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8

2000.08.24

‘강호’는 남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 입력2005-09-26 12: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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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호’는 남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낡은 장르인 듯하지만 무협물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칼 한 자루 허리에 차고 강호를 떠도는 고독한 무사의 모습과, 추잡한 인간의 땅에 발을 붙이지 않고 자유자재로 공중을 날아다니며 적을 응징하는 이들의 모습은 영웅이 없는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소오강호’의 노래말처럼 그저 웃으며 세속의 명성을 버리고 바람처럼, 물처럼 살다 간 영화 속의 무사들. 그러나 그들이라고 왜 욕망이 없었겠는가. 영화 ‘와호장룡’은 진정한 영웅이 되기 위해 사랑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무사들의 이야기다. ‘와호장룡’은 ‘진정한 영웅과 전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는 뜻의 고대 중국인들의 속담. 사회적 규율과 대의명분 밑에 감춰진 인간의 욕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영화에서는 숙명의 덫에 걸려 마음속 열정을 누르고 살아야 했던 무사들의 삶을 뜻한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 ‘결혼피로연’ ‘음식남녀’ ‘아이스 스톰’ 등을 연출해 할리우드의 명감독 대열에 오른 이안 감독. 대만 출신이지만 지극히 서구적인 영화를 만들어오던 그가 마침내 동양으로 눈을 돌려 중국식 무협물을 만들었을 때 과연 어떤 영화가 나올까, 반신반의했던 사람들은 ‘와호장룡’을 보고 “역시 이안!”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출연진도 화려하다. 할리우드로 건너간 아시아의 스타 주윤발과 양자경, ‘제2의 공리’로 불리는 중국의 신세대 스타 장지이. 주윤발은 ‘영웅본색’의 팬들이 기억하는 우수와 허무의 이미지를 다시 되찾았고, ‘예스 마담’으로 기억되는 양자경은 섬세한 감정의 결을 지닌 여전사로 다시 태어났다. 당돌한 20대 여자 검객을 맡은 장지이는 이렇게 쟁쟁한 선배 스타들 사이에서도 유독 빛난다. 앳된 외모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기력과 우아한 검술을 선보인 그녀의 모습은 ‘와호장룡’이 선사하는 또 하나의 선물. ‘해피 투게더’에서 토니 륭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대만의 청춘스타 장진이 장지이의 상대역으로 출연한다.

    19세기 말 강호의 이름난 검객 리무바이(주윤발)는 살육에 염증을 느끼고 강호를 떠나려 한다. 그는 무당파의 보검인 ‘청명검’을 오랜 동료인 수련(양자경)에게 맡긴다. 어느 날 복면을 한 검객이 검을 훔쳐 달아나고 수련은 범인이 귀족의 딸 용(장지이)임을 눈치채지만 그를 벌하지 않고 친자매의 연을 맺는다. 리무바이는 무공이 뛰어난 용을 무당파의 수제자로 키우려 하지만 용은 이를 거부한 채 무림을 떠돈다.



    영화는 현란한 액션 못지않은 서사적 로망스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만 감정을 숨긴 채 오랜 세월을 살아온 리무바이와 수련. 인간의 자유의지와 사회적 책무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의 모습은 이안 감독 특유의 정갈하고 고요한 영상 속에서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중국 대륙의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고 칼 동작 하나하나에 담긴 영웅주의와 사랑, 증오와 갈등의 표현이 뛰어나다. 하얀 안개가 깔린 푸른 대나무숲에서 리무바이와 용이 검술을 벌이는 장면은 가히 영화사에 남을 명장면.

    여느 중국영화에서처럼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도 자유자재로 공중을 날고 벽을 수직으로 타고 오르내리는 등 곡예에 가까운 동작을 선보이지만, 그것이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역시 감독의 힘이다. 이안 감독은 중국 무협이 지닌 동(動)의 미학에 정적인 분위기를 결합해 신비하고 철학적인 액션영화로 완성시켰다. 어딘지 슬픔이 배어 있는 무사의 모습, 바람을 가르는 청명검의 울음소리, 검을 휘두르는 여인들의 아름다운 동작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 ‘강호’는 남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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