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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사생활이 전화선으로 샌다

경찰, 용의자 주변 무차별 통화 명세 추적…신상 자세히 담긴 채 불법 유출도

당신의 사생활이 전화선으로 샌다

당신의 사생활이 전화선으로 샌다
부산경찰청 기동수사2대는 지난해 8월19일 보험 가입자로부터 받은 보험청약금 20억원을 회사에 입금하지 않고 가로채 달아난 혐의(업무상 횡령)로 삼성생명보험 부산 대리점 전 영업소장 강아무개씨(33)를 긴급 체포했다.

강씨는 지난해 7월9일 부산 동구 수정동 삼성생명보험 대리점에서 보험에 가입한 김아무개씨로부터 보험청약금 20억원을 자기앞수표로 받았다. 강씨는 이를 현금으로 바꿔 자신의 은행계좌에 나누어 송금하는 방법으로 돈세탁을 한 뒤 다시 현금으로 인출해 달아났지만 1개월 만에 체포되었다. 여기까지라면 이 사건은 그냥 단순한‘특정 경제 범죄 가중 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업무상 횡령)’ 사건이다.

그러나 문제는 경찰이 강씨를 어떻게 잡았느냐는 것이다. 강씨를 검거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 것은 강씨와 그의 주변인물 8명의 통화 명세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는 이 서류를 유엔 산하 비정부기구인 ‘국경 없는 기자단’ 서울지국을 통해 입수할 수 있었다. 세계 각국의 언론 자유 현황을 조사하는 ‘국경 없는 기자단’은 한국의 도-감청 실태에 관한 보고서를 준비하다가 이 서류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 통화 명세 서류를 분석해보면 달아난 강씨 한 사람을 추적하기 위해 ‘조사 주체’가 전화 통화 2800건을 추적하고, 통화자 179명의 신상을 조회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서류에는 통화자 개인의 직업과 주소, 주민등록번호까지 나와 있다. 179명 가운데 이름-주민등록번호-주소가 적힌 사람은 72명, 이름-주민등록번호만 적힌 사람은 18명이다. 또 이름과 주소가 밝혀진 사람은 33명이고 이름만 적힌 사람은 56명이다.

이 서류를 보면, 강씨의 경우 휴대폰 통화는 99년 7월1∼10일까지, 사무실 전화 통화는 6월1∼30일까지, 집 전화 통화는 4월1일∼7월31일까지 명세가 나와 있다. 또 부인 김아무개씨는 7월1일부터 8월4일까지의 휴대폰 통화 명세가 서류에 나와 있다. 처제인 김아무개씨의 휴대폰 통화 명세도 99년 7월1∼31일까지 추적되어 있다.



이 서류들 가운데 하나인 ‘통화내역총괄’문서는 수배된 강씨와 주변 인물 8인의 통화 명세를 종합한 것으로서, 이 총괄 문서에는 강씨 주변 인물인 양아무개씨가 99년 7월18일에 석아무개씨와 통화한 사실이 나와 있다. 기록에는 석씨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 주소가 그대로 나와 있다. 석씨라는 인물은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또 이 서류 30쪽에는 수배자 강씨가 집 전화로 99년 4월20일 양아무개씨와 통화한 명세가 나와 있고, 양아무개씨 이름 옆에는 ‘수천억 재산가, 큰손, 사채업자’라고 좀더 상세한 신상 정보가 적혀 있다. 서류 40쪽에는 강씨가 99년 6월2일 휴대폰을 쓰는 유아무개씨와 통화한 명세가 나와 있다. 유씨 이름 옆에는 그의 주민등록번호와 집주소가 적혀 있다. 유씨 또한 사건과는 전혀 관계없는 인물이다. 취재 과정에서 유씨는 “나는 강아무개와 통화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는데 왜 내 집주소와 주민등록번호가 노출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강씨 사건을 담당한 부산진 경찰서로 찾아가 항의하겠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담당한 한 경찰관은 통화 명세에 나와 있는 179명 가운데 실제로 사건과 관련된 인물은 3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리고 수배자를 체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당사자와 가족의 통화 명세를 1, 2주 정도만 추적하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마구잡이식으로 개인 통화를 추적할 수 있는 것은 현행법의 맹점 때문이다. 현행법상 경찰 총경급(일선 경찰서 서장, 경찰청 과장)이면 언제든지 검찰 영장 없이도 전화 회사에 협조를 요청해 전화와 휴대전화 통화를 추적할 수 있다. 현재 통신업체들은 언제 누가 통화 자료를 요청했는지 통합 관리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문제의 이 서류를 경찰이 아닌 사설 보안업체가 작성했다는 것이다. 이 문건과 사건을 제보한 취재원에 따르면 사건 내용은 이렇다.

삼성생명보험 같은 대기업에는 공금 횡령이나 사기 사건을 전담하는 경리과와 채권관리팀이 있다. 이 부서는 강씨가 공금을 횡령해 달아나자 이를 사설 보안업체인 ‘E시스템’에 의뢰했다. 사건을 경찰에 맡겼다가는 언제 해결될지도 모르고, 자칫 수사 과정에서 사건 내용이 언론에 샐 경우 기업 이미지에도 타격을 입기 때문이었다. 제보자에 따르면 사건을 맡은 보안업체 E시스템은 달아난 강씨와 그의 주변 인물 8명의 통화 명세를 낱낱이 추적했다. 이는 전화 회사의 도움을 얻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행위가 불법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통화추적 문건을 제공한 취재원에 따르면, 보안업체 E시스템은 이 정도로 조사하고도 달아난 강씨의 소재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난 5월 이 회사를 그만둔 전 경호운영팀장 이아무개씨는 좀더 ‘센 힘’을 동원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아무개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경찰 특수기관의 A수사관에게 이 사건을 해결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경찰 내부에서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A수사관은 다시 이 사건을 부산경찰청 기동수사2대에 넘겼다. 부산경찰청이 A수사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문건을 제공한 취재원은 E시스템의 이아무개씨가 사건을 경찰에 넘기면서 문제의 통화 추적 문건도 같이 넘겼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우리가 이 정도까지 조사해 놓았으니 마무리는 경찰이 하라”는 셈이었다. 결국 부산경찰청 기동수사2대는 사건이 발생한 지 한 달이 되기 전에 강씨를 체포할 수 있었다.

한편 E시스템 전 경호운영실장 이아무개씨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강씨 사건을 내가 맡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E시스템은 통화추적을 할 만한 능력도 없고, 애초에 그런 일도 없었다”며 제보자 증언을 전면 부인했다.

이 사건의 문제점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에 따라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통화추적 문건을 제공한 취재원의 증언이 모두 사실일 경우다. 이럴 경우 사설 보안업체 E시스템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통화 명세를 추적하고 개인 사생활을 조사한 셈이다. 그럴 경우 당연히 E시스템 관계자와 개인 정보를 유출한 전화 회사 관계자는 처벌받아야 한다. 또 경찰 관계자도 불법적인 자료로 수사했기 때문에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두번째는 경찰이 수사상의 필요에 의해 이 통화추적 문건을 만들었을 경우다. 경기도 구리에서 수배자 강씨를 직접 검거한 전 부산경찰청 기동수사2대 김아무개 경장은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통화명세서는 내가 직접 의뢰한 것이다. E시스템과는 접촉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경장의 말이 사실이라도 문제는 있다. 실정법상 문제가 없다 해도 통화 추적 범위와 필요성을 경찰에만 맡긴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다. 사실 서류상의 요청 주체가 총경이지, 정작 통화 추적 범위와 필요성을 판단하는 실무 주체는 일선 형사들이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이 통화추적 문건이 경찰에 넘어가지도 않았고, 경찰과는 무관한 자료일 가능성이다. 이 경우도 문제다. 개인 사생활이 포함된 자료가 이렇게 유통된다는 것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경찰은 수사를 통해 통신업체의 개인 통신자료를 빼내는 사설 기관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밝혀야 한다. 실제로 부산의 한 한국통신 관계자는 “부산시 차원에서도 통화추적 요청자와 조회된 통화 명세가 통합 관리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조회된 통화 명세는 물론이고, 언제 누가 그런 자료를 요청했는지조차 관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주간동아 2000.08.03 245호 (p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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