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4

2000.12.21

‘넘버2’가 뭐길래…

‘제2의 김현철’ 발언으로 흔들리는 권노갑 파워 … ‘고위직 인사 한손에’ 소문 무성

  • 입력2005-06-08 13: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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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넘버2’가 뭐길래…
    민주당 권노갑 최고위원의 진퇴 문제가 여권의 ‘뜨거운 감자’가 됐다.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을 비롯한 민주당 소장파들은 그의 2선 퇴진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급기야 ‘제2의 김현철’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과연 그는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요즘 권위원은 일주일에 두세 차례씩 골프장에 나간다. 물론 골프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만 속사정을 알고 보면 다른 이유도 있다. 그의 최측근인 민주당 이훈평 의원은 “그가 자주 필드에 나가는 이유는 운동도 운동이지만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가 골프를 배운 것은 98년 가을, 일본에 체류할 때다.

    그가 4개월여를 일본에 머물다 귀국한 98년 12월30일, 김포공항에는 400여명의 대규모 환영객이 그를 맞이했다. 이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집, 여의도 민주당사, 그가 주로 사람들을 만나는 장충동 신라호텔 등에는 사람들이 들끓었다. 2000년 4·13 총선 때는 대문을 닫아 걸고 모처로 잠적하기까지 했지만 집요하게 그를 만나려는 사람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역으로 그의 막강한 영향력을 입증한다. 한화갑 최고위원이 민주당 당정쇄신론 파문과 관련해 “권위원이 제2인자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알지 않는가. 내가 거기에 덤벼들겠나”고 말한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권위원이 더 이상 ‘막후 실세’가 아니고 ‘사실상의 부통령’임을 동교동계 핵심 인사부터 자인한 것이다.

    지난 총선 때의 일이다. 공천 작업이 막바지에 오른 민주당사에 전직 장관 한 명이 당시 권노갑 고문을 찾아왔다. 그 인사는 무려 7시간이나 방 앞에서 권고문을 기다렸지만 권고문과 눈 한번 마주치지 못하고 낙담한 채 돌아갔다. 그 인사는 전국구 공천을 강력히 희망했다는 것이 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넘버2’가 뭐길래…
    민주당 관계자들은 지난 총선 공천의 상당수가 “권노갑-한광옥 라인의 합작품”이라는 데 이견을 달지 않는다. 당시 한화갑 특보단장은 사무총장 재임시 총선에 대비하기 위해 많은 인사들을 접촉하고, 그 명단을 후임 정균환 특보단장에게 넘겼지만 정작 뚜껑이 열리자 대부분 인사들이 낙천했다. 당의 내천 인사 명단이 청와대로 올라가 대통령에게 최종 보고되기 전까지의 과정에서 일종의 ‘변질’이 생기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권위원은 고문이라는 어정쩡한 직함을 갖고 있었지만 사무총장(김옥두)부터 사무부총장이나 기조위원장(최재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권위원 직계 라인으로 ‘천하통일’을 이룬 상태였다. 권위원과 한위원의 갈등은 이미 이때부터 심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여권 내부 사정에 밝은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최근 말썽 많은 경찰청 인사도 권위원과 김옥두 총장의 관련설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학력 위조로 중도하차의 불명예를 안은 박금성 전 서울경찰청장의 경우 권위원이나 김총장과 모두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6월 한 정보기관에서 일부 고위급 인사이동이 있었다. 당시 새로 임명된 한 차관급 인사는 임명되자마자 권위원을 찾아가 보고를 드리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막상 권위원은 “내가 왜 그런(차관급의) 사람을 만나나. 내 비서나 만나라”고 했다는 풍문도 전한다.

    요즘 시중에서 회자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인사는 권부, 공사는 쭛쭛쭛”라는 것이다. 인사 청탁은 권위원(권부는 권위원 별칭), 건설공사 청탁은 다른 아무개라는 말이다. 그만큼 현 정부의 장관급 아래 차관급 인사부터는 권위원의 입김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작용한다고 보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인 여론이다.

    정가에서는 정부투자기관이나 공기업 전현직 임원 등 40여명이 회원인 ‘중심회’(회장 장정곤 한국전기안전공사 이사장), 공기업 감사들의 모임인 ‘감사인동우회’(회장 조동회 국민건강보험공단 감사), 연청(새시대새정치연합청년회) 출신 주요 인사들로 구성된 ‘특우회’(회장 민주당 배기운 의원) 등에 권위원과 친밀한 사람들 다수가 진출해 있다고 보고 있다.

    한 정부부처 고위인사는 얼마 전 주변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를 털어놨다. “권위원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민원사항을 얘기했다. 듣고 보니 권위원이 말한 내용은 누군가 얼마 전 내게 청탁을 했던 것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라고 얘기해 준 사안이었다. 내게 안 되니 권위원에게 가져갔던 것 같다. 그래서 권위원에게 ‘손 떼시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했다.”

    권위원이 김현철씨와 비교되는 이유 중 하나는 권위원도 김씨처럼 ‘호텔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김씨가 롯데호텔이었다면, 권위원은 신라호텔인 것이 다르다. 민주당의 한 소장파 의원은 “IMF와 이어진 불경기로 인해 일반 서민은 호텔에서 커피 한 잔 마시기 어려운 형편인데, 명색이 공인이라는 사람이 방 하나에 몇십만원도 넘는 최고급 호텔 방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정상이냐”면서 “권위원이 자신과 관련해 각종 이상한 얘기들이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호텔 방에서 사람 만나는 일부터 그만둬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권위원측은 시중 여론의 상당수가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항변한다. 권위원의 한 측근은 “권위원의 특보나 자금모집책, 후원회 등을 사칭해 돈을 요구한다든지 이권을 달라든지 한 사례가 한 둘이 아니다. 내가 들은 것만 40건이 넘는다. 일부는 실제로 권위원을 아는 사람이 사칭한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사칭한 사람의 실명이 드러난 사건이 있어 추적중이다”고 말했다. 이훈평 의원도 “‘이 사람이 권위원 측근 맞느냐’는 확인 전화가 심심치않게 걸려온다. 그러면 나는 ‘일단 잡아 넣고 얘기하자’고 말한다. 골치 아프다”고 말했다.

    그러나 권위원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느냐”고 반문한다. 어떤 식이든 권위원의 처신에 문제가 있으니 자꾸 이러저러한 얘기가 나오지 않느냐는 것. 한 동교동계 인사는 “권위원은 정권교체 뒤 사람들의 ‘자리’를 챙겨주는 역할을 했다. 인사에 관한 한 그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사람을 챙기다보니 민원 해결이 잘 되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더 그를 찾아가는 것 아니겠느냐”고 설명했다. 한 동교동계 의원조차 “권위원이 대통령을 대신해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니 자꾸 탈이 나는 게 아니냐”고 말한다.

    권위원의 힘은 기본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에게서 나온다. 두 사람은 ‘이와 잇몸’ ‘물과 물고기’ ‘바늘과 실’로 비유될 정도로 남다른 관계를 맺어왔다. “김대통령이 없는 나는 생각하기 어려우며 내 인생 어느 구석을 살펴보더라도 그분의 그림자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게 권위원의 고백이다. “내가 죽으면 비석에 김대중 선생 비서실장이라고 새겨주면 영광이다”라는 그의 희망은 ‘김대중 신도 권노갑’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권위원이 동교동의 자금관리를 맡으며 명실상부한 김대통령의 최측근이 된 것은 1971년 대통령선거 이후다. 그때부터 그는 수첩이나 경리장부 등을 전혀 갖고 다니지 않고 모든 것을 머릿속에 외고 다녔다. 그는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필요한 전화번호가 50∼100개 정도는 항상 저장돼 있다”고 말한다.

    이훈평 의원은 “김대통령과 권위원 간에 서로 몰랐던 금전관계가 딱 두 번 있었다”고 전했다. 권위원이 93년 3월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으로부터 2억5000만원의 돈을 받은 것과, 80년대 말 김 대통령이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을 받았을 때라는 것. 이의원은 “권위원은 특히 한보사건 이후 돈에 관해 굉장히 조심한다”며 한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권위원이 98년 8·15 특사로 사면복권된 뒤 일본에 있을 때 평소 잘 알던 한 인사가 “용돈으로 쓰시라”며 돈을 갖고 그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권위원은 “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는데 어떻게 돈을 받느냐”며 호통쳐 돌려보낸 일이 있다는 것.

    민주화 운동으로 세 번의 옥고를 치른 그는 3선의원 시절인 97년 초 한보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자신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겼다. ‘충성스런 조직-자금관리자’라는 이미지가 이때부터 ‘구시대 정치인’이라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 이 때문에 그는 4·13 총선을 앞두고 시민단체들로부터 공천 부적격자로 지목받았다. 권위원도 ‘정치 인생 40여년 가운데 가장 아쉽고 분하고 참담한 시간’으로 한보사건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98년 12월30일 귀국한 뒤 99년 2월25일 민주당 고문으로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한 그는 올 2월8일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공천 탈락 사실을 통보하고 그 후유증을 달래는 일을 맡아 ‘저승사자’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때 불출마하거나 낙천된 사람들은 후에 일오회라는 모임을 만들었고, 권위원은 이들의 자리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채영석 고속철도건설공단 이사장, 김명규 수자원공사 사장 등 공기업으로 진출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도움을 받았다. 현재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인사 개입설’은 이때부터 번지기 시작했다. ‘낙하산 인사’ 얘기가 나올 때마다 권위원이 거론됐고 “권위원을 만났다”는 것이 하나의 보증수표처럼 통용됐다.

    그러나 권고문측은 이에 대해 “그 사람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은 당에서 공식적으로 올린 안이었다. 권고문은 단지 총대를 멨을 뿐”이라고 말한다. “군이나 행정부 등 다른 부분에서 권위원이 인사에 개입했다는 말이 있느냐”는 항변도 내놓는다.

    권위원은 총선 불출마에 이어 7월7일 다시 한번 ‘8·30 전당대회 최고위원 경선 불출마’를 선언한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통령의 심리에 밝은 권위원이 이런 식으로 대통령에게 자꾸 마음의 짐을 안기며 힘을 키우고 유지해 간다”고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권위원측에서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대통령을 위한 살신성인의 자세”라고 반박한다.

    여권 내에서 김대통령에 대한 권위원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교주와 신도 같은 관계인 ‘권노갑식 충성’이 대통령을 어렵게 하고 나라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최근에는 권위원이 대통령의 지침을 100% 지키지 않고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으로도 보고 있다. 지난 8·30 전당대회 직후 기자회견에서 권위원이 “앞으로 당과 정권재창출의 중심에 서겠다” “내가 가장 연장자로서 당에서 논의할 때 주된 역할을 하겠다”고 공공연히 자신의 위상을 강조한 것이 한 사례다.

    그러나 당내 초재선 의원들은 그의 ‘권위’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 이훈평 의원을 제외하고는 그와 친한 것으로 알려진 의원들조차 공개적으로 나서서 권위원을 변호하길 꺼릴 정도다. 그를 보는 여론의 눈길이 곱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심권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문제”라던 권위원의 측근들도 최근 여론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한물 간 정치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한 측근은 “마땅한 해결책이 없어 고민”이라고 털어놨다.

    세상 사람들은 김대통령에 대한 그의 충성이 국정 운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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