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6

2001.01.04

일로 승부하는 ‘서민형’ 재벌총수

경영권 승계 2년 만에 그룹 장악 … ‘투명경영’은 아직 기대 못미쳐

  • 입력2005-03-03 14: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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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속성장 시대를 상징했던 정주영 전현대 명예회장, 김우중 전 대우 회장 등 창업 세대가 급속히 퇴조하고 2, 3세 오너 경영인들이 급부상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무리한 확장경영으로 그룹 몰락을 자초하기도 했지만 우리 경제를 이끌고 있는 것이 이들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30, 40대의 2, 3세 오너 경영인들은 1세들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이들의 경영 철학은 무엇이며 인간적인 면모는 어떠한가. ‘재계의 뉴프런티어’ 시리즈를 통해 그런 궁금증을 파헤쳐본다. <편집자 >》
    일로 승부하는 ‘서민형’ 재벌총수
    SK㈜ 최태원 회장(40)이 12월4~7일 홍콩에서 열린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주최 ‘아시아텔레콤 2000’ 행사에 참석했을 때 얘기다. 현지에서 이 행사를 준비하던 SK텔레콤 관계자들은 6일 당혹스런 상황에 마주쳤다. 손길승 그룹회장이 이날 홍콩으로 날아와 최태원 회장과 바통 터치하기로 돼 있었는데, 최회장이 갑자기 홍콩 체류 일정을 하루 더 연장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SK텔레콤 관계자들은 급히 손회장이 묵을 수 있는 호텔 스위트룸을 수배했지만 불가능했다. 이 행사 참석을 위해 국제 정보통신업계 거물들이 대거 몰려들어 호텔 방이 이미 동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SK텔레콤 실무진 입장에서는 두 회장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불경죄’를 범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고민 끝에 이들은 ‘깨질’ 각오를 하고 최태원 회장 비서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며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최회장 비서진의 답변은 의외였다. ‘뭘, 그런 문제로 쓸데없이 고민하느냐’는 투로 “최회장께서 다른 방으로 옮기면 될 것 아니냐”고 시원스럽게 답을 주었기 때문. 결국 최태원 회장은 손길승 회장에게 자신이 묵던 스위트룸을 내주고 임원들이 묵던 일반 객실로 옮겼다. 당시 홍콩에서 이 행사를 준비했던 SK텔레콤 관계자는 “최회장이 얼마나 소탈한지, 그리고 최태원 회장이 손길승 회장을 평소 어떻게 모시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전했다.

    일로 승부하는 ‘서민형’ 재벌총수
    SK그룹 임직원들은 최태원 회장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소탈하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혼자 듣기 아깝다”는 이유로 2년 전부터 배우고 있는 중국어 회화를 대리급 비서와 함께 들을 정도로 형식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

    “최회장은 토론을 좋아한다”는 말도 들린다. 한 계열사 고위 임원은 “최회장은 전혀 권위의식이 없이 ‘함께 토론해서 당신들 얘기가 옳으면 그렇게 하자’며 관련 임직원들을 붙잡고 논쟁을 자주 벌이고, 회의가 끝나면 포장마차에서 함께 소줏잔을 기울인다”고 설명했다. 최회장이 좋아하는 술은 청주인 ‘설화’. 그러나 그의 주량은 그리 세지 않다.



    최회장에 대한 임직원들의 평가를 종합하면 ‘최회장을 전직 대통령의 사위(최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녀 노소영씨와 지난 88년 결혼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 1남2녀를 두고 있다)나 재벌 2세라는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일반인이 생각하는 재벌 2세들과 달리 임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린다는 것. 임직원들에게 투영된 최태원 회장의 이런 모습이 그의 진면목인지는 좀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어쨌든 현재까지 최태원 회장은 대다수 임직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룹 관계자들이 최회장의 ‘단점’으로 거론하는 것은 고작 최회장의 야행성. 그룹 관계자는 “미국 유학시절부터의 습관인지 밤 늦게까지 공부하고 일하는 경향이 있어 모시는 입장에서 힘들 때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다른 관계자는 “선친인 고 최종현 회장도 그렇지만 그의 이런 모습은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는 기질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했다.

    최태원 회장 역시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선친과 자신의 시카고대 스승인 게일 존슨 박사를 꼽아 학문적 취향을 드러냈다. 그러나 존슨 박사의 평가는 다른 것 같다. 몇 년 전 미국 방문중 우연히 존슨 박사를 만났던 한 중견 언론인은 “존슨 박사가 ‘고 최종현 회장과 최태원 회장 모두에게 학문보다는 경영인의 길을 걷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충고해주었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존슨 박사는 이 때문에 고 최종현 회장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최종현 회장 부인에게서 ‘왜 남편에게 경영자의 길을 걷게 했느냐’는 농담성 핀잔을 들었다는 것.

    최회장은 선친의 타계로 경영권을 물려받은 지 2년여밖에 안 되었지만 이미 그룹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 한 계열사 고위 임원은 “이건희 회장은 선친 이병철 회장 타계 후 5년이 지난 다음에야 ‘신경영’이라는 기치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최태원 회장은 최종현 회장 타계 직후부터 그룹을 장악하기 시작해 이제 그룹 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최태원 회장은 아직 그룹의 ‘얼굴’로서 원로 경영인이 필요함을 절실히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한국적 현실에서 40세에 불과한 그가 전면에 등장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알고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일까.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손길승 그룹 회장과 콤비가 아주 잘 맞고 그동안 그룹 사업도 잘 돼 불만이 없다”면서 “손길승 회장도 불만이 없다면 ‘손길승-최태원’ 체제는 상당 기간 유지될 것”이라고 공언한다.

    최태원 회장의 언급대로 ‘손길승-최태원 체제’는 현재까지 순항하고 있다. 이는 각자 상대방의 영역을 인정해주는 두 사람의 태도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룹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은 손길승 회장을 깎듯이 모시고, 손길승 회장은 그룹 인사권은 오너인 최회장의 고유 영역이라며 건드리지 않는다”고 전했다. 최회장이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것도 그룹 회장인 손길승 회장에 대한 배려 차원이라는 것.

    일로 승부하는 ‘서민형’ 재벌총수
    최태원 회장은 자신보다 훨씬 연배인 사장들을 접할 때도 아직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는 게 한 고위 임원의 전언. 사장단 역시 술자리에서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최회장이 상당히 조심스러운 눈치라고. 한 고위 임원은 “최회장은 사장들과 저녁을 함께 할 때도 설화를 가볍게 마시고 2차도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임원은 “그러나 최회장도 외국에 나가서는 외국 법인 임직원들과 좀더 자유분방하게 어울리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최회장이 그룹 임직원들을 장악하기 위해 사용한 ‘무기’는 업무와 지식이었다는 게 임원들의 설명이다. SK증권 한 임원은 “1년에 한번 정도 주요 사안에 대해 최회장에게 직접 보고하는데, 최회장은 이때 권위보다는 일로써 대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계열사 임원은 “최회장에게 경영계획을 보고하면 미진한 부분을 금방 짚어내고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다시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곤 한다”면서 핵심을 파악하는 최회장의 능력을 높이 샀다.

    그룹 내부 인사뿐 아니다. 최태원 회장과 접촉한 외부인사들의 평가도 최회장에게는 고무적이다. 최태원 회장이 대표이사로서 직할하고 있는 SK㈜ 사외이사 박흥수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도 “이사회 등에서 토론을 하다보면 e-비즈니스와 정보통신 산업에 대한 최태원 회장의 식견에 내심 놀랄 때가 많다”고 평가했다.

    최회장이 최근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분야도 e-비즈니스와 해외 진출. 최회장은 요즘 정유회사 SK㈜를 5년 이내에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종합 마케팅 회사’로 변신시킨다는 목표 아래 앞장서서 뛰고 있다. “엔크린 보너스 카드 회원 700만명, 011 가입자 1000만명, 017 가입자 300만명 등 2000만명의 회원을 기반으로 못할 게 뭐 있느냐”며 1단계로 ‘OK 캐쉬백’ 서비스를 출범시킨 것도 실질적으로는 최회장의 작품. SK㈜는 현재 각 계열사 회원을 이 서비스에 통합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런 변화에는 낙오자가 따르게 마련. 젊은 세대를 대거 발탁한 12월 초 임원 인사가 단적인 예다. 한 임원은 “최태원 회장은 평소 ‘과거 20년 동안의 주가를 보면 SK㈜의 기업가치는 정체 내지 하락해왔다는 결론이 가능하다’면서 ‘기업가치를 향상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내놓는 사람만이 자신과 함께 일할 수 있다’고 강조해 왔는데, 이번 인사는 최회장의 이런 뜻이 반영된 결과”라고 해석했다.

    최태원 회장이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갖는 것은 SK그룹이 국내에서만 돈을 벌었다는 세간의 인색한 평가를 의식한 때문으로 보인다. 최회장은 평소 “국민들은 외환위기 이후 달러를 벌어오는 기업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면서 “SK그룹도 글로벌 기업으로 탈바꿈해 외화를 많이 벌어들이면 국민의 인식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SK텔레콤의 중국 시장 진출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도 이런 차원이라는 게 그룹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SK그룹 관계자들은 “최태원 회장이 효율적 경영, 투명경영, 소액주주의 권리가 보장되는 경영 등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경영 활동이 필요하다는 신념을 피력해 왔다”고 말한다. 98년 3월 SK텔레콤 주총을 앞두고 SK텔레콤 부당 내부거래 문제에 대해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요구한 사항을 전향적으로 수용한 것이 한 예라는 설명이다.

    최태원 회장이 투명경영과 관련해 다른 그룹 총수에 비해 ‘전향적인 자세’를 갖고 있다는 점은 외부에서도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참여연대 김기식 정책실장은 “98년 3월 주총을 앞두고 참여연대가 SK텔레콤 소액주주의 요구 사항을 제기했을 때 최회장이 먼저 만나자고 제의하면서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은 평가할 만했다”고 전했다. 98년 3월 주총에서 SK텔레콤 사외이사로 선임된 남상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도 “SK텔레콤측이 사외이사들의 요구사항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다른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투명경영을 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많고, 더욱이 SK그룹 전체 차원에서 보면 다른 그룹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유보적인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 최태원 회장이 스스로 투명경영을 강조하긴 하지만 그가 재벌 총수로서의 ‘기득권’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으로 해석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시각이다.

    SK그룹의 위장 계열사 의혹을 받고 있는 광고회사 TBWA코리아의 존재만 해도 그렇다. 그룹측은 과거 SK에 몸담았던 인사가 설립한 회사이기 때문에 SK 광고를 대행하고 있긴 하지만 위장 계열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광고업계에서는 이 회사가 SK그룹 광고를 독식하는 등 SK그룹 위장 계열사 의혹이 있다고 지적한다. 어쨌든 이런 의혹이 제기되는 것은 SK그룹이 ‘한국적’ 재벌 행태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할 만하다.

    기업 경영자로서 최태원 회장에 대한 평가는 경영 능력에 달려 있다. “소탈하고 검소하다”는 평가는 부차적인 문제라는 얘기다. 그가 이끄는 SK호의 성공 여부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시험받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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