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5

2001.03.15

사라진 ‘김생碑’ 안성에서 찾았다

비 주인 서명구 후손들 이장하며 함께 옮겨 … “훼손 우려 비밀리에 이전”

  • < 소종섭 기자 ssjm@donga.com >

    입력2005-02-16 15:5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사라진 ‘김생碑’ 안성에서 찾았다
    발견 6개월 만에 홀연히 사라졌던 ‘金生 集子碑’(김생 집자비·이하 김생비)의 위치가 확인됐다.

    99년 1월 경기도 포천군 소홀읍 송우리에서 발견돼 서예계와 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김생비는 통일신라시대의 명필인 김생(711~90년)의 글씨를 모아 만든 비석으로 높이 175cm에 가로 68cm, 두께는 31.3cm다. 1791년에 만들어진 이 비의 주인은 영조 때 이조참판을 지내고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던 서명구(1692∼1754년). 비문은 형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낸 남유용(1698∼1773년)이 지었다. 앞면에는 석봉(石峰) 한호(韓濩)의 글씨를, 옆면과 뒷면은 김생의 글씨를 집자해 새겼다는 사실이 비 옆면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김생비는 발견 6개월 만인 7월1일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에 따라 김생비의 행방을 추적해 온 ‘주간동아’는 지난 2월22일 이 비가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으로 옮겨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국보급 문화재 관리 허술 드러내

    사라진 ‘김생碑’ 안성에서 찾았다
    김생비의 행방에 대해 서예계와 학계에서 큰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김생비는 고려 광종 5년(954년), 경북 봉화군 하남면 태자사에 세워진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일명 백월비) 이후 유일하게 김생의 글씨를 모아 새긴 비석이다. 지난 99년 김생비를 처음으로 공개한 전 계명대 교수 정상옥씨는 “김생의 글씨가 조선 중기까지 실재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정 전 교수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심사위원을 지냈고 중국 산둥대학에서 서예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가. 그는 김생비의 발견은 백월비만을 김생의 유일한 집자비로 봤던 서예계의 통념을 깨고 서예사를 새로 써야 하는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비문 내용이 신임사화(辛壬士禍·경종 때인 1721∼22년,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의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벌어진 소론과 노론의 당쟁으로 소론이 노론을 쫓아내고 정권을 잡은 사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담았다는 점도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

    만들어진 지 200년이 넘었지만 바로 어제 새긴 것처럼 글씨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주는 김생비는 일반인들이 볼 수 있는 유일한 김생 집자비이기도 하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백월비는 용산에 새 국립박물관이 만들어질 때까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발견 당시 전문가들로부터 ‘국보급 문화재’로 평가받았던 김생비가 갑자기 사라지게 된 이유는 비의 주인인 서명구의 후손들이 서명구의 묘를 이장하며 김생비도 함께 이전했기 때문. 후손인 서충석씨는 “묘가 있던 곳이 98년 택지개발 예정지구가 돼 옮길 수밖에 없었고, 비가 문화재 가치가 있다고 해서 함께 옮겼다”며 “동네 아이들이 깡통 등으로 비석을 두드리는 등 훼손 우려가 있어 빨리 옮기게 됐다”고 설명했다.

    지난 2월22일 묘가 있던 경기도 포천에 가본 결과 남아 있는 서명구의 후손 묘 2기에는 분묘 이장공고가 붙어 있었다. ‘포천군과 대한주택공사가 공동 시행하는 포천 송우 택지개발 사업 지구에 편입돼 조속히 이장하여야 하므로 분묘 연고자는 조속히 연락을 달라’는 내용.

    그렇다면 후손들은 왜 유독 서명구의 묘만을 급하게 옮겼을까. 김생비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학자와 서예인들이 탁본을 뜨러 오가는 통에 묘 주위가 어지럽혀지고 비석이 손상될 것을 우려했다는 설명이다. 서씨는 “김생비로 장사할 것도 아닌데 관광버스를 타고 사람들이 몰려오곤 해 자손된 입장에서 곱게 보존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후손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옮겨진 김생비의 위치를 비밀에 부쳐왔다. 안성시 보개면에 있는 김생비의 현재 위치는 일반인이 쉽게 찾기 힘든 한적한 산중턱에 있다.

    김생비 이전에 대한 나름의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김생비가 갑자기 사라진 사건은 여러 사람들을 곤란에 빠뜨렸다. ‘월간서예’ 최광열 사장도 김생비가 갑자기 사라져서 곤혹스러운 경험을 했던 사람.

    “99년 9월쯤 일본인 서예인들 40여명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 있는 서예문화재를 보러 온 그들은 충남 예산에 있는 추사 김정희 고택(古宅) 등을 방문한 뒤 김생비를 보고 싶다고 해 버스 한 대를 대절해 안내했다. 그런데 비가 있다는 포천에 가보니 비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한마디로 황당했다. 할 수 없이 이장한 자리에서 기념사진만 찍고 사진자료를 가지고 설명해줬다.”

    당시 일본인 서예가들이 “김생처럼 유명한 사람의 집자비를 이렇게 소홀히 다룬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한국의 문화재 경시 풍토를 비판,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최사장과 동행했던 한 서예인은 전했다.

    포천군 문화재 담당자인 정만규씨는 “비가 옮겨진 뒤에야 우연히 이장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아닌데 후손들이 자발적으로 이장하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정씨는 또한 “김생비가 포천에 있을 때 문화재와 관련한 행정기관의 조사는 물론 어떤 요청도 받은 바 없다”고 말했다. 후손인 서씨도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에 비를 옮긴 사실을 행정기관에 알리지 않은 것은 물론 아무런 후속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주간동아’와 함께 안성시 보개면의 이전 현장을 답사한 정 전 교수는 “걱정을 많이 했는데 보존 상태가 좋아 안심이 된다”며 “중요한 문화재인 만큼 각별한 조치가 요구된다. 포천군의 협조를 얻을 수 있다면 원래 세워져 있던 포천에 비를 이전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고 견해를 밝혔다. 포천군 문화재 담당자 정씨는 “후손들이 비를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 검토해 보겠다. 아무래도 포천에 있는 게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손 서씨도 기증할 생각이 있다. 한때 모 대학 박물관에 기증 의사를 밝혔다가 취소하기도 했다는 서씨는 “내 나이 올해 70세다.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나. 중요 문화재라고 하니 국립박물관이든 대학박물관이든 공공기관에서 김생비를 잘 보존만 해준다면 무상으로 기증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행정 당국의 문화재 관리 시스템 확립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국보 등 지정문화재의 경우는 매매 등으로 인해 소유자나 위치가 바뀌었을 경우 신고하게 돼 있지만 비지정문화재의 경우는 최소한의 법적인 보호장치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언제든 제2의 ‘사라진 김생비’가 생길 수 있는 것이 우리 문화재 행정의 현주소다.

    고미술 전문가인 김호년씨는 “선조들의 혼이 담긴 문화재에 대해 당국이 너무 무관심하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이벤트성 사업에만 몰두할 뿐 문화재 하나하나가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을 끌어들이는 상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문화재에 대한 관료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