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4

2000.12.21

벼랑 끝 인문학, 인터넷으로 날개 달까

값싼 수강료로 대학수준 고급강의 마음대로… 강제성 없어 효율 떨어지는 ‘흠’도

  • 입력2005-06-10 10: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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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벼랑 끝 인문학, 인터넷으로 날개 달까
    얼마 전 매스컴이 일제히 서울대학교의 박사과정 미달사태를 보도했다. 서울대에 개설된 대부분의 박사과정 지원자 수가 정원에 미치지 못했으며 심지어 학위 취득이 곧 취업으로 연결되던 공대조차 학생들로부터 외면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순수학문의 위기에 대한 언론의 호들갑은 때늦은 일이다. 경제위기와 뒤이어 불어닥친 벤처기업 붐, 그리고 다시 찾아온 불경기의 찬바람 속에서 학생들은 학문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캠퍼스에 난무하는 것은 전공서적이 아니라 토익 강의와 고시열풍이며 ‘멋진 젊음’은 벼락부자가 된 벤처기업 사장이나 프로게이머들이다.

    그러나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최근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첨병인 인터넷을 통해 디지털과 가장 관계가 없을 듯한 인문학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모순된 이 현상은 미국에서 먼저 나타났다.

    미국 윌리엄스대학 교수인 마크 테일러와 허버트 앨런 테일러는 인터넷을 통해 대학강의 판매사업을 시작했다. ‘글로벌 에듀케이션 네트워크’(GEN)라는 이름의 이 사업체는 MBA코스나 법학대학원 등 인기과정뿐만 아니라 수강생이 날로 줄어 고전하고 있는 인문과 순수과학 강의를 인터넷에 올려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연간 20억달러 규모의 미국 인터넷 대학강좌산업이 매년 35%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다고 전했다.

    순수학문이 외면당하는 현실은 미국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는데 어떻게 GEN의 인터넷강의는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GEN의 강의가 대학생이 아닌 일반인을 겨냥했다는 것이다. 미국 사립대학 등록금은 연 4만(5000만원)~10만달러(1억2000만원)에 달해 자녀의 대학 등록금을 제대로 낼 수 있는 가정이 50%도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인터넷 강의를 이용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엄청난 교육비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도 큰 돈 들이지 않고 대학수준의 고급 강의를 들을 수 있다. 물론 대학은 대학대로 날로 수강생이 줄어드는 인문학 강의를 판매할 수 있어 좋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이처럼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가 가능할까. 일단 인터넷에 개설된 인문학 강좌들을 검색해 보자. 네튜니,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 사이버서당, 철학아카데미, 잠치 등 몇몇 인터넷 강좌들이 눈에 띈다.

    이러한 인터넷 강좌들은 대부분 올해 시작되었거나 서비스를 준비중이다. 아직 시험기간인 셈인데 그 시험이 녹록지만은 않은 듯하다. 이미 두 학기 강의를 진행한 ‘네튜니’는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강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먼저 네튜니에 개설된 강좌를 보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화, 영국 근대소설의 고전을 찾아서, 베르그송과 지속의 철학, 시민사회와 포스트모더니즘 등 인문학에 약간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군침이 돌 만한 강좌들이다.

    그러나 1주일 무료 강좌를 신청하고 강의에 접속해 보면 흥분은 가벼운 실망으로 바뀐다. 교수가 매주 띄운 강의내용을 듣거나 읽어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강의실도 동료 학생도 없다. 음성서비스로 교수의 강의를 들을 수는 있지만 동영상이 제공되지 않는 대부분의 강의에서 교수의 얼굴을 볼 기회조차도 없다. 이 행위를 과연 ‘강의를 듣는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교수가 칠판에 흘려 쓰던 난삽한 글귀들과 그 글귀들을 노트에 필기하는 소리만 사각사각 들리던 오후의 강의실, 창 밖을 뒤덮은 진초록빛 담쟁이덩굴, 조교의 출석 체크…. 굳이 이런 기억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달랑 모니터 앞에 혼자 앉아 듣는 강의는 삭막하게 느껴진다. 네튜니의 회원 수는 1만 명에 육박하지만 유료회원 수는 600~700명 선에 불과하다는 사실 역시 수강생들의 불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네튜니 콘텐츠 팀장인 윤석양씨도 온라인 강의의 한계를 인정했다.

    “강제성 없는 인터넷 강좌가 집중도와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현재 시범적으로 동영상 강좌를 운영중이다. 또 내년부터 서비스될 교수-학생간 화상채팅이 일반화하면 수강생들의 반응이 훨씬 나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동영상과 음성서비스, 교수와의 화상세미나 등 기술적 문제들은 인터넷 강의의 대중화를 위해서 반드시 해결돼야 할 문제다. 교수가 칠판에 필기하는 모습을 모니터에서 그대로 볼 수 있는 GEN의 강의는 “15명이 참여한 세미나보다는 못하지만 500명이 들어찬 대형 강의실보다 나은 수준”으로 평가된다.

    국내 인터넷 강좌산업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은 단순히 심리적 거리감과 기술적인 문제뿐만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인터넷 강의는 이미 하나의 산업이자 평생교육의 장으로 정착돼 있다. 하지만 한국의 평생교육은 학문보다 외국어, 컴퓨터 등 실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전수받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평생교육기관을 표방한 네튜니의 수강생층 역시 학생과 일반인의 비율이 5대 5 정도로 학생비율이 높은 편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강의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는 철학아카데미의 이정우 원장은 “인문학 강의에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롭지 못한 한국의 경제상황”을 원인으로 지적한다. 사회 전체의 침체가 인터넷 강의에도 그 여파를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인터넷강좌는 미국에 비해 아직 내용이 빈약하다. 길은 잘 닦여 있지만 달릴 차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인터넷 강의는 시기상조인가. 그렇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인터넷강의의 가능성은 지금까지의 우려를 모두 불식시킬 만큼 열려 있다. 인터넷 강의는 기존 대학강의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한 파급효과를 가진다. 한 명의 교수가 한번에 수백, 수천 명의 학생들에게 강의할 수 있고 학생은 강의를 반복해 듣거나 듣고 싶은 부분만 집중적으로 들을 수도 있다. 인터넷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학문을 전파하는 첨병이 될 것이라는 가정은 그래서 가능하다. 또 내년에는 정식으로 학위를 수여하는 9개의 사이버대학이 문을 연다. 인터넷 강의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된 것이다.

    인터넷은 지금까지 일반인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고 민첩하게 변신해 왔다. 인터넷이 정보의 바다에서 평생교육과 학문의 장으로 변신할지, 또 벼랑 끝에 선 인문학이 인터넷을 통해 ‘기사회생’할 수 있을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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