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6

2001.01.04

‘국민’이 떠난 ‘국민의 정부’

전통적 지지계층 등돌리고 새 지지층 형성 안돼… ‘민심의 흐름’ 제대로 읽어야

  • 입력2005-03-03 14:0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국민’이 떠난 ‘국민의 정부’
    김대중 정권과 역대 정권과의 차별성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문민정부에 이은 또 하나의 무능한 정권이라는 혹평까지 받고 있다. 강자에겐 미소를, 약자에겐 몽둥이를 휘두르는 김대중 정권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김대중 정권은 자신의 존립근거를 어디서 찾고 있는지 묻고 싶다.”

    2000년 12월18일 광주문화연대 등 17개 광주시민-사회단체들이 발표한 시국선언의 한 대목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광주에서 터져나온 이들의 ‘쓴소리‘는 여권 인사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광주 지역에서까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민주당 이재정 의원도 “그런 목소리가 나올 만한 상황”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김중권 대표체제가 들어서는 등 여권은 새 진용을 갖춰가고 있지만 김대중 정부가 넘어야 할 고비는 여전히 험난해 보인다. 전통적인 지지계층마저 등을 돌리고 새로운 지지층은 형성되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이 떠난 국민정부‘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정치권은 물론 노동계와 시민사회로부터도 김대통령은 ‘소수파‘로 몰리고 있다.

    ‘함께하는 광주시민행동‘ 이승후 간사는 “광주라는 지역 특성상 시민-사회단체들이 성명을 발표하기까지는 상당한 고민이 있었다. 욕먹을 각오를 하고 발표했는데 의외로 격려전화가 줄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이간사는 “김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는지에 대해서는 시민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지만 김대통령이 실망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고 상황을 전했다. 이런 분위기를 보여주듯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시국선언문에서 ‘가신정치 청산‘ ‘부패방지법 등 개혁입법 제정‘ ‘박정희 기념관 국비지원 철회‘ 등 6개항의 요구 사항을 내걸었다.

    ‘국민’이 떠난 ‘국민의 정부’
    김대통령과 재야 시민단체들과의 관계는 전통적으로 ‘밀월‘이란 단어로 요약할 만했다. 2000년 4·13 총선을 앞두고 시민단체들이 낙천-낙선운동을 벌이자 야당에서 “시민단체들이 여권의 사주를 받았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의 말이다. “김대중 정부는 개혁을 추진할 힘을 상실했다. 이번 당직개편을 봐도 개혁을 통해 국정 난맥상을 돌파하겠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개혁정책의 후퇴로 위기가 심화해 차기 대통령 선거를 앞둔 2년간 한국 사회 전체가 표류할 가능성이 있다. 집권 여당은 주도권을 상실했고 비전이나 정체성도 없다. 개혁주체세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김대통령이 허용하지도 않는 것 같고…. 김대중 정부가 개혁정책을 펴나갈지에 회의적이다.”

    경제가 다시 어려워지면서 구조조정 등으로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노동계 등 서민들의 상황도 심상치 않다. 지난 12월16일부터 18일까지 한국노총은 한길리서치와 공동으로 전국의 봉급생활자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한 평가‘ 등 17개 항목에 걸친 조사결과는 노동계와 김대통령 사이의 ‘머나먼 거리‘를 보여준다.

    4대 개혁이 성공적으로 수행됐다고 평가한 사람은 5%에 불과한 반면 ‘방향은 옳았으나 성과는 내지 못했다‘(56.6%), ‘인력감원 정책에 불과했다‘(35.3%)는 평가가 압도적이었다. 구조조정 과정에 대한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해서도 실패한 정책이라는 평가가 65.3%로, 성공한 정책이라는 평가(32.5%)를 두 배 이상 앞질렀다. 청와대나 정부 기구, 정당들의 노동자나 노조에 대한 태도를 묻는 질문에도 50.4%가 ‘변함없다‘고 답했다. 이런 평가는 ‘차기 대선에서 여당이 정권을 재창출하기가 어려울 것‘(70.8%)이라는 전망으로 이어졌다.

    갈수록 벌어지고 있는 빈부격차는 김대통령에 대한 서민층의 이반을 가속화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다‘는 김대통령의 기본노선은 어느새 실종됐다. 2000년 2·4분기를 대상으로 한 통계청 조사결과 도시근로자 상위 10%와 하위 10% 간에는 월평균 소득 기준으로 9배나 차이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저축 주식배당 임대료 등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21배나 차이가 난다. 한국노총 조사결과에서도 김대중 정부 집권 이전보다 빈부격차가 더 심해졌다는 평가가 54.4%였다. 반면 줄었다고 답한 사람은 8.7%에 불과했다. 가계형편이 IMF 사태 당시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답한 사람도 64.8%나 됐다.

    국제평화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 박호성 박사는 “김대통령의 말대로 경제개혁 성과가 아랫목에서 윗목으로 전해지는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아랫목은 더 따뜻해진 반면 윗목은 더 차가워지고 있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노총 정책실 황종일씨는 “DJ 정부의 주된 지지기반이었던 서민-노동자층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쪽으로 돌아섰다. 실망 단계를 넘어 대립관계가 됐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농민들도 대규모 시위를 통해 불만을 표출했다.

    김영삼 정권 핵심부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시민단체나 노동계 등 DJ 정권을 지원했던 각종 세력들과 심지어 집권 세력 내부도 급격하게 이완되고 있다”고 현 상황을 분석했다. 이 인사는 “정치적 소수파였다는 것이 큰 원인이지만, 초기에 새 판을 짰어야 했는데 시기를 놓치면서 지금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돌파구를 찾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인사의 분석대로 정치적으로 소수파라는 기본적인 한계는 김대통령의 현실적인 입지를 더욱 좁히고 있는 주요 원인이다. 법안 하나 처리하려 해도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한나라당 박근혜 부총재는 “김대통령이 숫자의 정치에 집착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민심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솔선수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측근인 윤여준 의원은 “당직개편에 대해 여권 내에서도 반발이 나오는 이런 상황에서 김대통령이 개혁작업을 힘있게 밀어붙일 수는 없을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전통적 지지세력들이 김대통령에게 등을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 나라정책원 원장인 김광동 정치학박사는 “소수정권이라는 한계에다 일관성 부재로 인한 정책 실패, 권력누수 현상 등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 김대중 정부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시구현, 생산적 복지, 나아가 대처식 대응까지 망라한 김대통령의 ‘욕심‘이 정책집행의 일관성을 잃게 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다면 김대통령이 신뢰를 회복해 국정을 안정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박호성 국제평화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김대통령은 이제부터 할 수 없는 일, 해서는 안 될 일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대두되고 있는 ‘대처주의‘식 대응은 김대통령을 더욱 고립시킬 위험성이 높다”고 말했다. 나라정책원 김원장은 “김대통령이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구국적 동맹관계를 형성,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며 정치 안정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민주당 이재정 의원은 “지금까지 단기적인 처방에만 급급한 측면이 있다. 앞으로는 장기적인 개혁 시스템 조절과 정착에 주력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