < 강헌/ 대중음악 평론가 authodox@orgio.net >

    입력2005-01-21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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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 상실한 재탕 “이제 그만”
    1950년대 말 디스크의 한 면에 10곡 가까이 수록할 수 있는 LP 레코드 시대가 열렸을 때, 한두 곡의 신곡 외의 빈 칸을 채우기 위해 지난 시대 트로트 음악들이 리메이크의 전성기를 맞이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노래 하나가 히트하면, 그 노래는 그 음반사의 다른 가수의 음반에 지겹도록 되풀이되어 실리는 관행이 이어졌다.

    이런 재탕 삼탕의 시대는 70년대 개막과 더불어 통기타로 무장한 싱어송 라이터(singer-songwriter)라는 이름의 청년문화 전사들에 의해 저지당하면서 ‘엔터테이너‘가 아닌 ‘아티스트’의, 그리고 ‘히트곡’이 아닌 ‘앨범’이 존중받는 판도를 형성하였다. 한국의 대중음악은 순식간에 비약하는 황홀경을 경험한다.

    그리고 서기 2001년, 한국의 음반시장은 끝도 없는 편집 앨범 퍼레이드와 리메이크 앨범 열풍의 서슬 아래 독창적인 예술가 정신과 앨범이라는 종합적 음악 역량은 날마다 화형대로 끌려가는 중이다.

    4장짜리 CD를 2만원도 되지 않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130만 세트 판매라는 신기원을 이룩한 발라드 모음집 ‘연가’가 모든 것을 잠재우자 아예 6장을 묶은 모방작인 ‘애수’가 하이에나처럼 남은 고기를 탐하더니, 때이른 여름 시즌을 노린 댄스 음악 모음집을 출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박리다매 마케팅의 도덕성을 비난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이 기획은 한두 곡의 알량한 히트곡으로 ‘앨범’의 존엄성을 훼손한 한국의 음반 프로덕션 시스템에 대한 준엄한 경고이자, ‘리어카 불법음반’이 거의 사라진 지금 그 ‘정수’만을 싼 가격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구매자들의 한계효용의 욕망에 부응하는 일그러진 우리 음반시장 논리의 자화상이다.



    문제는 졸속적이고 부화뇌동하는 기획력과 탐욕적인 이윤동기다. 그 안일함은 비단 여배우의 화보를 앞세운 편집음반들뿐만 아니라 아이들(idol) 스타들의 리메이크 앨범에 그리 다를 바 없이 적용된다. 굳이 황금거위의 배를 가른 용렬한 우화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스타의 지명도를 앞세워 최대한 쥐어짜려는 단말마적인 기획들은 보기에도 안쓰럽다.

    3집 앨범의 미디어 홍보를 마감한 지 고작 8주 만에 ‘Memories & Melodies’라는 근사한 타이틀로 리메이크 앨범을 내놓은 4인조 여성 그룹 핑클의 행보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길옥윤-혜은이 콤비의 1976년 히트곡 ‘당신은 모르실 거야’를 필두로 12곡의 리메이크 넘버를 탑재한 이 요정들의 신작은 자신들을 존재하게 한 지난 시대 유산에 대한 예술적 경의는 거의 기대하기 어려운, 그저 이들이 노래방에서 노동에 가까운 혹독한 유희의 기록을 남긴 것과 다르지 않다. 편곡은 천편일률적인 리듬앤블루스 패턴이며 템포 역시 기계적인 메트로놈 비트로 일관한다.

    이 양상은 한마디로 비극이다. 비록 거칠기 그지 없었지만 연전에 윤도현 밴드가 발표한 ‘한국 록 다시 부르기’ 앨범에는 최소한의 도전 의지와 조심스러운 고뇌가 서려 있었다. 우리의 대중 음악사는 기본을 상실한 상혼으로 인해 또다시 능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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