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2

2001.05.03

네티즌 자유 가로막는 ‘實名制’

  • < 민경배 사이버문화연구소장 >

    입력2005-01-21 14: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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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티즌 자유 가로막는 ‘實名制’
    상업 사이트를 이용하려고 신규 회원가입을 신청할 때 부딪치는 가장 큰 고민이 바로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우려다. 어디서 어떻게 나의 신상정보가 함부로 이용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회원 가입양식에 가명을 적어 넣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명백한 불법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주민등록번호 자동생성기 소프트웨어 이용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다는 것도 공공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요즈음 상업 사이트에 신규 회원가입을 신청하려는 사람들은 적잖은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 상당수 사이트들이 ‘귀하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는 메시지를 띠우며 가입 여부를 엄격히 관리하기 때문이다.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조회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가 인터넷 곳곳에서 널리 작동하였다는 사실은 솔직히 기분 찜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터넷 실명제는 이미 이렇게 시작되어 버렸다.

    인터넷을 둘러싼 사건과 사고가 잇달아 터지면서 익명성이 초래한 갖가지 폐해와 부작용을 지적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 대책으로 제기한 것이 다름아닌 인터넷 실명제다. 모든 인터넷 이용을 실명으로 한다면 이용자의 책임의식을 강화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건전한 인터넷 문화가 촉진될 것이라는 논리이다. 사실 인터넷 실명제는 예전부터 여러 차례 제기해 왔던 문제이기에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네티즌의 자율적인 양식에 호소하면서 실명제를 권유하는 캠페인 성격을 띠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소프트웨어적인 장치를 동원하여 강제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중대한 차이가 보인다. 이제 네티즌들은 순순히 실명제에 투항하든지 아니면 아예 인터넷을 끊어버리든지 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잠시 착각하는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인터넷의 익명성 문제가 과도하게 불거지는 과정에서 마치 ‘인터넷=익명의 공간’이고, 반대로 ‘현실세계=실명의 공간’이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성립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이 과연 실명의 사회인가. 인터넷이 보편화하지 않았던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자주 현대사회의 익명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아파트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것이 도시인들의 삶이요, 대중사회 속에서 자신을 숨긴 채 살아가는 고독한 군중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분명 현실세계도 익명의 공간이다. 그리고 대도시에는 익명성으로 인해 이런저런 폐해와 부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도 현실세계를 실명화하자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유독 인터넷의 익명성 문제에 대해서는 극구 실명제를 고집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해법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현실도 ‘익명의 공간’… 失明制 될라

    물론 현실세계는 익명적이라 해도 사람들의 육체적 모습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인터넷과는 다르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도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비록 육체적 모습은 모니터 뒤편에 감추어져 있지만, 자신의 심리적 모습은 ID나 대화명 또는 개성 있는 문체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표출된다. 네티즌들이 현실세계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자기 모습이나 행동을 무차별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익명성 그 자체보다는 현실과 다른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더 정확한 진단일 듯싶다.

    익명성은 네티즌들에게 자유의 날개와 같은 것이다. 강제적인 실명제는 네티즌들의 자유로운 소통을 가로막고, 결국 인터넷 공간을 황폐화할 뿐이다. ‘실명제’(實名制)가 인터넷에 짙은 어둠을 몰고 올 ‘실명제’(失明制)로 작용할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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