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5

2001.03.15

낯 두꺼운 일본 “역사는 쓰기 나름”

왜곡 교과서 파문 일파만파… 일 지식인들조차 비판, 한·중 우려 표명엔 “내정간섭”

  • <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입력2005-02-16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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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 두꺼운 일본 “역사는 쓰기 나름”
    벌써 10년도 더 지난 어느 날의 웃지 못할 일화 한 토막이 문득 떠오른다. 일본 중부 항구 도시 고베(神戶)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택시를 타고 목적지로 향하며 운전기사와 몇 마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내가 한국인임을 알아차린 운전기사가 느닷없이 이런 말을 던졌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나뉘어 있다면서요?”

    마치 중대한 발견이라도 한 양 우쭐하는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전신의 맥이 풀렸다. 몰라도 이렇게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일본의 보통사람들은 그만큼 한국에 관해 무지하고 무관심하다. 한반도 분단이 새삼스러운 그들에게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화, 그리고 분단의 내력까지 알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연목구어(緣木求魚)인 것이다.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엄청난 피해를 본 이웃나라들이 일본의 교육, 그 중에서도 역사 교육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기억하기 싫은 역사일망정 곧이곧대로 가르치고 배워, 그 토대 위에서 미래를 이야기하자는 뜻인 것이다. 사정이 그럼에도 걸핏하면 그 엄연한 역사가 둔갑을 부려 잊었던 상처를 들쑤시고 눌러두었던 반일감정을 자극하고 만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로 인해 한일간에 큰 마찰이 빚어진 것은 1980년대 초였다. 그 무렵 상징적인 사건의 하나가 ‘이에나가 재판’ 혹은 ‘교과서 재판’으로 불린 법정 다툼이었다. 한 양심적인 학자가 올바른 역사 인식에서 출발한 고교 역사 교과서를 집필해 일본정부에 검정을 신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던 당시의 역사 왜곡은 오늘의 교과서 파동과는 정반대의 양상을 띠었다.



    도쿄 교육대학 명예교수였던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씨는 애매한 표현으로 진상을 얼버무리는 종래의 교과서에 질려 새 교과서를 집필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가령 ‘조선에서는 민중의 반일 저항이 자주 일어났다’고 쓴 대목을 ‘뚜렷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토록 하는 등 부당한 간섭을 했고, 이에 불복한 이에나가 교수가 법에 호소함으로써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판은 지루하게 시간만 끌면서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게임처럼 되어 버렸다.

    낯 두꺼운 일본 “역사는 쓰기 나름”
    어쨌거나 이 첫 역사 교과서 파동이 ‘양심의 싸움’이었던 데 반해, 이번의 경우는 이른바 자학사관(自虐史觀)을 바로잡는다는 구실 아래 행해지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역사 왜곡’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그것도 아예 중학교학생들에게서부터 비뚤어진 국가관과 애국심을 심어주려고 작정하고 나섰다는 사실이 결코 예사롭지 않다.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전기통신대학 교수가 주축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지난해 일본정부에 검정 신청한 중학교 교과서는 ‘역사’와 ‘공민’의 두 종류다. 이 중 ‘공민’ 교과서에는 태평양전쟁 패전 후 미국의 주도로 제정한 현행 일본헌법의 개정을 부추기는 내용이 담겨 있다. 즉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못박은 현재의 세칭 ‘평화 헌법’이 못마땅하다는 주장 아래, 심지어는 은근히 핵무기 보유를 정당화하는 논리마저 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시민단체인 ‘아동과 교과서 전국 네트워크 21’의 조사로는 ‘역사’ 교과서에서 한반도를 ‘일본을 공격하는 절호의 기지’라고 전제한 뒤,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기 위해’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동아시아를 안정시키는 정책으로서 구미열강의 지지를 받았다’는 자화자찬을 늘어놓은 모양이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자 한국과 중국에서 드센 비판이 일었고, 의식 있는 일본 지식인들마저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본정부나 정치권이 취하는 태도는 사안의 본질을 흐리는 동문서답이거나, 어불성설의 어거지로 일관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우선 모리 요시로(森喜郞) 총리가 3월1일 일본 국회에서 행한 다음과 같은 발언이 그 하나다.

    “우리나라의 교과서는 국정(國定)이 아니라 기준에 의거한 검정(檢定)으로 이뤄지고 있다. 다만 우리도 (그 내용을) 볼 수단이 없는데 어떻게 해서 외부로 샜는가. 일본 언론의 뉴스가 외국으로 전해져 검정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외국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는 것은 대단히 유감이며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의 발언은 내용상의 문제는 제쳐두고 누설 경위나 따지겠다는 투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교과서 내용은 해당 출판사측이 스스로 떠벌리고 다녔음이 밝혀졌다. ‘산케이신문’의 계열사인 이 출판사는 일본정부의 검정에서 통과되면 2002학년도부터 사용할 이 교과서를 미리 선전할 목적으로 각 학교의 담당 교사들에게 무료 책자를 배포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다른 출판사에서 나올 교과서를 싸잡아 비방함으로써 독점금지법 위반으로 제소까지 당한 상태다.

    게다가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측이 내용을 어떤 식으로 꾸몄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1년여 전에 그들이 만들어 서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국민의 역사’라는 단행본 속에 이미 아전인수(我田引水)식 역사 해설의 장황한 요설(饒舌)이 담겨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이웃나라의 우려 표명을 ‘내정 간섭’으로 몰아세우려는 뻔뻔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설사 그네들이 헌법 개정을 주장하든 말든 자신들끼리의 문제로 돌리더라도, 침략당한 당사자가 지적하는 역사의 시시비비를 내정 간섭이라 한다면 억지도 예사 억지가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1998년의 한일 정상회담에서 당시의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가 식민지 지배를 사죄하고 ‘두 나라 국민, 특히 젊은 세대의 역사 인식을 깊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공동성명은 무엇으로 설명할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외무성 담당 국장이 ‘내정 간섭으로 인식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일깨웠다니 다행이지만….

    이렇게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도 일본 지도층의 대응이 시큰둥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총리 교체가 코앞에 닥쳤고, 7월로 예정된 참의원 선거를 의식하여 정치권이 눈치 살피기에 여념이 없는 탓이다. 두번째는 외교문제를 중시해야 할 외무성이 간부 직원의 스캔들에 휩싸여 옳게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근자의 세계적인 블록화와 자국 이기주의 경향에 편승하여 우익의 활동에 힘이 실렸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다 아는 것처럼 내년이면 한국과 일본이 손잡고 치를 첫 국제적 이벤트인 월드컵축구가 열린다. 또 지난 한 해 동안 한국을 찾은 일본 관광객은 247만여명으로 신기록을 세우며 재작년에 이어 한국이 일본인 최대의 여행지로 떠올랐다. 이처럼 활발한 민간 교류를 통해 모처럼 화해 무드를 일구어 가는 마당에 터진 역사 교과서 파동, 그 득과 실의 계산이 그리도 어려운 것일까.

    일본정부는 예정을 앞당겨 4월 중 검정 결과를 발표할 것이라고 한다. 추이를 지켜보면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의 모르쇠들에게는 진심으로 자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일본학자들이 발표한 성명문의 이런 구절을 다시 들려주고 싶다. ‘학문적인 성과를 전혀 거치지 않고 일방적인 관념만 주입한 교과서는 교과서에 값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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