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4

2000.12.21

맵고 지릿한 남도의 맛

  • 송수권

    입력2005-06-10 13: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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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맵고 지릿한 남도의 맛
    눈보라치고 바람부는 날씨면, 흑산어장의 100m 수심이 뒤집어지고 뻘밭이 뒤집혀 홍어가 주낚을 물고 줄줄이 올라온다. 따라서 홍어의 물동량이 급격히 증가할 때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다. 홍어 주낚 배가 흑산도에 네 척, 홍도에 두 척이고 한번 출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5∼7일쯤인데 물동량은 30∼40마리에 불과하다. 그러다보니 진액도 없는 냉동 칠레산 홍어가 판을 칠 수밖에. 그러니 본고장에나 가서 홍어를 맛볼 수밖에 없다.

    흑산도 성우정 홍어집(김영창·061-275-9003, 011-628-9102)의 경우만 해도 물동량이 달린다. “육지에서 판치고 있는 그것들 믿을 게 못된다”고 김영창씨는 말한다. 1976~86년까지 홍어잡이를 나갔을 때는 300마리 이상 걸어본 경험이 있다고 말한다. 홍어회 한 접시 4만원(1인분), 찜 5만원, 탕 4만원을 받고 있으나 손님 보기가 어쩐지 미안하다고 한다.

    맵고 지릿한 남도의 맛
    홍어는 수온 따라 움직이고 뻘과 자갈이 섞인 사질층에서 서식하는데 미끼 없이 걸낚장치로 잡아 올린다. 가을에서 2월부터가 산란기고, 새끼는 한두 마리 정도 낳는다. 2월이 넘으면 산란 후라서 맛이 없어진다.

    숙성시킬 때는 항아리에 넣어 따뜻한 날은 2~3일, 추운 날은 7일까지 기다려야 지릿한 맛을 밴다. 찜할 때는 칼집을 내고, 이중으로 된 증기솥에서 쪄낸다. 지릿한 맛을 그대로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고춧가루 통깨 옥파 참기름 설탕 마늘 생강 풋고추 등을 다져 간장을 얹어내면 된다. 안주인 박충자씨(60)는 홍어가 귀하고 비싸서 업종을 바꾸고 싶어도 그놈의 맥이 무엇인지, 맥이 끊길까봐 그만두지 못한다고 한다. 이런 향토식품들은 별도의 지원책이 시급하다는 얘기다.



    오늘의 유전공학은 ‘물의 기억력’까지를 복사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이것이 게놈 프로젝트다. 그러나 오랜 기후와 풍토에서 다스려진 유전인자가 내포한 맛의 소인(素因)까지를 복사할 수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동양고전의 ‘천기를 누설하지 않는다’는 말은 유전인자의 수정, 변조, 복사와는 다른 더 깊은 개념으로 쓰인 말이다.

    맵고 지릿한 남도의 맛
    흑산홍어의 그로테스크한 맛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일찍이 ‘자산어보’의 물목에서도 흑산홍어는 두엄 속에 묻어서 삭혀야 제맛이 난다고 했다. 이 제맛이란 곧 암모니아의 발생으로 코를 톡 쏘며 맵고 지릿한 맛을 말한다.

    남도음식 중 두엄 속에 삭힌 것으로는 또 집장(汁醬)이란 게 있지만 홍어만은 절대로 삭혀야 제맛이다. 타지역 사람들은 이 지릿한 맛에 금방 나가떨어진다. 그러나 남도인만은 무슨 잔치나 울력이 벌어지면 이 음식만은 절대로 빼놓지 않는다. 홍어와 탁배기를 홍탁이라 하고 여기에다 해묵은 배추김치와 돼지편육을 얹으면 목포3합이 된다. 남도밥상이 걸죽하고 힘이 넘친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는 마치 충청도 서해안 지방의 대소사에서 떠오르는 청풍명월 ‘무젓’과 같은 자리매김이 된다. 이 별미를 남도에선 ‘개미’라 하고 ‘개미가 쏠쏠하다’고도 표현한다. ‘개미’란 생생력의 문화, 즉 1차적인 문화에서 볼 때 ‘그늘’을 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늘’이 있는 음식, ‘그늘’이 있는 소리, ‘그늘’이 있는 사람, ‘그늘’이 있는 시와 예술이 된다. 이 ‘그늘’이란 음식에서 ‘삭힘’을 말하고 잘 삭히면 ‘시김새’ 즉 ‘곰삭다’란 말과 같다. 소리꾼도 이 ‘삭힘새’(시김새)가 붙어야 비로소 수리성을 내는 명창이 된다. 덤벙기법이란 이처럼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러니 올 때는/ 남도 산천에 눈이 녹고 참꽃 되면 오라/ 불발기 창 아래 너와 곁두리 소반상을 들면/ 아, 맵고도 지린 홍어의 맛/ 그처럼 밤도 깊은 남도의 식탁….

    (필자의 시 ‘남도의 밤 식탁’의 일부분)

    눈보라치는 날 흑산도에 와서 어찌 이런 시 한 수 렴하고 가지 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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