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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철새들,지친 날개 쉴 곳 어디메뇨

220여종 40만마리 ‘새들의 낙원’… 서산농장 매각 추진으로 보금자리 훼손 초읽기

서산 철새들,지친 날개 쉴 곳 어디메뇨

서산 철새들,지친 날개 쉴 곳 어디메뇨
철새 낙원’엔 ‘폭풍전야’의 암울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12월5일 충남 서산시 현대 서산농장. 한때 소금기 가득한 바다와 갯벌이었던 땅. 시야를 압도하는 드넓고 황량한 겨울들판은 온통 철새들 차지였다.

거대한 담수호와 갈대가 무성한 습지 주변엔 혹부리오리 황오리 흰뺨검둥오리 고방오리 등 각양각색의 오리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고 기러기떼는 석양을 배경으로 무리지어 날았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논둑길을 달리는 차창 너머로 말똥가리 한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졸고 있는 광경도 눈에 띄었다. 평화로운 겉모습. 새들은 그들의 운명을 알까.

“저건 잿빛개구리매(천연기념물 323호)죠. 좀체 보기 힘든 놈인데… 하지만 곧 사라질 겁니다. ‘낙원’도 새들도 모두….”

덜컹대는 지프차 곁을 유영하듯 스쳐 지나는 철새를 가리키는 김현태씨(32)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그는 이곳 철새들을 아끼는 조류연구가. 그의 고민은 ‘낙원의 평화’가 깨질 것에 대한 우려였다. “일반매각의 결과는 불보듯 뻔합니다. 동북아 최대의 철새 도래지가 고스란히 파괴되는 거죠. 다시는 이 새들을 여기서 볼 수 없을 겁니다.”

이미 눈앞에 닥친 철새의 위기는 최근 진행중인 현대건설의 서산농장 일반매각 작업이 구체화될수록 더욱 절박한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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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 서산농장은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조원 이상을 쏟아부어 조성한 간척 농지. 1982년 천수만 일부를 방조제로 막은 뒤 서산시와 홍성-태안군 일대에 13년간 간척사업을 벌여 지난 95년 완공했다. A, B지구로 구분된 농지는 모두 3122만평. 여의도 면적의 30배다. 단일경영농장으로선 세계 최대 규모이자 우리나라 전체 벼재배 면적의 1%에 해당한다.

그러나 현대건설이 지난 11월29일부터 경영정상화를 위한 자구안으로 서산농장 매각을 추진하면서 농장은 이제 조각날 운명에 처했다. 매각대상 농지 3082만평 중 1006만평은 천수만 매립에 따른 피해 어민들에게 분양될 예정이고 일반 매입희망자를 대상으로 한 나머지 2076만평에 대한 매각은 12월7일 현재 진행중이다. 현대건설에 따르면 매각계약은 12월20일까지 완료된다.

문제는 이런 ‘현대 살리기’ 과정에서 보금자리를 잃을 운명에 처한 철새들의 보호문제가 간과되고 있다는 것. 기업이 살자는데 그까짓 철새가 무슨 대수냐는 일부의 지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서산농장 철새들의 면면을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서산농장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철새 도래지다. 여름-겨울철새와 도요새 등 ‘나그네새’들이 사시사철 서식하고 경유지로 삼는 곳이다. 이곳에서 최근 수년간 관찰된 철새는 모두 12목 32속 220여종. 그 수는 40여만마리에 달한다. 텃새를 포함, 국내에서 일년 동안 찾아볼 수 있는 조류가 450여종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다. 이중엔 세계적인 희귀조로 알려진 황새(199호)를 비롯해 천연기념물만 20여종. 을숙도(부산)나 주남저수지(창원), 순천만, 금강 하구, 철원, 해남지역 등 다른 주요 도래지들은 비교가 안 될 정도다.

국립환경연구원 야생동물과 김진한 연구원(38·조류생태학 박사)은 “지난 2월 실시한 겨울철새 전국 동시조사에서도 서산농장 일대에서 90여종의 철새가 겨울을 난 것으로 확인됐다”며 “특히 전세계에 20만마리 가량 분포하는 가창오리의 95%가 이곳에서 월동한다”고 밝혔다. 가창오리(머리에 태극무늬가 있어서 북한에선 태극오리로 부른다)는 2000년 10월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지역 철새보전전략수립회의’에서 ‘동북아 보호철새’로 지정될 정도로 동북아 이외 지역에선 찾아보기 힘든 조류다.

‘주간동아’ 취재팀이 12월5, 6일 양일간 서산농장을 관찰한 결과 이미 가창오리는 한주 전쯤 남쪽으로 떠나 접할 수 없었지만 천연기념물인 흑두루미(228호), 노랑부리저어새(205호) 등 다양한 희귀 철새들을 볼 수 있었다.

서산농장이 단기간에 이같은 대규모 철새 도래지로 변모한 데는 사실 현대측의 대단위 영농기법 덕이 컸다. 농장 건설 이전에도 물론 철새는 있었다. 하지만 동양 최초로 농업용 경비행기를 이용해 볍씨와 농약을 뿌리는 현대식 기계화 농법은 현대측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철새의 먹이인 낙곡(落穀)을 대량 발생해 철새의 종과 개체수를 늘렸다. 현대측은 한해동안 철새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낙곡의 양만 전체 벼수확량의 7%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A, B지구 경계에 위치한 도비산과 군부대(공군 해미비행장)가 농장을 둘러싼 데다 현대측이 일반인의 농장 출입을 엄격히 통제해 철새들이 목숨을 위협받지 않았던 것도 ‘새들의 천국’이 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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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조류 연구가들의 우려는 농장 매각 직후 급격히 증가할 인간의 ‘간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철새의 안전과 먹이를 앗아가기 때문이다.

“매각 이후엔 수많은 농민들의 출입이 불가피해 철새 서식환경이 크게 열악해진다. 관리부재로 무분별하게 농약이 뿌려지고 ‘싹쓸이 추수’로 낙곡도 사라진다.” 천수만탐조회 교육간사 한종현씨(40·서산 지곡고 교사)는 그 근거로 서산시에 인접한 당진군 대호지의 예를 든다. 대호지는 서산농장과 같은 위도에 있고 직선거리로 불과 10여km 떨어진 비슷한 조건의 간척지이지만 소규모 영농으로 농민 출입이 잦아 철새들이 전혀 찾지 않는다는 것.

“청와대, 환경부 등 관련기관에 수차례 민원을 넣어 철새 보호대책을 조속히 강구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지만 아무도 적극적인 관심을 갖지 않았다. 왜 단 한번만이라도 철새의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보지 않는가.” 철새 도래지 보전을 ‘범국가적 문제’로 단언하는 한씨와 천수만탐조회는 12월8일 현재 서산농장 매각금지가처분신청을 준비중이다.

그러나 유동성 위기를 극복해야 할 현대건설로선 철새는 그야말로 ‘군식구’에 불과할 뿐이다. 현대건설 이승은 영농사업팀장은 “철새 문제에 대해 심정적으론 공감한다. 그러나 경영정상화가 ‘발등의 불’인 마당에 철새에까지 눈돌릴 여유는 없다.” 현대측은 그동안 ‘본의 아니게’ 먹여 살려온 철새들에 대한 지속적인 ‘양육권’을 포기한 셈이다.

철새 보호의 선두에 나서야 할 환경단체들의 ‘액션’도 미약하다. 서산지역 환경단체인 서산-태안환경운동연합이 지난 11월24일 매각중단 성명을 발표한 게 고작이었다. 이 단체의 문순수 간사는 “현재 안면도 해안도로 공사에 따른 사구(바닷가 모래언덕) 훼손 대책활동으로 철새 관련 활동의 여력이 없다”며 “다만 매각과정에서 철새가 주로 찾는 담수호 주변 농지를 정부가 사들여 생태농업지구로 조성하도록 노력을 보탤 생각”이라고 말했다.

관련부서인 환경부 관계자의 답변은 걸작(?)에 가깝다. “매각 결정이 워낙 갑작스레 이뤄져 철새들의 위기를 최근에야 알게 됐다. 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분양이 끝나 영농이 시작되면 철새보호 대책 마련에 나서겠다.” ‘어떻게’ 노력하겠다는 답변은 아예 빠져 있었다. ‘철새’를 보지 않고 ‘논’만 보는 기업과 정부 공히 무대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매각이 완료되면 내년부터 일반인들의 영농이 부분적으로 시작될 전망이다. 버림받은 서산농장의 철새들은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조류전문가들은 “적응도가 뛰어난 철새들은 점차 다른 ‘거처’를 찾겠지만 생태학적으로 적응력이 약한 종(種)인 경우 기존 도래지를 잃으면 단기간에 멸종위기에 놓이는 것이 통례”라고 경고한다. 서산농장 매각이 어떤 양상을 띠게 될지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경제논리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그들을 철저히 외면했듯, 철새들은 그들의 빼앗긴 낙원을 곧 잊을 것이다.



주간동아 2000.12.21 264호 (p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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