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6

2000.10.26

코와 혀 사로잡는 진한 사과향기

  • 허시명

    입력2005-06-30 14: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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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와 혀 사로잡는 진한 사과향기
    녹두주(鹿頭酒)라고 있다. 사슴의 머리를 삶아서 짓찧어 낸 즙으로 담근 술이다. 밤에 헛것을 보거나 기가 허한 사람들을 위한 약술로 마셨다고는 하지만, 인간이 모질다는 생각이 앞선다. 아마도 사슴이 흔했던 지방에서 담았던 술이겠거니 싶다.

    모름지기 풍요가 술을 부른다. 과잉 생산되는 포도를 오래 맛볼 수단으로 포도주를 빚었고, 창고에 가득 쌓인 곡물의 가공 수단으로 곡주를 빚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나라에서는 흉년이 들면 금주령을 내렸고, 풍년이 들면 이를 풀었다.

    이 가을이면 경상도에는 사과가 차고 넘친다.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니 큰 길목은 아예 사과전시장이 되고 만다. 경상도에서도 사과 생산량이 많고 맛이 좋다는 의성군을 찾아갔다. 사과 재배의 적지라는, 일교차가 심하고 배수가 잘 되는 특징을 두루 갖춘 지역이다. 그래서 의성군을 돌아다니다보면, 논보다는 사과밭이 더 많아 보인다. 그런데 생산량이 많다보니, 사과 농가들의 걱정이 사과나무에 달린 사과만큼이나 많다. 못생긴 사과나 때깔이 안 난 사과는 제 값을 받지 못해서 속을 태운다. 태풍이라도 불고 지나가면 떨어진 사과들 보기가 대학 떨어진 자식 보기보다 더 안타깝다. 그래서 사과를 삶아도 먹고, 설탕에 재서도 먹는다.

    의성에서 사과를 재배하던 한임섭씨가 1979년에 프랑스 노르망디를 여행할 때였다. 사과 브랜디의 대명사가 될 만큼 유명한, 칼바도스 지역엘 들렀다. 그는 그곳에서 사과주 담그는 것을 보았다. 사과는 자두 크기 정도로 볼품없었다. 대추를 따듯 막대기로 후려쳐 사과를 따는데 맛도 별로였다. 그런데 그 사과가 세계 제일의 사과 브랜디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그는 우리 사과로 빚으면 훨씬 더 질 좋은 술을 빚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나 한씨는 본격적으로 사과술을 빚기 시작했다. 과잉 생산되는 사과의 새로운 판로를 만들어서, 농가 소득을 올리겠다는 의도였다. 오랜 준비 끝에 과수 농민 27명으로 구성된 우리능금 영농조합법인을 지난해 4월에 설립하고, 6월부터 사과주를 출시하게 되었다.



    사과로 술을 만들다니, 그 자체가 신기하고 기특해서 나는 지난 봄 경주 술 축제가 열릴 때에 술 욕심을 부려 맛본 적이 있었다. 이번 취재도 그런 호기심의 연장선에서 비롯되었다.

    중앙고속도로의 남안동 나들목을 빠져나와 의성쪽으로 내려가면 단촌면 소재지가 나온다. 그곳에서 신라 사람 최치원이 지은 건물이 두 채 있다는 고운사(孤雲寺) 방향으로 가다보면 후평리라는 동네가 나온다. 의성 김씨가 사는 기품있는 한옥이 있는 동네인데, 그 한옥은 몇 해 전에 안채가 불타서 지방문화재 지정이 취소되었다. 그곳에서 서애 류성룡이 태어난 전설이 깃들인 사촌가로숲(천연기념물 405호) 방향으로 100m쯤 가면 사과술 공장 ‘우리능금’(054-834-7800)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사과 와인을 생산하는 업체는 있지만, 사과 브랜디를 생산하는 곳은 이곳 의성에 한곳뿐이다. 수입품도 프랑스산 칼바도스 정도뿐이어서 사과 브랜디는 귀한 술에 속한다. 사과주가 드문 것은 사과로 술을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은 아니다. 사과는 포도에 버금갈 정도로 당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술의 원료로서 적합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포도는 껍질에 무수한 미생물이 들어 있어 으깨만 놓으면 알코올 발효가 절로 일어나지만, 사과는 효모를 주입해주어야만 술이 되는 차이가 있다. 문제는 원료비가 많이 들고 단맛이 돌기 때문에 쉽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능금’에서 올해 선보인 사과 와인(16도) 마루스 700ml 한 병에는 사과 14개가 들어가고, 사과 브랜디(40도) 마루스 700ml 한 병에는 사과 33개가 들어간다. 브랜디 한 병에 웬만한 사과 한 박스가 담긴 셈이다. 제조 방법은 우선 사과를 깨끗하게 씻어서 이를 분쇄하여 즙을 낸다. 사과즙에 효모를 첨가하여 섭씨 15도에서 20도 사이에서 20일 동안 발효시키면 사과 와인이고, 이를 증류하면 브랜디가 된다. 물이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사과즙이다.

    엔지니어 출신인 한임섭씨에게 사과주 비법을 전수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과수 재배용 사과가 처음 도입된 1890년대에 원산에서 사과를 첫 재배한 학농장의 경영자 윤병수씨의 손자인, 윤세훈씨였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여 미생물을 전공했고, 40년대에 사과브랜디를 만들어 중국 상하이에 있는 영국군 피엑스에 납품하기도 했다. 경상도 경산에서 파라다이스 사과브랜디를 만들기까지 했는데 1993년에 한임섭씨가 찾아갔을 때 83세로, 경기도 부평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젠가는 사과주를 다시 빚어야 한다는 생각에 효모를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그는 한임섭씨에게 자식들에게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당신에게 알려준다며, 밤을 새워가며 그 비법을 전수해주고 효모까지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우리 사과주를 만들게 되면 일본이나 프랑스에 비교할 것도 없다고 자신했다. 한임섭씨는 그 고마움에 공장을 차리고 나서 근처 과수원으로 윤세훈씨를 모시려고 연락했더니, 그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고 없었다.

    코와 혀 사로잡는 진한 사과향기
    한임섭씨가 사과 와인 ‘마루스’(Malus) 한 잔을 권했다. 술 이름은 사과의 학명인 마루스 푸밀라(Malus pumila)에서 따온 것이었다. 술은 사과의 속살빛보다 짙은 옅은 호박색을 띠고 있었다. 잔을 드니 잘 익은 사과향이 풍겼다. 발효라는 화학 변화를 거쳤는데도 사과향이 잘 잡혀 있었다. 술을 머금으니 단맛이 돌고, 마시고 나니 입안에 신맛이 남았다. 쓴맛이 느껴지지 않는, 말 그대로 맛있는 술이었다. 이게 사과술의 장점이고 단점이었다. 맛과 향을 즐기는 와인애호가들에게는 호평받을 만하지만, 쓴맛에 익숙한 애주가들에게는 싱겁게 느껴질 터다.

    16도 사과 와인에 견주면 40도 브랜디는 깐깐하고 야무졌다. 술 속에 향이 켜켜이 쌓여 있는데, 독한 술 기운에 좀체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맛을 음미해보려고 홀짝홀짝 마셔댔다.

    술 마시는 데도 격이 있다. 제2품으로 꼽는 것은 좋은 사람과 경치 좋은 곳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 최고의 품격은, 경치 좋은 곳에서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 사과를 붉게 한다는 따가운 가을 볕을 피해 내가 찾아간 곳은, 류성룡의 탄생 전설이 깃들인 사촌가로숲이었다. 원시림처럼 무성하게 자라오른 나무 그늘 밑에서 사과주를 마시니, 이 정도면 우리에게도 사과 와인이 있고, 사과 브랜디가 있다고 길 가는 아무나 잡고 술 권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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