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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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걱~ 엽기엔 브레이크가 없다

  • 입력2005-03-04 15: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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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2월16일과 17일, 주말을 맞은 대학로 한 카페에서 이상한 파티가 열렸다. 이름하여 ‘엽기난장파티’.

    이곳에 모인 수십 명의 젊은이들은 모두 선 채로, 손가락에 깁스를 한(그는 공연 전에 손가락을 다쳤다) ‘엽기적인’ 모습의 언더그라운드 가수 이강신씨의 진두지휘에 따라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밤늦도록 ‘난장판’을 벌이며 놀았다. 가수는 공연중에 걸려온 핸드폰을 태연히 받고, 초청가수 ‘황신혜밴드’는 여자의 교성이 섞인 노래로 파티의 분위기를 살렸다.

    예쁜 도우미 아가씨들이 손님들에게 소주팩과 뻥튀기를 돌리고 있었고, 가수는 사람들을 무대 위로 불러 ‘누가 누가 진하게 키스하나’ 같은 ‘끈적끈적’한 게임을 시켰다. 참석자들이 캐럴 ‘울면 안 돼’를 개사해 “짜장 안 돼, 짬뽕 안 돼, 쫄면 안 돼, 산타할아버진 면을 싫어해” 라며 ‘엽기송’을 따라 부르던 가운데 갑자기 카페 안의 불이 꺼졌다. 그리고 사회자의 멘트. “키스 타임입니다. 맘껏 키스하세요. 남자끼리 해도 용서합니다.”

    이 엽기파티는 하이텔 인터넷방송 HiTV가 주최한 개국이벤트. ‘엽기발랄한 국내 최대 엔터테인먼트 인터넷 방송’을 표방하고 있는 HiTV는 매달 한번씩 이같은 엽기파티를 열 예정이다. 사이트에는 ‘대한민국 엽기 프로리그’ 같은 코너도 있어 엽기 마니아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HiTV의 김완준 실장은 “엽기가 신세대들의 문화코드로 확실하게 자리잡으면서 ‘일탈’과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만큼 ‘젊은 방송’의 이미지를 추구하면서 ‘엽기’를 컨셉트로 잡았다”고 밝혔다.

    한때의 유행으로 끝날 줄 알았던 ‘엽기’ 열풍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식을 줄 모른다. 이젠 우리 사회문화 어딜 봐도, 무엇을 봐도 ‘엽기’라는 단어가 따라다닌다. 엽기 신드롬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간을 가리지 않고 점점 더 그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다. 엽기 전문 사이트의 인기도 여전하고 엽기 광고, 엽기 개그, 엽기 게임, 엽기 소설, 엽기 미술에 엽기 송까지 등장하더니 최근엔 엽기 에로물까지 선보였다. ‘달거리’라는 에로 비디오는 생리중인 여자에게 집착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비위가 약한 사람은 얼마 보지도 못하고 비디오 전원을 꺼야 할 만큼 상황 설정이 엽기적이다.



    ‘엽기’(獵奇)의 원래 사전적 의미는 ‘기괴한 사건이나 사물에 흥미를 느껴 사냥하듯 쫓아다닌다’로 주로 비정상적이거나 변태적인 행위를 지칭할 때 사용되던 단어지만, 요즘에 와서는 본래의 의미를 약간 비켜가 ‘상상치 못했던 황당하고 역설적인 일’ 혹은 ‘자극적이고 톡톡 튀는 유쾌한 파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어의를 넓혔다.

    인터넷방송 ‘크레지오’의 일일시트콤 ‘떴다! 고도리’에도 유쾌하고 파격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해 웃음을 선사한다. 드라마의 주인공 ‘고도리’양은 청순하고 순수한 외모와는 달리, 사람 많은 지하철 안에서 ‘과감하게’ 방귀를 뀌는 등 의외의 행동을 연발한다. 탤런트 조형기가 연기하는 홍만호 과장 역시 걸핏하면 코를 후비다 쌍코피를 터뜨리는 ‘엽기맨’. 드라마 무대가 여성 생리대 회사의 마케팅팀이라는 설정도 다분히 엽기적이다.

    엽기동물도 등장했다. 인터넷 만화 포털사이트 N4(www.n4.co.kr)의 순정만화 웹진에 연재되고 있는 웹 애니메이션 ‘마사마로의 숲 이야기’에는 ‘엽기 토끼’가 등장한다. 가녀린 생김새와는 딴판으로 황당하고 난폭한 행동을 하는 이 토끼는 사자 앞에서 머리로 맥주병을 깨는 등, 하는 짓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 네티즌들은 이 토끼의 모습에 열광하며 ‘엽기 토끼’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엽기라는 단어는 이제 젊은이들 사이에서 ‘쿨하다’ ‘멋있다’라는 말과도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문화평론가 김동웅씨)

    네티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받아봤을 ‘엽기 메일’도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 ‘선배,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나한테 좋은 핸즈프리가 있는데 필요하면 연락하세요’라는 후배의 메일에 첨부된 사진을 클릭하면 엉뚱하게도 흑인이 휴대폰을 귀에 대고 고무줄로 묶어 놓은 사진이 뜬다. ‘백지영 풀버전’ ‘김희선 알몸사진’ 등의 제목을 보고 긴장감 내지 기대감에 열어보면, 문구점에서 파는 풀에 백지영 이름을 넣은 사진과 김희선 얼굴에 알 그림을 붙여둔 사진이 뜨는 식이다.

    누구나 솔깃할 만한 정보로 관심을 끌고 호기심을 한껏 고조시킨 뒤 순식간에 기대감을 무너뜨리는 이런 엽기메일에는 사람들의 저열한 호기심과 사회의 엄숙주의를 비웃는 엽기의 파격과 미학이 숨어 있다.

    그러나 한번쯤 가볍게 웃고 지나칠 수도 있는 ‘엽기’가 다시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있는 것은 최근의 자살사이트 사건 등에서 보듯, 엽기사이트의 광기와 폭력성이 위험수준에 이르렀다는 문제 의식이 커졌기 때문이다. 사이버문화연구실의 라도삼씨(언론학 박사)는 “예전과 달리,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언행까지 ‘엽기적’이라는 말로 용인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우리 사회가 지금 정상성으로부터 상당히 비켜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고 경고한다.

    물론 자살사이트를 통해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거나, 일본의 예처럼 엽기 컴퓨터게임에 빠져 살던 10대가 옆집 노파를 실제로 살해하는 일은 극히 일부의 일이다. EBS ‘10대 리포트’라는 프로그램에서 ‘10대의 엽기문화’를 기획했던 김병수PD는 “청소년들 스스로도 지나가는 유행으로 여기고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즐길 뿐이다. 어른들이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심한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도덕 불감증 내지 죄의식 없는 ‘무동기 범죄’가 발생할 우려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 입시 압박감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에게 건강한 욕구 분출의 통로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일선 교사들의 목소리가 높다. 서울고등학교의 옥성일 교사는 “엽기문화의 확산은 건강한 꿈과 희망을 갖기 어려운 사회에 대한 뒤틀린 표현이다. 엽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를 환기하고 건전하고 정의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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