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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슈타지 도청문서 공개하지 말자고?…”

쉴리 내부장관 공개 금지 주장 獨 정가 ‘회오리’… 시민들 ‘정치적 반격’ 비난 목소리 고조

“뭐, 슈타지 도청문서 공개하지 말자고?…”

“뭐, 슈타지 도청문서 공개하지 말자고?…”
구동독(DDR)의 국가안보국인 슈타지가 남긴 도청자료의 공개 여부를 놓고 독일 정계가 격랑에 휩싸이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현 사민당 내부장관 오토 쉴리(Schily)가 최근 정치가들에 대한 도청기록의 공개금지를 주장하며 문서보관청에 압력을 넣으면서 시작됐다.

통독 이후 슈타지의 비밀문서를 문서보관법에 따라 꾸준히 공개해 온 문서보관청은 즉시 그의 입장을 공박했다. 2개월 전 신임 문서보관청장으로 취임한 비르틀러(Birthler)는 통독 직전인 1990년 문서보관청의 자율성과 공개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했던 구동독 시민운동권의 인사이자 현 사민당의 연정 파트너인 녹색당의 여성 정치가다.

구동독의 국가안보국은 붕괴 직전까지 수십년 동안, 동독 내에서뿐만 아니라 서베를린과 서독의 중요인사들이 사용하는 4만개 이상의 전화선을 도청해 왔었다. 도청의 결과물은 녹음테이프나 도청기록, 도청내용의 요약 형태로 남은 수십톤의 자료더미. 통독 직전의 혼란 속에서 상당 부분이 파괴되거나 유실됐지만, 베를린의 슈타지 문서보관청에 남아 있는 자료의 양은 서가의 길이가 139m나 될 정도며, 그 중 30m 정도는 아직 분류조차 되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이 비밀문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1990년 도청과 같은 첩보활동에 맞서 단식투쟁까지 벌였던 동독 시민운동가들의 노력 덕분에 폐기처분을 면할 수 있었다. 당시 슈타지가 서독의 정치가들까지도 계속 도청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콜 총리와 기민당은 문서 공개를 전면 금지하고 싶어했다. 동독 시민운동가들은 이 문서가 그들을 괴롭혀온 첩보활동의 ‘사생아’임에도, 비밀문서의 공개만이 자유로운 과거 청산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사회 일반의 합의를 이끌어 냈고, 콜의 ‘음모’는 미수에 그쳤다.



“뭐, 슈타지 도청문서 공개하지 말자고?…”
이로써 공개법이 제정되고 문서보관청 설립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뒤 독일의 문서보관법은 헝가리나 폴란드가 비밀경찰의 유산을 정리할 때 영향을 주기도 했으며, 전세계적인 모델로 법률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데 통일 10년이 지난 지금, 왜 하필이면 사민당 출신의 내부장관이 공개를 금지하려는 것일까. 쉴리 장관은 저명인사들에 대한 슈타지 도청문서의 공개는 명백히 기본법에 저촉이 되는 것으로, 통화 비밀의 권리는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문서보관법을 제정했던 사람들은 기본법을 깡그리 무시하고 이 법을 제정했다는 것. 하지만 쉴리 장관이 공개를 금지하려는 진정한 의도가 어디에 있든,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 보인다. 꼭 한 사람, 갑자기 뜻하지 않은 곳에서 강력한 후원세력을 얻게 된 콜 전 총리을 제외하고는….

콜은 슈타지 문서 공개 여부가 다시 논란거리로 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이다. 불법 비자금 운영문제로 검찰의 기소를 눈앞에 두고 있는 콜은 자신에 관한 슈타지 도청자료의 공개를 금지할 목적으로(대외적으로는 공개의 위법성을 들먹이며) 베를린의 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상태에 있다.

보관청은 지금까지 근 10년 동안 공개법의 허용범위 안에서 수백 명의 구동독 출신 정치가, 반정부 인사들, 문화체육계 인사들에 대한 자료를 공개해 왔다. 심지어 전 보관청장이던 가욱(Gauck)이나 현 연방대통령 라우(Rau)의 자료가 공개되기도 했다. 사실 콜 자신이 문제가 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공개의 불법성을 진지하게 제기한 적이 없었다. 2000년 초, 비자금문제의 진상규명을 위해 과거 콜과 기민당의 재정 담당자였던 킵과 뤼체 등에 대한 도청자료가 언론사들의 요구에 의해 공개되고, 콜에 대한 모든 자료 요청이 받아들여지자 그는 갑자기 공개의 불법성을 역설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 문제가 안고 있는 폭발력은 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비밀문서의 공개금지 주장이 자칫 여전히 껄끄러운 동-서독의 관계와 형평성 논란을 점화하는 뇌관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있다.

슈타지 문서의 공개는 지금까지 오히려 동독지역에서 환영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공개대상이 주로 동독지역 인사들이었던 터라 구동독 지역의 시각에서는 보복조치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런데 이제는 거꾸로 내부장관의 의도에 저항해 정당에 관계없이 동독 출신 정치가들과 동독지역 시민들 사이에 반(反)-공개금지의 연대의식이 강화되고 있는 것. 공개에 불안을 느끼는 ‘공조세력’이 콜이란 바람막이 밑에서 공개법을 단숨에 뒤집어 엎으려 한다는 의심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집권여당인 사민당 내부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내각의 결정을 통해 문서보관청에 공개금지 명령을 내리려는 내부장관의 의도가 드러나자, 사민당 내에서도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총리국의 구동독 재건부 국가장관 슈바니츠는 최근 “이것은 정체성의 문제”라며 “결코 동의할 수 없다”고 일침을 놓았다. 사민당의 원내총무인 슈트룩도 “이 문제는 총리국장과 사민당 사무총장과의 합의에 따라 총리의 조정참모부에서 처리해야 할 사안”이라고 못박고, “정부는 우선 베를린 행정법원의 판결을 기다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또 “내부장관 쉴리가 바라는 내각결정을 통한 지시는 녹색당과의 연정파괴를 야기할 수도 있는 위험한 짓”이라고 경고했다. 공개법 제정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녹색당으로서는 연정 파트너인 사민당의 내부장관으로부터 예고없이 뒤통수를 맞은 셈이기 때문이다.

“뭐, 슈타지 도청문서 공개하지 말자고?…”
하지만 일반 시민들이 보기에도 납득이 되지 않는 내부장관의 이런 태도는 연방의회 내의 각 당 보수세력들로부터는 만만치 않은 지지를 얻고 있다. 크리스마스 직전, 원내 내무위원회에서는 녹색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에서 “저명인사들의 문서 공개만큼은 차단하자”는 의견이 제출됐다. 공개금지를 바라는 세력들이 연대를 시작하고 있다는 첫 징조였다.

물론 내부장관 쉴리의 불법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불법적 첩보활동에 의해 도청-수집된 통화내용은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은 합당하기 때문이다. 전 문서보관청장 가욱은 “법 제정 당시 관련자들은 불법적으로 획득된 정보의 공개가 법치국가의 기본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서로간의 공박 속에 아직은 도청자료 공개 금지 논쟁의 향방이 불투명한 상태지만, 콜이 새로운 동맹자인 쉴리와 함께 이 대결에서 승리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이성을 지키고 있는 독일 시민들의 눈이다. 대다수 시민들은 현재 슈타지 문서의 공개를 놓고 벌이는 논란을 법해석 차원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다만 이를 문서의 공개로 타격을 입을 세력들의 정치적 반격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 동독과 서독지역 정치가들에 대해 상이한 잣대가 적용되고 슈타지 활동의 진상규명이 단절된다면, 문서보관청을 폐쇄해 버리는 것이 오히려 정직한 일일 것이다.” 사민당 부당수이며 현 연방의회 의장인 동독 출신의 티르제(Thierse)는 콜과 쉴리의 ‘정치적 반격’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이렇게 표현했다.



주간동아 2001.01.18 268호 (p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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